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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8월호, 신작수필26인선 I 새댁의 열 친구 - 남명모

신아미디어 2019. 2. 26. 00:39

"고구마 열 박스를 보내고 나니, 정작 우리가 먹을 건 지스러기만 남았다. 하지만 고구마를 받아 보고 기뻐할 새댁의 열 친구를 생각해보니 나는 안 먹어도 좋았다. 다만 새댁 같이 예쁜 친구를 둔, 그 열 친구가 부러웠다."

 

 

 

 

 

   새댁의 열 친구        /    남명모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오후, 핸드폰이 드르륵 울렸다.
   “고구마 아저씬가요?”
   낯선 여인의 목소리다. 나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이 누굴까. 잘못 걸려온 전화라 여기고 끊고 보니, 집히는 데가 있었다.


   지난해 가을이었다. 밭에서 고구마를 캐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와 “너무 좋다. 너무 좋다”라며 한 박스만 팔라고 했다. 우리가 먹기 위해 심은 거지만 칭찬에 넘어간 아내가 딱 한 박스만 팔자고 했다. 지금 산책하는 중이라는 할머니는 저녁 일곱 시에 아파트로 가져오라 했다. 약속시간에 맞추어 빛깔 좋고 잘생긴 녀석들만 골라 담았다.
   이날 하필이면 손수레를 집에 두고 와서 2km가 넘는 곳까지 상자를 어깨에 메고 헐레벌떡 찾아갔다. 15층까지 올라가 인터폰을 눌렀으나 아무 소리가 없었다. 외모도 반듯하고 기품도 있어 보이는 할머니가 설마 실언이야 하랴하고 전화번호를 물어보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 주인 없는 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릴 수 없었다. 갈 땐 몰랐는데 상자를 메고 돌아오려니 왜 그렇게 맥이 풀리는지, 한 발짝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라도 팔아버리려고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아파트 출구로 내려갔다.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고구마 사라고 하니 잡상인 취급을 하며 곱지 않은 눈총만 보내왔다. 고구마 상자를 버리고도 싶었다.
   그때 자동차 앞에서 노트북을 들고 서성거리던 젊은 새댁이 손짓을 하며 다가왔다. 얼른 고구마를 보여주었더니 반색을 했다.
   “세상에 세상에, 이렇게 예쁜 고구마는 처음 봐!”
   자기가 사겠다며 지갑을 열었다. 햄버거 따위나 먹고 자랐을 젊은이가 고구마를 보고 좋아하는 모습에 나도 감탄이 나왔다. 나는 그녀가 너무 고마워 ‘고구마 저장하는 법’까지 메모해 주었다. 아무리 좋은 물건도 관리를 잘못하면 천덕꾸러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 고구마에 이상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도 적어주었던 기억이 그제야 떠올랐다.


   고구마 보관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 궁금하기도 해서 방금 걸려온 전화번호를 눌렀다. 뜻밖에도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고구마 정말 명품이었어요!”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은 더 맛있다며, 내년에는 미리 세 박스를 예약한다고 했다. 동네 앞 공터에서 소일하는 나를 고구마 전문농사꾼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아무려면 어떠랴. 우리 고구마가 세상에 없는 명품이라는데.
   가을이 되어 고구마 캐는 날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난데없이 택배기사를 보내겠다는 답이 왔다. ‘명품 고구마’ 열 박스를 서울에 사는 친구들에게도 나누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열 명이나 된다는 말이 큰 감동으로 들려왔다. 나에게 보내는 택배기사는 자기가 늘 거래하는 분인데 열 박스의 택배비까지 이미 선불했다고 한다. 내가 키운 농작물을 이렇게까지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평생 농사짓고 살아도 좋을 듯싶었다. 박스 하나하나마다 예쁜 고구마를 채우면서, 보석 같은 새댁의 우정도 함께 담았다.
   고구마 열 박스를 보내고 나니, 정작 우리가 먹을 건 지스러기만 남았다. 하지만 고구마를 받아 보고 기뻐할 새댁의 열 친구를 생각해보니 나는 안 먹어도 좋았다. 다만 새댁 같이 예쁜 친구를 둔, 그 열 친구가 부러웠다.

 

 


남명모 님은 2002년 《수필춘추》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