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는 아직 포기가 덜 앉은 배추 몇 포기가 다가오는 겨울바람을 맞고 있다. 이것만이 오로지 우리 몫이다. 아내는 이것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지난번 고구마도 그랬어. 알이 굵고 미끈한 것은 남에게 가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새끼손가락처럼 가늘거나 장구처럼 잘록하고 못생긴 것뿐이었어. 농사지어 좋은 것 먹자는 의도 아니었어? 기분이 야릇해.”"
배추 농사 - 신원철
배추 모를 네 번째 사러 갔을 때 아내를 데리고 가지 말았어야 했다. 종묘상 아주머니가 아내에게 “배추 모를 왜 그리 많이 사가요? 집에서 먹을 만큼만 심지….”라고 말하면서 내 등 뒤에 대고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올가을 두고두고 아내가 중중거릴 줄은 몰랐다. 내가 128구 모종판을 이미 세 번 사간 것을 기억하고 네 판째 사는 것을 보고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 산 모종 한 판도 많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인지 알지는 못한다. 배추 모종을 사러 아침마다 네 번이나 와서 한 판씩을 샀으니 그녀가 나를 기억할 만도 해 전자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등에 대고 그녀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고 아내가 말했을 때 그 의미가 궁금했다. 아내가 아주머니의 진심을 알 수 없으니 야릇한 미소임이 틀림없다. 한편 그녀가 한 말을 생각하면 “초보 농사꾼 같은데 너무 욕심내는 거 아냐. 고생만 할 게 뻔해.” 아니면 “올해 배추 모종 사가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김장철 배추 가격이 폭락할지도 모르는데 많이 사가네.” 등등의 의미를 담은 미소가 아니었을까?
배추를 굳이 많이 심을 생각은 없었다. 집에서 키운 배추치고 속이 꽉 찬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릴 적 우리 집 김치는 항상 속이 덜 찬 배추로 담갔다. 그리고 김치 맛도 별로였는데 난 그 원인을 속이 덜 찬 배추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만약 내가 심은 배추가 제대로 결구가 안 된다면 파는 것은 고사하고 남한테 인심을 쓸 수도 없으리라는 우려에서였다.
유월에 심은 들깨가 일부는 가뭄과 잡초 때문에 말라 죽고, 또 일부는 폭우에 잠겨 시름시름 죽었다. 적은 비에도 물이 차는 아래 다랑이밭이나, 짧은 가뭄에도 먼지 날리는 맨 위 다랑이밭에서는 들깨가 잘 자라지 않았다. 8월 중순이 되자 싹수가 노래진 들깨 밭을 보면서 배추와 무라도 심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기를 빌려다 갈아엎고 비료와 토양살충제를 뿌려 두둑을 만들고 보니 500포기를 심게 된 것이다. 난 그때 강원도 태백의 “바람의 언덕‘에서 수백만 포기가 자라는 배추밭이 떠올랐고, 이 정도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배추 모종을 심고 며칠이 지난 후 밤새 비가 내렸다. 자면서도 빗소리를 들었으니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비치고는 많이 온 듯했다. 갓 심은 배추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침에 비가 그치자마자 배추밭에 나갔다.
작은 잎사귀의 앞뒤 면마다 빗방울에 튀어 흙이 붙어 있었다. 그냥 내버려 두면 햇빛에 달구어진 흙 입자들로 인해 잎이 무르거나 주접들기에 십상이었다. 아내와 나는 분무기로 조심조심 잎의 앞면과 뒷면을 닦아주었다. 처음부터 만만치 않은 일을 만난 것이다. 아내는 이 일을 하면서 “알 것 같아. 그 아줌마의 야릇한 미소를…. 배추 스무 포기만 있으면 김장하는데. 배추 키우는데 샤워도 시켜야 해?”라고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앞으로 이 말이 후렴구처럼 흘러나올 것을 예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마다 차를 몰고 나올 때면 “기름 값이나 나올까? 야릇한 미소의 의미를 알 것 같아.”라고 했고, 배추 옆에서 따라 자라는 잡초를 뽑으면서도 “우리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을 것 같지 않아. 야릇한 미소의 의미를 알 것 같아.”라고 했다.
배추에 달려드는 해충들은 생각보다 많았고 그것들이 남긴 피해는 컸다. 모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배춧잎들이 무참히 잘린 것을 보고 범인犯人이 아닌 범충犯蟲을 찾아야 했고, 배춧속에 들어가 생장점을 박살 낸 현행범도 사건의 현장에서 검거해 압사시켜야 했다. 그리고 결구가 시작되자마자 송송 뚫린 배춧잎에서 파밤나방, 배추벼룩잎벌레, 무당벌레, 메뚜기까지 잡아야 했다. 그런데 이것이 가을 내내 만만찮은 일이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야릇한 미소의 의미가 이런 거였어. 이러다가 배춧속에 벌레 똥만 가득 찬 농사를 짓는다는 거….”라고 말했다.
11월 중순에 들어서자 생각보다 배춧속이 실하게 찼다. 이것을 처분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요즘은 대부분 가정에서 김장을 많이 하지도 않기 때문에 절임 배추를 산다. 절이고 씻는 수고를 하지 않으니 배추 몇 백 개를 팔기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배추가 걸스카우트 쿠키처럼 가지고 다니면서 문을 두드리면서 팔 수 있는 물건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녀가 말했다. 그러면서 “이것도 야릇한 미소에 해당해. 그것도 가장 큰 야릇함. 그녀는 알고 있었어.”라고 말했다.
농협 공판장에 내놓자고 하자 아내는 몇 군데 아는 식당이 있으니 알아보고 내놓자고 했다. 그러면서 배 농사 짓는 자기 친구는 수박만 한 배를 공판장에 냈는데 거의 헐값에 팔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었다는 말을 했다. 결국, 우리는 배추 5백 포기를 일부는 공판장에 내고, 또 일부는 아내가 아는 식당과 공동급식을 하는 기관에 팔았고, 아내의 친구들에게 몇 개씩 나눠 주어 다 소진할 수 있었다. 공판장에 낸 배추 한 포기가 예상보다 훨씬 싼 가격에 팔릴 때 아내는 야릇한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배추 몇 포기와 동치미 담그기에 적당한 크기의 무를 가지고 서울 장모님 댁에 갔다. 아내는 자신이 이렇게 농사를 지었다고 자랑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장모님 병구완 차 와 있던 처제가 내가 내려놓은 배추와 무를 보면서 “언니, 너무 많이 가져왔어. 반만 주고 가져가. 여긴 먹을 사람도 없는데.”라고 말하자, 아내가 마음이 상했는지 가만히 한 묶음의 무를 밖으로 내놓았다. 난 가만히 지켜보면서 머릿속에서는 종묘상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아줌마의 야릇한 미소 속에 혹시 이와 비슷한 일도 포함되어 있을까?”
밭에는 아직 포기가 덜 앉은 배추 몇 포기가 다가오는 겨울바람을 맞고 있다. 이것만이 오로지 우리 몫이다. 아내는 이것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지난번 고구마도 그랬어. 알이 굵고 미끈한 것은 남에게 가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새끼손가락처럼 가늘거나 장구처럼 잘록하고 못생긴 것뿐이었어. 농사지어 좋은 것 먹자는 의도 아니었어? 기분이 야릇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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