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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문학 2013년 창간호, 테마에세이/처음] 처음처럼 - 안현진

신아미디어 2013. 7. 29. 09:57

"나는 해마다 삼월의 인연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다. 올해에는 어떤 아이들을 만나게 될 것인지 생각하며 흥분한다. 가끔 나를 지치고 힘들게 하는 아이를 만나 나의 인내력의 끝을 달려보게 하지만 그것도 교사로서 갖게 되는 수행의 일부라 여긴다. 아이들은 금방 정을 주고 쉽게 잊기 때문에 나 역시 아이들 짝사랑을 길게 하지 않는다. 출가시키는 자식처럼 내 품에서 바로 정리하려고 한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밝은 미소를 나누는 것으로 족하다. 가끔 안아주기도 한다. 그러다 먼 훗날 나를 좋은 기억으로 생각해 준다면 다행이며, 감사하게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가끔은 첫사랑의 진한 기억처럼 내가 오래 전에 졸업시킨 아이들이 심상으로 하나 둘 떠오르기도 한다. 아마도 그들은 내 마음속 한 자락에 머물고 있나보다. 하지만 요즘은 건망증이 심해지고 기억이 희미해져가는 물리적 현상 탓인지 아이들에게서 받는 강도가 점차 약해져간다."

 

 

 

 

 

 

