"나는 ‘어머니’라는 세 글자를 들으면 가슴 뭉클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지금까지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자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꿈결에서 들었던 “들들들” 하는 재봉틀 소리가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포근하게 나를 감싸 안는다. 어머니는 나의 우상이요 부처이시다."
어머니의 재봉틀 - 신능자
6월 어느 날 오후, 큰언니 집에서 세 자매가 만났다. 큰언니가 어머니의 유품인 재봉틀로 덧버선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다. 재봉틀을 돌리고 있는 큰언니의 모습을 보는 순간, 어머니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어 섬뜩하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생전에 이 재봉틀로 딸들의 버선을 곧잘 만들어 주시곤 하였다. “여자는 집안에서 버선을 신어야 다소곳해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은 늘 흰 버선을 신고 사셨다. 며칠 전 제사 때 친척들이 모여 앉아 어머니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렵고 힘든 세상을 의연하고 품위 있게 살다 가셨다고 입을 모았다.
어머니는 당신과 운명을 같이한 재봉틀을 ‘미싱’이라고 부르셨다. ‘미싱’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우리 가족의 생명줄이자, 희망이요, 기쁨의 발전소 같은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휩쓸 무렵, 일본에 건너간 어머니는 길가 한 모퉁이에서 재봉틀을 놓고 군인들의 군복을 수선하는 일을 하셨다. 어떤 때는 수선해준 품삯도 못 받고 구둣발로 차이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재봉틀을 얼마나 돌렸는지 어머니의 손가락은 굳은살이 박여 가뭄에 찌든 논밭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전란 중에 일본 땅에서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면서 살았으나 밟히면 밟힐수록 더 강하게 되살아나는 잡초처럼 나의 어머니는 강한 여성이었다. 타국에서 누구의 도움 없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막막하였을까? 생각하니 가슴에 파문이 인다. 다행히 일손을 도와주는 재봉틀이라는 생명의 끈이 있었기에 어머니는 희망을 잃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고 하였다. 몇 년 동안 어머니는 재봉틀과 한몸이 되어 밤낮으로 재봉바퀴를 돌리면서 많은 옷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집도 사고 아버지의 사업 밑천도 마련하여 안정된 삶을 누리면서 위로 오빠와 언니들을 중고등학교까지 보낼 수 있었다.
새벽 1시, 미그 B29 폭격기가 대판시를 불바다로 만들었을 때, 우리 집도 화마에 휩싸여 몸만 겨우 빠져나와 방공호로 피신을 해야만 했다. 그때 어머니는 ‘미싱’을 등에 지고 나오셨다. 어머니에게 ‘미싱’은 우리를 먹여 살리는 유일한 수단이자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 후 우리는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짓게 되어 어머니는 ‘미싱’ 일을 그만 두셨다. 그러나 명절 때가 되면 나와 언니의 설빔을 만드느라 밤을 지새우셨다. 그럴 때 나는 어머니 곁에서 ‘미싱’이 돌아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곤 하였다.
설날 아침 설빔을 입고 세배를 하러 동네방네 뽐내고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그 무렵 큰언니가 조합(농협)에 취직이 되어 첫 출근하던 날 어머니는 흰 광목천으로 양장을 만들어 주었으나 언니는 울상을 짓고 “상복 같은 이 옷을 어떻게 입고 가요.” 하면서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출근했었다고 하였다. 그때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회한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재봉틀을 애지중지하셨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반질반질하게 닦으면서 켜켜이 쌓인 고달팠던 삶의 흔적들도 한 겹 두 겹 닦아 내셨던 것만 같다.
재봉틀 구멍에 ‘미싱’ 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리면 처음에 “틀틀틀” 소리가 “들들들”로 부드럽게 변한다. 그리고 바늘도 순해져서 천 속을 쑥쑥 들락거리며 신명나게 명품을 만들어 낸다. 어머니의 끈질긴 생명력이 재봉틀에 배어 있는지, 백 살이 얼추 넘었는데도 아직도 건재함을 과시한다. 큰언니도 어머니처럼 재봉틀을 연신 돌리면서 덧버선 세 켤레를 솜씨 좋게 만들어 냈다. 그리고 구두닦이 소년처럼 윤이 나게 닦는다.
나는 ‘어머니’라는 세 글자를 들으면 가슴 뭉클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지금까지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자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꿈결에서 들었던 “들들들” 하는 재봉틀 소리가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포근하게 나를 감싸 안는다.
어머니는 나의 우상이요 부처이시다.
신능자 -----------------------------------------
≪수필과비평≫ 등단.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과비평 2013년 7월호, 세상마주보기] 봄날은 간다 - 이승숙 (0) | 2013.08.25 |
---|---|
[수필과비평 2013년 7월호, 세상마주보기] 세상에서 가장 멋진 춤 - 윤소천 (0) | 2013.08.25 |
[수필과비평 2013년 7월호, 세상마주보기] 공존의 의미 - 박숙자 (0) | 2013.08.24 |
[수필과비평 2013년 7월호, 세상마주보기] ‘가’ 자字 뒷자字도 모르면서 - 류영하 (0) | 2013.08.24 |
[수필과비평 2013년 7월호, 세상마주보기] 감자골 향기 - 라성자 (0) | 2013.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