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를 위해서 인간에게 애걸하는 길고양이를 위해서 우린 나머지 김밥을 모두 그 자리에 두고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은 왠지 가벼웠다."
길고양이 - 노춘희
인왕산에 갔다. 모처럼의 산행이 즐거웠다. 비 온 뒤의 하늘은 맑고 높다. ‘봄볕에는 며느리를 내보내고, 가을볕은 딸을 내보낸다.’고 하는 말이 있다. 지금은 가을볕이라 우린 모두 딸들의 볕이다. 단풍이 지기 전에 가을을 즐기려는 행락객의 등산복이 형형색색으로 온 산을 수놓았다.
아까부터 하얗고 까만 털을 가진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가 마치 우리 등산객들 길 안내를 하는 듯이 저만치 앞질러 간다.
어젯밤 가을을 재촉하는 비를 맞고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단풍잎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반짝이며 한껏 멋스러움을 뽐낸다. 서울 근교에서 야트막한 산이지만 제법 가파르다. 산 정상에서 맞는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주어 시원하다.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니 서울에 사람이 참 많이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렇게 많은 집과 아파트가 있지만 내 집이 없어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도 많다. 그렇지만 산꼭대기에서 보는 많은 집들은 올망졸망하게 처마를 맞대고 오순도순 정답게 보인다.
햇살이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지니 허기가 진다. 따뜻한 양지를 골라 앉아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저만치서 까만 두 눈동자가 애원하듯 쳐다본다. 아까 그 길고양이다. 계속해서 우리를 길안내하며 따라왔나 보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진 않지만 어쩐지 말을 걸어 보고 싶었다.
“나비야 배고프니? 이리 와서 이거 먹어라.” 하고 김밥 속에 든 햄을 꺼내주었더니 엉거주춤 낮은 자세로 경계를 하며 얼른 물고 어디론가 쏜살같이 뛰어갔다. 조금 있다 다시 왔다. 이번에는 김밥 한 조각을 주었더니 또 얼른 물고 갔다.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혹시, 새끼가 있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고양이가 간 곳으로 살금살금 따라가 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귀여운 새끼 고양이 세 마리에게 입에 물고 간 김밥을 먹이면서 연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아하! 고양이의 모성애! 그래서 그 눈빛이 그리도 애절하게 보였던 것일까?
수년 전 독거노인으로 살던 언니가 돌아가신 뒤 언니의 집을 찾아갔을 때, 언니가 길고양이를 자식처럼 친구처럼 의지하고 기르던 생각이 났다. 언니는 당신 먹을거리보다 고양이 먹을 양식을 먼저 챙겼다. 어쩌면 멀리 살고 있는 동생들보다 고양이가 외로움을 달래주는 더 가까운 친구였는지도 모른다. 그 후 고양이가 집에서 새끼를 보듬고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그 고양이도 새끼를 해칠까봐 ‘야옹 야옹’ 하며 목덜미의 털을 곧추세우고 경계를 하며 새끼를 보호하고 있었다. 새끼들은 엄마 품에서 고개만 내밀고 두려운 듯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고양이를 보면서 옛날 어머니의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이 땅을 초토화시켰다. 가뭄과 흉년이 거듭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넘기 힘들다는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서 어머니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냉수로 허기를 채우셨다. 봄나물과 쑥을 캐서 좁쌀과 섞어서 죽을 끓여서 우리에게만 먹으라고 하고는 몰래 눈물을 훔치셨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 아마도 쌀밥을 배부르게 먹이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함에 화가 나서 슬프기까지 하지 않았을까. 나는 너무 어렸고 언니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들판에 파랗게 자라는 보리가 누렇게 익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일각이 여삼추였을 것이다. 아마도 보리가 빨리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 서산으로 넘어가는 기나긴 햇볕을 장대에 걸어서 밤새 보리밭에 쬐고 싶었을 것이다. 어린 자식들에게는 한 알갱이의 밥알이라도 더 넣어 주려는 애절한 마음이 지금 저 고양이와 같지 않았을까? 그래도 그 많은 자식들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사랑으로 품어 안아 키웠다. 비록 흰 쌀밥에 고기반찬으로 배부르게 먹이지 못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끼니를 때울망정 서로 사랑하고 나누는 방법을 몸소 가르쳐 주었다.
자식을 위한 조건 없는 거룩한 어머니의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고양이의 모성애도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요즈음은 왜 그렇게 부모가 자식을 지켜주지 못할까? 하루가 멀다고 신문을 장식하는 기사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IMF 때 갑자기 길거리를 방황하는 가장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아니 가지 않았다. 지하철 역사 등에서 밤을 밝히는 마음이 얼마나 힘들까마는. 복지관이나 교회서 나눠주는 무료급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잘나가던 과거는 잊고 현실을 직시하면 일손이 부족한 곳, 농촌 등을 찾아서 자원봉사라도 한다면 떳떳하게 끼니는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생활이 어렵다고 자식들을 팽개치고 가출하는 사람, 아이들과 동반 자살하는 부모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죽을힘을 다한다면 어떻게든 살아지지 않았을까. 한낱 짐승인 길고양이만도 못한 짧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새끼를 위해서 인간에게 애걸하는 길고양이를 위해서 우린 나머지 김밥을 모두 그 자리에 두고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은 왠지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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