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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9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내 마음의 논밭 길 - 석인호

신아미디어 2019. 3. 19. 09:07

"얼핏 보면 딱딱하고 차가운 시멘트로 덮인 도시의 좁은 골목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회색빛 골목에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초록빛이 넘치고 있다. 작고 띄엄띄엄 흩어져 있지만 그들 하나하나는 훌륭한 논밭이며 과수원이고 초원이다. 나는 그 초록빛 논밭과 초원이 좋아 오늘도 이른 아침에 그 골목을 걸었다. 이 골목이야말로 내 마음의 들판길이다. 이 골목길 들판에도 한낮엔 결실을 재촉하는 가마솥더위가 덮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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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의 논밭 길           /    석인호

 

   나는 매일 아침 들판 길을 걸어 공원으로 아침운동을 하러 간다. 밭에선 고추도 자라고 강낭콩도 자란다. 조금 더 가면 상추밭과 토란 밭도 나온다. 그리고 감나무와 무화과나무 한 그루도 열매를 듬뿍 달고 하늘을 향해 푸른 잎들을 활짝 펼치고 있다. 상추밭에선 할머니가 이슬이 맺힌 상추 잎을 따고 있다. 아마도 아침 식사 때 드시려나 보다. 푸르고 싱싱하게 자라는 채소들을 보니 발걸음이 저절로 떼어진다.
   나는 서울 신길동에 산다. 가까운 곳에 보라매공원이 있다. 비록 서울의 외곽이긴 하나 보라매공원 부근이나 신길동은 고층건물들과 아파트가 즐비한 도회지다. 그런 곳에 채소들이 자라는 논밭이 어디 있느냐고 의아해 하겠지만 분명히 있다. 토란잎에선 흰 구슬 같은 아침 이슬이 구르고 상추 잎은 아침이슬을 머금어 생기가 넘친다. 내 허리 높이만큼 자란 고추나무엔 풋고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강낭콩은 벌써 칼 모양의 새파란 깍지 속에서 통통하게 익어가고 있다.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과 차들도 있지만 그 들판의 논밭 두렁길은 조용해서 좋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채소나 과일나무들을 보면 순식간에 고향 생각에 젖어든다. 여름이면 고향 들판엔 온갖 종류의 곡식이나 채소가 풍성하게 자란다. 하루가 무섭게 자라는 그 작물들을 보며 내 어린 날의 꿈도 함께 무르익어 갔다. 고향에 살던 시절 나는 삼복 불볕더위 속에서도 고구마나 콩밭의 김을 맸다. 장마철에는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논으로 나가 물꼬를 낮추었다. 내일의 풍성한 결실이 예정돼 있었기에 온몸이 땀에 젖든 비에 젖든 개의치 않았다.
   현재 살고 있는 동네는 고층아파트도 많지만 2-3층짜리 다세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이 아직도 많다. 아파트에서 사는 나는 다세대 주택들이 있는 골목길을 지나서 보라매공원까지 운동하러 간다. 오래전 공군사관학교가 있었던 곳에 조성된 공원이다. 그곳은 넓고 각종 나무들이 울창한 데다 운동시설들도 잘 갖춰져 있다. 거기까지 가려면 10분도 넘게 걸리지만 매일 아침 그 공원에 간다. 골목길을 지나 갈 때 반갑게 맞아주는 푸른 친구들이 나를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만나는 집 앞에는 좀체 보기 힘든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잔뜩 달고 나를 반겨준다. 꽃을 피우지 않은 채 열매를 맺는 재주를 가진 나무다. 이 나무는 추위에 약해 남해안의 일부 지역에서만 자랄 수 있었는데 지구온난화 덕에 요즘은 서울에서도 자라는 것 같다. 거기를 지나면 고추와 강낭콩을 함께 심은 작은 밭을 만난다. 마당이 거의 없는 2층 집의 담 밖에 길을 따라 좁고 길게 만든 화단처럼 생긴 곳이다. 그 옆집이 바로 가끔씩 할머니가 나와서 잎을 따가던 상추밭이다. 그런데 이 상추밭은 공중에 떠 있다. 단독주택 대문 위의 직사각형 시멘트 공간에 흙을 부어 만든 것이다.
   그런가하면 토란 밭은 상추밭에서 몇 집 건너 있다. 야트막한 담장 안에 받침대를 세워놓고 그 위에 토란을 심은 화분들을 올려놓았다. 크게 자란 토란 줄기에 달린 푸른 잎들이 담장 위로 올라와 골목길 행인들을 즐겁게 해준다. 싱싱한 연잎을 닮은 타원형의 잎들이 정말 싱그럽다. 가랑비가 내리는 날엔 토란잎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구르는 모습이 더욱 예쁠 것 같다.
   토란 밭을 지나면 감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 나무엔 밤톨 만하게 자란 감들이 많이 달렸다. 나무 높이는 내 키의 두 배 정도밖에 안되지만 가지의 절반 가량이 담장을 넘어 밖으로 나와 있다. 앞으로 한 달쯤만 지나면 푸른 감들은 가운데부터 노랗게 변하며 익어갈 것이다. 시골 고향집에도 감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 여름방학이 끝날 때쯤엔 빨리 익은 감들을 따먹었다. 세 살 아래인 여동생은 나무에 올라간 나를 쳐다보며 자기 것도 따 달라고 소리치곤 했었다.
   곡식과 채소가 자라는 넓은 땅이라야 밭이고 논일까? 도회지 골목의 작은 화분이나 야트막한 담장 아래에 마련된 화단도 내 마음엔 훌륭한 밭이고 논이다. 좁은 공간일망정 채소가 자라고 과일나무가 자라고 있다면 그 옆길은 밭길이고 논길이리라. 그리고 그 길들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 곧 들판이 될 것이다. 도회지 골목에 있는 그 채소와 과일나무들도 농촌 들판의 것들처럼 보살펴 주어야만 자란다. 들판에서처럼 넓은 논밭을 갈고 씨 뿌려 가꾸는 재미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화분에 두세 포기의 고추나 상추, 강낭콩을 심고 가꾸면 그것이 바로 멋진 농사가 아니겠는가?
   얼핏 보면 딱딱하고 차가운 시멘트로 덮인 도시의 좁은 골목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회색빛 골목에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초록빛이 넘치고 있다. 작고 띄엄띄엄 흩어져 있지만 그들 하나하나는 훌륭한 논밭이며 과수원이고 초원이다. 나는 그 초록빛 논밭과 초원이 좋아 오늘도 이른 아침에 그 골목을 걸었다. 이 골목이야말로 내 마음의 들판길이다. 이 골목길 들판에도 한낮엔 결실을 재촉하는 가마솥더위가 덮치겠지?



석인호 님은 수필가. 《좋은수필》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