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속에 갇혀 있던 동생을 훨훨 세상을 향해 날려 보낸다. 높고 넓은 하늘에서 동생은 영혼 결혼한 남편과 아들딸 사이에서 하얀 얼굴로 웃고 있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빈 서랍을 닫는다."
'
오래된 서랍 / 서순옥
“언니! 숙이가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언니는 알고 있었어요?”
“뭐라고? 숙이가 그런 말을 했어?”
깨복쟁이 친구 동생 말을 듣고 당황했다. 목으로 넘어가던 커피가 ‘아이를 낳고 싶다.’는 말에 걸려 재채기까지 나오고 말았다. 잔 속에 고여 있는 커피가 내 마음 같이 파르르 떤다. 숙이의 유일한 동네 친구여서 그 말을 못 믿겠다고 부인할 수 없었다, 혈육인 언니한테 속내를 보이지 않았던 동생을 생각하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다. 정말 그랬을까. 수십 년 동안 가두어 두고 들여다보지 않았던 오래된 서랍을 조심히 열었다.
숙이는 일곱 형제 중 첫째인 나하고 여섯 살 터울, 셋째다. 어릴 때부터 마루 끝에 앉아 열려 있는 대문만 바라보고 지내는 아이였다. 숨이 차서 파랗게 질려 있는 숙이를 업고 엄마는 수시로 병원을 들락거렸다. 학교도 엄마 등에 업혀 다녔다. 가끔 우리가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 몇 미터도 못가 여러 번 쪼그리고 앉았다 쉬기를 반복했다. 결국 초등학교 삼학년까지 다니다 학교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숙이가 늘 방안에 누워 지내는 동생이나 누나로 여기고 학교 다니느라 바쁘기만 했다. 얼굴이나 손발이 진한 가지색으로 물드는 것이 어린 숙이의 모습이었다.
숙이는 가까운 외가에서 요양하듯 지내고 있어 집에서 보는 날이 드물었다. 사계절 내내 숙이한테는 쉬운 계절이 없었다. 언 땅을 뚫고 새싹이 움틀 때, 동생은 나른한 봄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방에 누워 숨을 골라야 했다. 여름은 건강한 사람도 헉헉거리는데 가쁜 숨을 몰아쉬며 뙤약볕에 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럴 때마다 지갑에 든 돈이 그나마 유일한 낙이었다. 엄마나 외할머니는 숙이를 기죽지 않게 달래주느라 궁핍한 중에도 용돈만큼은 넉넉하게 꼬불쳐 주었다. 숙이는 그 돈으로 동생들에게 후하게 아이스케이크를 사주고 같이 먹으며 놀았다. 가을에서 겨울이 오는 길목이면 입술은 더 파래지고 오만가지 약단지를 달고 살았다. 숙이는 시루속에 갇혀 검은 보자기를 걷고 나오면 파랗게 변하는 콩나물이었다.
숙이는 혼자서 영어도 깨우치고, 외할머니 어깨너머로 음식도 배우는, 손끝이 야무진 처녀였다. 일본에서 나온 뜨개질 책까지 보면서 곧잘 옷을 만들어냈다.
숙이가 열여덟 살 되던 해였을까. 나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정신이 없었다. 남자의 어머니한테 잘 보이려고 동생의 힘을 빌렸다. 숙이는 내 남자 어머니 옷을 짜 주어 선물로 드리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하면 몇 번씩 숨을 고르면서 한 올 한 올 모양을 만들었을 텐데 참 염치없는 짓이었다. 숙이는 아슬아슬하게 벼랑 끝을 밟으며 나이를 먹어갔다.
나는 그 남자와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낳은 후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 숙이는 스무 살이었다. 조카의 돌날 숙이는 오지도 못하고 엄마 편에 앙증스럽게 코바늘로 짠 분홍스웨터 한 벌을 예쁘게 포장해 보내 왔다.
그렇게 또 한해가 가고 동생을 괴롭히는 어느 봄날 아침이었다.
“놀래지 말거라. 숙이가 엊그제 가브렀다.”
“엄마, 무슨 소리야!”
“그날 곱게 차려 입고 교회 간다고 나갔어야. 택시 타고 교회 입구에서 내리다 쓰러졌다고 연락이 와서 달려갔더니만……, 어른들과 의논 끝에 화장했다. 마침 그곳에서 총각을 만나 영혼결혼식까지 혀서 절에 맡겼어. 보고 자프면 금방 달려갈 거리에 있다. 그라고 너무 서운타 생각 말그라. 헐만큼 했잖냐. 숙이가 태어나서 얼마 안 되았을 것이다. 애기가 자지라지게 울면서 파래져 병원에 갔더니 선천성심장병이라고 하드라. 듣도 보도 못한 병으로 수술하지 않으면 얼마 못 산다는 의사의 사형선고를 듣고 넋이 나갔제. 니그 외할머니랑 강보에 싸매고 돌아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부터 숙이를 살리려고 별것을 다 해멕이고 애간장 녹으며 품고 살았다. 인자 편하고 좋은 곳으로 좋은 사람 만나서 갔어야.”
“엄마, 왜 이제 연락한 거야. 숙이 본 지도 오래됐는데! 다정하게 말도 못 나누었는데 어떻게 해 엄마!”
당신 뱃속에서 나온 자식을 잃고 내색 없이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엄마 가슴은 얼마나 찢어질까 싶었다. 한참을 울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동안 동생에게 무심했던 것이 미안해 숨고만 싶었다. 그때는 미국이나 가야 수술할 수 있었다. 협회에 가입을 하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래도 스무 해를 살고 간 동생은 기적이었다.
“언니, 숙이가 아이를 낳으면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랬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아기를 기르자면 엄마가 건강해야 되니까. 하늘이 건강도 주실거라고…….”
사십여 년이 지난 오늘, 숙이 친구한테 뜬금없는 소리를 듣고 나는 자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결혼도 안한 처녀가 아이 하나만 낳고 싶다고 친구한테 털어 놓았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나는 그때 어디에 있었을까. 한 번도 같이 아파해주었던 기억이 보이지 않는다. 편하게 숨 한번 쉬고 싶은 동생의 절박한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살고 싶어서 바닥을 치고 일어날 때마다 얼마나 혼자서 외롭고 쓸쓸했을까.
오래된 서랍 속에 갇혀 있던 동생 사진을 꺼냈다. 두툼하게 생긴 파란 입술, 예쁘게 화장했지만 얼굴은 여전히 가지색으로 보인다. 열 손가락 끝이 뭉툭한 파란 손가락이 내 팔을 잡고 서 있다. 내 결혼식에 마지막으로 동생이 웃고 있는 빛바랜 사진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태어났다면 수술 받고 원하는 삶을 맘껏 살 수 있었을 텐데,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슴 아프다.
서랍 속에 갇혀 있던 동생을 훨훨 세상을 향해 날려 보낸다. 높고 넓은 하늘에서 동생은 영혼 결혼한 남편과 아들딸 사이에서 하얀 얼굴로 웃고 있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빈 서랍을 닫는다.
서순옥 님은 《수필과비평》 등단. 《창작에세이》 등단. 수필집: 《와 과》
'월간 좋은수필 > 좋은수필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10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벽 - 이종화李鍾和 (0) | 2019.04.04 |
---|---|
『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10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노송老松 - 송보영 (0) | 2019.04.04 |
『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10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나에게 여행은, 나에게도 여행이랄 만한 것이 있었던가? - 南基樹 (0) | 2019.04.03 |
『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10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비상구 - 김마리아 (0) | 2019.04.02 |
『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10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청빈낙도 - 구양근 (0) | 2019.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