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분신이, 한때 초롱초롱한 두 아이의 눈망울을 뒤로하고 그토록 소중한 엄마 자리를 놓아버리려 했던 내게 일침을 가한다. 그 일이 얼마나 헛된 망상이고 어설픈 사치라는 것을 아느냐고…. 가벼운 한숨 한 줄기로 그때의 절실함을 대변하고는 슬그머니 현실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나와 이어져 있는 핏줄의 정이 새삼 따스하게 스며든다."
엄마 자리 - 김재희
대기실 출입문이 열리며 휠체어 탄 환자가 들어온다. 두리번거리는 환자의 눈매가 조금 흔들려 보인다. 보호자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간호사와 눈인사를 나누고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무슨 일인지 잠깐 기다리라며 환자만 놓고 나가는 남자를 향해 여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한다.
“엄마! 어디 가? 나 혼자 어떡해?”
사람들이 일제히 그 여자에게 시선을 돌리며 침묵으로 의아함을 내비친다. 얼핏 부부처럼 보이는데 남자보고 엄마라니!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간호사들 앞에 가서 ‘엄마 어디 갔느냐’고 찾아 달라 애걸한다. 꽤 오랫동안 안면이 있는 환자였는지 그런 상황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간호사들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혼자만 이리저리 휠체어의 바퀴를 둥글리며 불안한 눈망울을 돌려댄다.
그러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눈을 딴 데로 돌릴 수가 없었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이 그 여자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와 마주친 눈을 그대로 고정한 채 나를 향해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다가왔다.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많은 사람 다 제쳐두고 왜 나를 향해 오는 걸까.
엄마 어디 갔느냐고, 언제 오느냐고 묻기에 곧 올 거라고 대답하자 그제야 좀 안심이 되는지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너무나 소박하고 해맑은 웃음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내 손을 끌어다가 자기 머리에 대면서 만져보란다. 뭔가 굵직한 흉터 자국이 도도록이 올라와 있었다. 순간적으로 뇌수술 후유증을 앓는 환자구나 싶었다. 몸의 흉터보다 더 깊은 마음의 흉터가 그녀의 언행을 엇나가게 했지 싶다.
“나, 아기 못 낳아. 의사가 자궁을 수술해 버려서 아기를 가질 수 없대. 그런데 나는 아기가 갖고 싶어. 아기가 나한테 ‘엄마!’ 하고 불러주면 정말 좋겠어. 어떤 아이에게 엄마라고 불러주면 과자 사 준다고 했는데 과자만 먹고 제 엄마한테 가 버렸어. 또 오면 이번엔 과자 많이 사 줄 거야. 그러면 불러 줄까?”
너무나 간절한 표정과 목소리에 코끝이 찡했다. 그럴 거라며 고개를 끄덕여 주니 좋아라고 웃는 모습이 정말 환하다. 그 환한 모습으로 끝없이 얘기를 한다. 처음 본 사람이 아니라 몇십 년 함께 한 지우처럼 스스럼없이 얘기를 하고 나는 맞장구를 쳤다. 진료 대기실 사람들은 마치 TV 속에 나오는 중요한 뉴스거리처럼 우리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주시하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그녀의 남편도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우리를 쳐다보지는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세상 모든 일에 달관한 듯한 묵직한 침묵이 그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누군들 그 앞에서 섣부른 감정타령을 할 것인가.
한참을 얘기하던 그녀가 내게 바짝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 남편이 모르는채 하지만 귀는 이쪽으로 열어 놓고 있을 거라며 히죽 웃는다. 그 순간만큼은 전혀 문제가 없는 평범한 아낙네였다. 나도 함께 쿡쿡대며 공감한다는 표정을 보여 주었다. 아니,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나온 몸짓이었다. 우린 그렇게 한참 동안 남편들을 향한 공방에 의기투합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의 이름이 호명되자 흠칫 놀란 듯한 표정으로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잠깐은 전혀 문제없어 보이던 사람이 다시 남편의 보호 아래로 끌려들어 가는 어벙한 모습이 되었다. 엄마에게 투정부리듯 마지못해 따라가는 아이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간다.
진료를 마치고 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출입문을 밀치면 차가운 공기가 잠깐 휙 불어 들어왔다 금방 스러지는 작은 회오리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남기고 간 얘기들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대기실의 분위기는 어느새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어느덧 그녀의 분신을 품고 있었다. 남편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이유가 먹먹하게 가슴을 조여 왔다. 엄마가 되고 싶은 갈망, 누군가 자기를 엄마라고 불러주기를 바라는 소망이 처절하리만큼 간절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분신이, 한때 초롱초롱한 두 아이의 눈망울을 뒤로하고 그토록 소중한 엄마 자리를 놓아버리려 했던 내게 일침을 가한다. 그 일이 얼마나 헛된 망상이고 어설픈 사치라는 것을 아느냐고…. 가벼운 한숨 한 줄기로 그때의 절실함을 대변하고는 슬그머니 현실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나와 이어져 있는 핏줄의 정이 새삼 따스하게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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