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하 종국으로 치닫는 전 지구적 자연 파괴의 현실에 비추어 우리가 어떻게 무절제한 개발을 지양하고 자연을 보존하며 그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야 할지를 깊이 돌아보게 하는 전범적 사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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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드놀 호Radnor Lake의 추억 / 송광섭
‘테네시 월츠Tenness Wamtz’를 아시나요? 한국 전쟁의 포화가 멈추고 문화적 폐허에 밀어닥친 미국 팝송의 밀물 속에 가수 패티페이지 특유의 애상조의 음색과 창법으로 하여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그 노래는 아직도 많은 올드팬의 가슴 속에 그 여운이 남아있을 것이다.
무도장에서 ‘테네시 월츠’에 맞춰 춤을 추다 우연히 만난 친구에게 연인을 소개해 주었다가 그녀에게 연인을 빼앗기게 된 실연의 원망과 발등을 찍고 싶은 후회를 그 ‘테네시 월츠’에다 돌리는 애틋한 가사의 이 노래는 연속 30주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할 만큼 히트곡으로 널리 애창된 기록을 갖고 있으며, 그 노래의 고장 테네시의 주도州都 내쉬빌Nashville은 ‘뮤직시티'로 불리며 미국 '칸추리 뮤직의 메카‘임을 자임하고 있다.
이런 고장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딸네 부부가 학위를 마치고 이곳 밴더빌트 대학에 부임하면서부터였는데, 이번엔 여기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손자 손녀를 돌보고 학부모 노릇을 대신하며 한동안 다시 와 머물게 되었다.
애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서 어디 가볼 만한 곳을 찾던 중에 마침 눈에 띈 곳이 집에서 남쪽으로 차로 한 10여 분 거리에 있는 크기 10만 평의 래드놀 호와 이를 둘러싼 울울한 산림으로 이루어져 다양하고 풍부한 동식물상相이 잘 보존되고 있는 150만 평 규모의 자연보호 지역이다.
역사를 뒤져보면, 당초 철도회사가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이곳 오터 크릭Otter Creek이란 계류에 댐을 막아 이루어진 호수다. 그 후 이곳은 철도회사 직원과 그 손님들을 위한 사냥터로도 이용되어 오다가 나중에 이곳의 풍부한 조류자원 보호를 위한 테네시 조류학회의 요청으로 금렵구역으로 보호를 받게 된다.
그러던 중 시대가 바뀌어 증기기관차가 디젤 기관차로 대치되어 자리를 밀려나는 바람에 더 이상 기관차에 물 공급이 필요 없게 되자 이 땅이 건설 개발업자의 손에 팔려 넘어가게 된다. 땅을 사들인 사람들이 이 지역을 주택지로 개발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주민들이 이곳을 자연보호 구역으로 그대로 보존하기 위한 운동을 일으켰으며,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실현이 늦어지다가 결국 주민들이 모은 기금과 연방정부의 도움으로 드디어 이 땅을 되사들여 테네시 주 첫 자연보호 지역으로 지정받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은 시민의 힘으로 이룩한 시민의 휴식처일 뿐 아니라 어린 학생들의 자연학습장으로 잘 보존되어 이용되어 오고 있다.
3월 초순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는 나목의 숲이 아직 기지개를 펴고 있는 중이었고 호수에는 몇 쌍의 오리들과 호안의 부목 위에 한가히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거북들이 줄지어 엎드린 모양이 눈에 띄는 정도로 조용하기만 해서 그 평화와 정적을 즐겼다.
삼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기온이 섭씨 30도를 상회하며 목련을 비롯하여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신록이 피어나 남부의 빠른 봄을 만끽하게 되었다. 예쁜 새들의 노래로 아름다운 신록의 숲엔 다람쥐들과 다정한 한두 쌍의 사슴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고 호수와 숲으로 날아드는 새의 무리도 늘어갔으며 더러는 호수를 헤엄쳐 건너는 수달을 만나기도 하였다.
이곳의 하이킹 코스는 호변의 만곡을 끼고 구불구불 한 바퀴 도는 평평한 산책로와 남·북 양쪽의 산정을 오르는 두개의 가파른 등산로가 호변에서 분기하여 고리를 이루고 있어서, 그날의 기분이나 몸 상태에 맞추어 대개는 한 시간쯤 걸리는 코스를 취하지만 욕심을 내어 남·북의 등산로를 다 오르내리며 호수를 일주하면 두시간 남짓 걸리는 뻐근한 산행길이 되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나서 우리 부부는 거의 매일 이곳을 찾으며 하루하루 달라지는 호수에 비치는 산영山影과 새로 만나는 새와 꽃과 동물 가족의 무리와 그 변화를 살피는 것은 처음 맛보는 신선하고 신비한 경험이었다.
오월이 깊어지면서 호수에는 갓 부화된 앙증맞은 어린 새끼들이 일렬로 어미 뒤를 따라 행진하는 오리 가족들이 눈에 띄고, 산에는 솜털이 송송한 녹용을 이고 있는 수사슴과 배가 동산만큼 불러 곧 해산을 맞을 암사슴을 만나기도 하고, 더러는 쉬고 있는 벤치 옆 나뭇가지에 홰를 치고 있는 올빼미와 매를 만나서 이 희귀한 맹금류를 가까이서 한참씩 관찰하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곳 동물들은 사람과 서로 익숙해져 경계하거나 도망치는 일이 없어서 사람과 이웃으로 공생하고 있는 땅이다. 원래 태초부터 자연은 이런 것이었을 터인데 인간이 주인 행세를 하며 그들을 사냥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부터 자연 파괴의 비극은 시작된 것이다.
아름다운 노래 소리만 들릴 뿐 숲에 가려 좀처럼 모습을 보기 힘든 새들을 찾아보려고 쌍안경이나 망원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메고 조류도감까지 들고 나타나는 버드와쳐들을 만날 때마다 새나 초목의 이름 하나 똑똑히 모르는 너무도 무지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자연을 멀찍이 떼어 두고 음미하는 우리네 유유자적 감상법과 그네들의 자연을 현미경적으로 분석하고 관찰하는 접근법의 차이를 대비해 보면서, 우리가 ‘원경의 추상적 감상자’라면 이들은 ‘근경의 미시적 관찰자’라는 분명한 동서의 자연을 대하는 심법心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5월 말에 학년도가 끝나 방학에 들어가자 애들을 데리고 귀국을 하게 되었는데, 석 달 남짓 걸으며 오르내리며 정들었던 래드놀 호를 뒤에 두고 떠나는 게 몹시 허전하고 아쉬웠다.
세월이 많이 흘러 그때 7학년이던 손자 녀석이 대학 2년을 마친 후 휴학하고 들어와 20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간 지금도 가끔 래드놀 호 산수와 누렸던 아련한 추억을 반추하곤 하거니와, 대도시 가까이 한 점 오아시스 같은 자연보호지역을 지키고 가꾸어낸 그곳 주민들의 자연보존의 예지와 노력에 존경과 부러움의 정을 금할 수가 없다.
현하 종국으로 치닫는 전 지구적 자연 파괴의 현실에 비추어 우리가 어떻게 무절제한 개발을 지양하고 자연을 보존하며 그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야 할지를 깊이 돌아보게 하는 전범적 사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송광섭 님은 2014년 《좋은수필》등단, 저 서:《凡夫逸志. 續凡夫逸志》, 역서(공역); 미래에서 온 편지(Peak Everything- Richard Hei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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