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의 저 깊은 곳에서 영롱한 별빛이 반짝이고 있다. 별빛은 집으로 향하는 우리의 차 위에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고집 센 아내의 손을 살짝 잡아본다. 오늘따라 아내의 손은 유별나게 따뜻하게 느껴진다."
애조로 - 이철수
햇살이 눈부시다. 차량 정면으로 돌진해오는 햇살의 강렬함에 그만 눈살을 찌푸리고 만다. 그에게 눈을 부릅뜨고 대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실눈을 뜨고 고개 숙인 채 천천히 나아가는 방법밖에 도리가 없다. 태양은 지구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세상일 간섭하느라 지칠 법도 하건만 그 도도함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온종일 돌아다니느라 허기졌는지 거만하게 쏘아붙이던 빛을 거둬들인다. 붉은 불덩이를 냉큼 삼키고는 되새김질하고 있다. 겸손해진 태양의 얼굴이 고요하다. 고요 속에 태양의 숨소리가 붉게 탄다. 어둠이 내려오는 서쪽도로 끝 구름 사이로 붉은 기운이 잠들어 간다. 일과를 마무리하고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향해 애조로를 타고 있다. 애조로는 제주의 애월과 조천 사이를 잇는 간선도로이다.
애조로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시간과 날씨에 따라 변화무쌍하다. 고향에 가기 위해 자주 애용하는 도로 위에서 우리의 대화 내용도 잡다하다. 아내의 반복되는 감탄사는 어김없이 터져 나온다. “저 하늘 봐봐!” 아내가 가리키는 허공에는 높고도 깊은 청자 한 점이 전시되어 있다. 청자의 아름다움에 빨려들 것만 같은 착각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하늘이 주는 예술에 감동하고 오랜 시간 머물러 있으면 좋으련만, 감동의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하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사건과 화제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고 만다. 복잡하게 얽힌 세상사는 새털구름처럼 가벼운 마음을 어지럽힌다. 구름의 평화로움은 제트기가 지나간 칼날 같은 직선에 찔려서 그만 산산조각이 난다.
우리는 열정과 사랑으로 충만하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이씨 남편과 깐깐한 고씨 아내의 기 싸움은 언제나 애송이 수준이다. 감정의 바퀴가 돌부리에 걸려 덜커덩거린다. 운수 사나운 날은 진흙탕에 빠져 몰골이 말이 아니다. 흙먼지 뒤집어쓴 감정으로 부모님에게 인사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감정을 추스르고 먼지 묻은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고 웃는 낯으로 단장을 하려면 본의 아니게 도로 위를 하릴없이 맴돈다.
밥벌이 되지 않는 논쟁으로 너덜너덜해진 나는 공명통에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데 긴 여운이 필요하다. 마음속으로는 고개 끄덕이고 인정하면서도 괜히 투정을 부리곤 한다. 남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적 본성은 어디서나 존재하나 보다. 걸핏하면 고집과 독선이 살아나와 상대방을 굴복시키려고 안달이다. 이긴 자도 패자도 없이 상처만 남는 절제되지 않은 언어의 배설에 부끄러워 고개 숙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고와 경직된 행동을 일깨워주는 고씨 고집이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의식을 깨어있게 해주는 논쟁이 전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논쟁은 쓸데없는 행위로 치부할 수 있으나 호흡에 필요한 공기처럼 소중한 스승일지도 모른다.
부모님과 수다를 떨다 고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라 그런지 오가는 차량과 인적이 뜸하다. 어두컴컴한 밤, 교차로 인근에서 여학생이 혼자 걸어가고 있다. 체육복을 입고 있어서 학생인 것은 알겠는데 이 늦은 시각에 혼자 걸어가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아내의 성격상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리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차를 세우라고 재촉한다. 아내의 말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진다. 그렇지만 나는 아내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에게도 이유는 있다. 요즘 시대에 휴대전화가 있어 지인에게 연락이 가능할 것이고, 잘 가고 있는 사람을 괜히 귀찮게 할 필요가 없다고 우겼다. 지나친 관심은 괜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핀잔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지랖 넓은 것도 병이라고 빈정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물러설 아내가 아니다. 자식을 키우는 처지에서 이런 상황을 모른 채 지나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야심한 시각에 저리 홀로 버려두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으니 반드시 상황을 확인해야 한다고 고집한다.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쳐 갔으나 왠지 찜찜하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학생의 발걸음에 불안과 위기가 서려있다. 왠지 처량함도 느껴진다. 결국 자동차를 돌리고 만다.
차에 탄 학생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쁨에 안도하고 있다. 우리 딸처럼 고등학교 3학년이다. 학교 공부를 마치고 버스를 탔는데 그만 깜박 졸고 말았다고 한다. 목적지인 외도를 지나쳐 버스 종착역인 수산에서 내렸다는 것이다. 휴대전화 배터리도 떨어져 부모님에게 전화할 형편도 아니었고 차비 할 돈마저 수중에 없었다고 한다. 지나쳐버린 길을 거꾸로 무작정 걸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힘들게 걸어왔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해 지기 전부터 시작하여 저녁도 먹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길 잃은 채로 걸어온 것이다. 얼마나 무섭고 막막했을지 생각만 해도 진땀이 난다.
아, 아내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는 애조로를 공포의 장소로 영원히 기억할지 모를 일이다. 내 딸 같은 아이를 지옥 같은 불안과 고통의 공간에 내버려 둘 뻔했다. 안이하고 이기적인 심보로 아이를 세상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무서움에 떨게 내버려 두었을 생각을 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아이를 목적지에 내려주고 오는 길이 한결 가볍다. 아내의 의기양양함에 약간은 주눅이 들었지만 그래도 괜찮다. 살면서 격하게 요동치며 부딪히고 진흙탕에 빠지기도 했지만 우리는 늘 그렇게 함께 고민하고 아파했다.
밤하늘의 저 깊은 곳에서 영롱한 별빛이 반짝이고 있다. 별빛은 집으로 향하는 우리의 차 위에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고집 센 아내의 손을 살짝 잡아본다. 오늘따라 아내의 손은 유별나게 따뜻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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