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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2년 8월호, 사색의창] 낯설게 하기 - 최병호

신아미디어 2012. 9. 10. 23:32

수필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은 수필에 애정이 깊어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겠지요. 최병호님의 수필과 사색에 빠져봅니다.

 

 

 

 

  낯설게 하기


   엄마가 아이에게 내내 젖을 먹이다가 우유꼭지를 물리게 되면 아이가
시원한 만복감에 술렁술렁한 표정을 짓거나 혀를 내미는 게 바로 ‘낯설
게 하기’가 아닌가 싶다. 어른들도 평소 낯익은 일이나 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거기 숨겨진 낯선 것들이 문득 나타나는 놀람을 겪곤
한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피상적인 것 같아 섬뜩해지기
도 한다. 낯설게 하기란 역시 그런 것이지 싶다.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잘나고 멋진 사람들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TV 앞에만 앉으면 저절로 튀어나오는 감탄사다. 스테이지에 나타난
방송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순백의 가지런한 치열의 미소까지 겸
비한 미녀미남들이다. 빠진 데 없이 반반한 얼굴에 티 하나 없다. 하늘에
서 내려온 신인新人 같기도 하고 ‘국민소득 2천 불에 인구 5천만’이란 선
진그룹에 끼게 된 어떤 축하의 프리미엄 같기도 하다.
   “나이는 좀 듬 직한데 저분이 누구요?” “당신 좋아하는 아무개 씨요.”
“응?! 내 시력이 엉망이 됐구먼. 팬 자리도 내놓아야 하겠군.” “우리나
고색이 창연하지 요즘 눈 달리고 코 달린 사람들은 다 저렇게 젊어졌어
요,” “우리도 한번 혁명을 성명해볼까….” “우린 봐줄 사람이 없지 않아
요.” “하하하, 그런가….”
   하긴 ‘낯설게 하기’란 말이 연극이론에서 나온 것이라 하니 우리 TV
출연자들이 성형외과의 문을 두들겨, 가는 세월을 붙들고 오는 주름을
막아내며 젊음을 되살리고 끝손질 미용실까지도 놓치지 않는 것은 당연
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그 자체가 하나의 낯설게 하기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 연극무대에서 보여준 낯설게 하기는 좀 특이하다.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3인칭으로
말을 건넨다. 혹은 대사 외에 지시문이나 설명이나 주석을 대사로 옮기
기도 한다. 관객이 놀라 어리둥절해하면서 배우나 극의 전개에 몰입하
는 대신 연극의 의도에 이상함을 느끼게 된다. 극중의 사건과 묘사 자체
에 부자연스러움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꺄우뚱한 시사로 읽힌다.
   TV드라마와 연극은 그 속성이 다르므로 낯설게 하기도 다를 수밖에 없
겠지만 우리 미인군단이야말로 모처럼 되찾은 그 젊음을 또 하나의 낯설
게 하기로 내면화하는 창의성을 발현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철학하는
사람들도 ‘새로운 개념을 제시할 때는 많은 경우 이 낯설게 하기 기법을
쓰고 있다.’니 더욱 숨겨진 그 참뜻을 찾는 데 정성을 다해야 할 일이다.
   문학의 경우, 장르마다 다른 면이 있지만 특히 수필강좌에선 이것을
필수요건처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제목 주제 낱말 문장 단락 구성
전체에 이르기까지 굳어진 생각, 따라다닌 수식 등을 저버리고 낯선 새
로움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충고다. 비교적 짧은 산문이기에 그 기법이
그만큼 긴요하다는 주장이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수필문학 소고’의,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니 ‘무형식이 그 형식’이니 하는 문절을 두고, 그것이 수필을
오도한 잘못으로 지적된 건 다 아는 바다. 어느 날인가 나는 아무러면
그게 교과서에까지 실린 글인데 글쓴이가 그런 걸 몰라서 그리 썼을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상체를 좌우로 가만
가만 흔들었다. 이윽고 눈이 번쩍 띄고 고개가 들렸다.
   서예가의 노력이 떠올려진 것이다. 서예가가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얼마나 심혼을 기울이는가! 먹부터 정성스레 간다. 붓에 먹물을 돌려
가며 넉넉하게 묻히고 기도하는 예심藝心으로 선화지 앞에 쪼그리고 앉
아 단번에 그야말로 ‘붓 가는 대로’ 휘호한다.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은
파지를 생산하고 있는가! 내 눈엔 아까운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수필가들은 수필이 자기중심의 이야기란 점에서 좀 쉽게 여기는 경향
이 없지 않다. 수필가들이 과연 서예가들의 파지 생산만큼이나 사전준
비를 철저히 하고 있을까? 펜 들기 전에 연관된 제재를 충분이 생각하고
관련서적은 물론 그 현장도 확인하고 사전辭典·事典 등에 정리된 개요도
메모하여 머릿속에 하나의 모델하우스를 짓게 된다면 수필도 서예가들
의 휘호같이 ‘붓 가는 대로의 글’이 나올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
이 들었다. 새삼스럽게 그 문절의 숨은 뜻이 깊고 두렵게 느껴졌다. ‘무
형식이 그 형식’이란 말도 수필쓰기에 그렇듯 정성을 쏟게 되면 저절로
담이 쳐지는데, 그것이 곧 그 형식이 아니냐는 풀이가 되었다.
   “실존實存은 본질本質에 앞선다.”라는 주장이 있다. 실존인 나의 나날
은 그러므로 내 본질을 만들어가는 삶이기도 하다. 어떤 삶이어야 하나?
방향을 바르게 잡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움직인다는 것은
붙박인 것이 아니어서 불안하다. 이 불안을 극복하고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실존의 아침은 그래서 늘 새 불안을 맞는 거나 다름없다. 어제
일도 되돌아보이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서두의 아기 얘기와 어른들의
경험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책임 있는 자의 새아침은 아니, 수필가로서의 새아침은 그래서 늘 ‘낯
설게 하기’ 같은 연속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최병호  -------------------------------------------------------------------------
≪수필공원≫ 등단.
수필집: ≪그러나, 그렇지만≫, ≪미완의 설치미술≫.

공저: ≪수필산책≫, ≪존재의 집≫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