 처음처럼   안현진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나의 첫 졸업생들이 운영하는 카페를 알게 되었다. ‘안현진 선생님에 대한 풋풋한 추억’이라는 제목의 글이 눈길을 끌었다. 이름도 가물가물한 30여년의 제자가 나에 대한 글을 올려준 것이 무척 고맙게 생각되었다.
   담임교사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번 미술 특별활동반 지도교사로 만났던 인연이다. ‘찰흙으로 만들기’ 시간, 그 제자는 열심히 잘 만든다고 칭찬을 받았나보다. 다 완성되기 전에 수업 끝나는 종이 울렸다. 마무리를 못해 아쉬워하던 참에 방과 후 늦더라도 다 완성해서 가져와도 좋다는 말을 듣고 어린 마음에 더 열심히 완성했던 모양이다. 미술작품을 들고 교실을 찾아 갔지만 이미 나는 보이지 않고 청소하는 애들만 있었단다. 그래서 교무실로 달려가 유리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니 교장선생님을 비롯해서 모든 선생님들이 모여서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 망설이다가 노크를 하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순간 모든 선생님들이 교무회의를 하다가 자신을 쳐다보았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 안현진 선생님이 이거 다 만들면 가져오라 해서요.” 라고 말했더니 조용하고 진지했던 교무실 분위기는 갑자기 웃음바다로 돌변하였고,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밖으로 나왔단다. ‘선생님을 곤란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잘못을 저지른 애처럼 고개 숙이고 있자, 내가 미소 띤 얼굴로 작품을 건네받으며 아주 잘 만들었다며 칭찬을 해 주고는 돌려보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 큰 사건도 아니라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30년 전의 이야기를 그가 지금까지 세세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 더 놀라웠다. 앨범 방에 올려진 제자들의 모습은 어느새 청년의 모습도 아닌 중장년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마지막 문장에서 “30년 전에 저를 칭찬해 주셨던 그 인자하신 모습 여전하시죠?” 라며 묻고 있다.
   제자로부터 30년 후에 받는 교원평가(?)라 감개가 무량했다. 요즘은 해마다 학부모와 학생들로부터 교원평가를 받는데, 상호간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교육의 효과를 지식의 전달로 본다면 시험성적을 분석하면 될 것이지만, 인성의 변화로 본다면 십 수 년이 지나야 비로소 알 수 있지 않을까.
   이십 대 초반의 첫 교사 시절, 사제 간이라도 불과 십년의 나이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그 시절 나는 모든 것을 아이들과 함께 행동하려고 했다. 아침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같이 뛰고 고무줄을 넘었으며, 줄넘기와 공놀이를 하였다. 야산에 올라가 풍경화 그림도 같이 그리고, 개울 물놀이도 같이 했다. 여러 명이 달려들어 나를 물에 빠뜨리며 깔깔거리는 통에 체육시간에는 수시로 옷이 젖어 늘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야 했다. 눈이 오면 눈싸움하면서 렌즈도 잃어버렸고, 넘어져 까지기도 했다. 밥도 같이 먹고, 오르간을 치며 노래도 같이 부르고, 수시로 게임도 많이 했다. 그 시절 나는 학교선생님이라는 것이 행복하였다. 한 주일이 끝나는 토요일이면 몇 명의 아이들과 고골 법화골로 넘어가는 남한산성 북문을 자주 올라가곤 했다. 때론 언니처럼, 때론 친구처럼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일 년을 마칠 때가 되면 아쉬워하며 선물도 준비하고, 문집도 만들곤 했다. 하지만 시행착오도 무척 많았다. 내 딴에는 열심히 하는데 아이들이 그것을 알아주지 않으면 속상해서 울고, 수업이 잘 안되거나 시험성적이 좋지 않아도 울고, 학교관리자가 나무라거나 싫은 소리를 해도 울고 이리저리 참 많이 울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미숙하지만 신나게 지냈던 시절, 가슴이 뛰는 시절이다.
   교사 생활 십년이 지나면서 점차 익숙하고 세련된 교사생활이 자리를 잡았다. 해마다 시간의 흐름은 반복되지만 항상 새로움이 동반된다. 3월이면 개학과 동시에 새로운 학교생활이 시작되고 교육과정 내용도 비슷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같은 교실이라도 앉아 있는 학급 아이들이 다르고, 동료들이 한둘씩 바뀌는 인적구조만큼 새로움이 배가되며 지루하지 않다. 그래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생활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학급구성원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각각의 이름이 다르고, 얼굴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아이들은 전혀 새로운 분위기를 뿜어낸다. 나 역시 그들의 아우라에 따라 때론 강하게, 때론 부드럽게 이끌곤 한다.
   나는 해마다 삼월의 인연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다. 올해에는 어떤 아이들을 만나게 될 것인지 생각하며 흥분한다. 가끔 나를 지치고 힘들게 하는 아이를 만나 나의 인내력의 끝을 달려보게 하지만 그것도 교사로서 갖게 되는 수행의 일부라 여긴다. 아이들은 금방 정을 주고 쉽게 잊기 때문에 나 역시 아이들 짝사랑을 길게 하지 않는다. 출가시키는 자식처럼 내 품에서 바로 정리하려고 한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밝은 미소를 나누는 것으로 족하다. 가끔 안아주기도 한다. 그러다 먼 훗날 나를 좋은 기억으로 생각해 준다면 다행이며, 감사하게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가끔은 첫사랑의 진한 기억처럼 내가 오래 전에 졸업시킨 아이들이 심상으로 하나 둘 떠오르기도 한다. 아마도 그들은 내 마음속 한 자락에 머물고 있나보다. 하지만 요즘은 건망증이 심해지고 기억이 희미해져가는 물리적 현상 탓인지 아이들에게서 받는 강도가 점차 약해져간다.
   3월을 준비하는 내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새 교육과정을 만들고 새 학년을 준비하는 2월에는 경건하게 마음을 가다듬는다. 올해 나와 새 인연을 맺게 되는 아이들에게 나로 인해 행복하게 웃는 일이 많기를 기도한다. 서로 좋은 관계가 되면 좋겠지만 혹여 서로 싫어하는 관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지혜를 구한다. 이는 전문성이나 지식으로 채워지지 않는 마음다루기의 문제이므로 상당히 조심스럽다. 
   삼월의 첫 날 가장 좋은 옷을 차려 입고 예쁘게 웃는 연습을 하며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한다. 올해도 나와 함께 인연을 만들어갈 아이들을 위해 처음처럼 가슴 설레며 이 의식을 치룰 준비를 한다.

 

 

안현진  --------------------------------------------

   서울 출생. 경인교육대학 졸업. 경원대교육대학원 졸업. 《수필과비평》 신인상(2013). 아침문학회 동인, 시집 《아침시》공저. 현 덕풍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