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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7월호, 세상마주보기] ‘가’ 자字 뒷자字도 모르면서 - 류영하

신아미디어 2013. 8. 24. 00:14

"“그건 수필이 아니라, 그냥 에피소드네요.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간첩을 잡았다든지, 잡았는데 간첩이 아니라서 싹싹 빌었다든지, 결론이 있어야지.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비 오는 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닌 것이 무슨 수필거리가 됩니까? 흥, 수필에 관해서는 ‘가’ 자字 뒷자字도 모르면서…….” ‘가 자字 뒷자字도 모른다.’는 것은 한글 자모 가나다라…에서 ‘가’ 다음에 오는 글자가 ‘나’라는 것도 모르는 바보라는 뜻으로 평소에 남편이 나를 놀릴 때 쓰는 말이었다. 남편은 가끔 텔레비전을 보다가 중요한 현안문제에 대해서 나더러 아느냐고 묻곤 했다. 그렇게 묻는 남편의 저의를 알기 때문에 나는 설령 알더라도 모르는 척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 남편은 의기양양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은 알아야지, ‘가’자 뒷자도 모르면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래.” 하며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곤 했다."

 

 

 

 

 

 

 

 ‘가’ 자字 뒷자字도 모르면서     -  류영하


   일과를 끝내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켜보았지만 깜깜무소식이다. 나는 코드를 뺐다 꽂아보고, 연결선을 건드려 보았다. 며칠 전부터 화면이 깨져 나오더니 이제 완전히 꺼져버렸다. 침대에 누우면서 투덜거렸다.
   “아직 11시밖에 안 되었는데 뭐하지?”
   “뭘 하기는, 자면 되지.”
   남편은 등을 돌린 채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침대에 하릴없이 누워 있자니 심심했다. 심심하다 못해 막막하기조차 했다. 마치 막차를 놓쳐버린 낯선 정류장에 혼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결국 그 막막함을 견디지 못해 머리맡에 엎어놓았던 책을 집어 들었다. 모로 누운 남편도 어느 틈엔가 책을 읽고 있었다. 넘겨다 보니 아는 사람의 글이었다.
   “그 글 재미있지? 그거 우리 반에서 공부했던 작품인데.”
   남편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수필 쓰는 데 무슨 공부가 필요하냐? 그냥 쓰면 되지.”
   “아이고, 아저씨, 그냥 쓰면 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야기를 정확하게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퇴고를 해야 하는 것이 수필입니다. 당신은 글이라고는 단 두 줄도 못 쓸 걸.”
   “이 사람아, 나도 연설문도 만들고 기안도 다 해봤다. 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까짓 것 하나 못 쓸까.”
   “수필이 기안하고 연설문 쓰는 것하고 같은감. 문학성도 살려야지, 독자와 공감대도 형성하고 감동도 줄 수 있어야지.”
   남편이 갑자기 내 쪽으로 휙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나도 수필로 쓸 거 하나 있는데.”
   “당신이? 어디 한번 이야기해 봐요. 내가 글감이 되나 들어줄게.”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하숙을 했었잖아. 그때 같이 하숙하던 놈이 있었는데 그놈이 간첩한테 홀려가지고 이리저리 끌려 다닌 적이 있었거든, 그런 이야기 쓰면 좀 특이하겠지?”
   “우와, 진짜 간첩한테 포섭되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놈 집이 봉화 깊숙한 산골마을이었거든. 어느 날 집에 다녀오는데 버스 옆 좌석에 앉은 남자가 이런저런 말을 걸더라는 거야. 시골은 어지간하면 다 아는 얼굴이잖아. 근데 이 남자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는데 안동 시내에 도착하자 같이 영화를 보자고 하더래. 그래서 이놈이 줄레줄레 따라갔던 모양이야.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고 하숙집에 돌아와서는 그 이야기를 하는데, 친구들이 가만 들어보니 여간 수상한 것이 아니야. 그때가 유신정권이었잖아. 너도 나도 반공을 외치던 시절이라 우리 친구놈들은 그 사람이 틀림없이 간첩이라고 생각하고 경찰에 신고를 했지. 그리고는 직접 간첩을 잡겠다고 비는 억수로 쏟아지는데 극장 앞에서 진을 치고 서서…….”
   나는 조급증이 나서 남편의 말을 잘랐다.
   “그래서? 그 사람 잡았어? 진짜 간첩이었어요?”
   “몰라,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네. 근데 간첩은 아니었던 것 같아.”
   “나 참, 그게 뭐야? 끝이야? 그 사람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어.”
   허튼 이야기는 좀처럼 않는 남편에게서 근사한 글감 하나 건지나 했더니, 이렇게 시시한 이야기일 줄이야.
   “그건 수필거리도 안 된다. 그게 무슨…….”
   “왜 수필이 안 돼? 특이하잖아. 그 시절에는 간첩이 자주 출몰하여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긴장하고 살았다는, 뭐 그런 시대상을 이야기할 수 있잖아.”
   “그건 수필이 아니라, 그냥 에피소드네요.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간첩을 잡았다든지, 잡았는데 간첩이 아니라서 싹싹 빌었다든지, 결론이 있어야지.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비 오는 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닌 것이 무슨 수필거리가 됩니까? 흥, 수필에 관해서는 ‘가’ 자字 뒷자字도 모르면서…….” ‘가 자字 뒷자字도 모른다.’는 것은 한글 자모 가나다라…에서 ‘가’ 다음에 오는 글자가 ‘나’라는 것도 모르는 바보라는 뜻으로 평소에 남편이 나를 놀릴 때 쓰는 말이었다. 남편은 가끔 텔레비전을 보다가 중요한 현안문제에 대해서 나더러 아느냐고 묻곤 했다. 그렇게 묻는 남편의 저의를 알기 때문에 나는 설령 알더라도 모르는 척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 남편은 의기양양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은 알아야지, ‘가’자 뒷자도 모르면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래.” 하며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곤 했다.
   남편에게 “수필에 관해서는 ‘가’자의 뒷자도 모르면서.”라고 말하고 나니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내가 이렇게 잘난 척할 때도 다 있네. 혼자 쾌재를 부르고 있는데, 남편이 픽 돌아눕더니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폼을 보니 이 남자 삐졌다. 돌아누운 남편의 등이 태산같이 높아보였다. 돌려 눕혀서 이야기에 문학성이 있었다고, 아마 당신도 나만큼 수필 공부했으면 나보다 훨씬 나았을 거라고 해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수필에 관해서는 내가 자기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가슴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반듯이 누웠다. 내 입 안에서는 자꾸만 ‘가자 뒷자도 모르면서’라는 말이 맴돌았다.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파하. ‘가’자 뒤에 오는 글자는 ‘나’다. 수필을 쓴답시고 가장 많이 집중했던 글자가 또 ‘나’다. 나는 과연 ‘나’를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잠은 오지 않고, 생각이 생각을 몰아오고, 또 그 생각이 새끼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급작스런 어둠에 내가 눈을 감았나 싶어 부릅떠보았다. 밤 12시로 취침기능을 설정해 놓은 형광등이 소등되었던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문득 장난기가 동했다. 내 가슴을 남편의 등에 바짝 붙이며 물었다.
   “책 더 볼 거야? 다시 불 켜줄까?”
   “아니, 고만 자자.”
   남편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불자락에서 바스락 마른 바람이 일었다.

 

 

 

류영하  --------------------------------------------
   ≪에세이스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