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에 기대서서 주홍빛으로 물드는 노을을 바라본다. 바다가 점점 검푸르다. 고갯길을 걸어 올라와 작은 숙소에 누웠다. 총총 하늘 가득, 지금 내 마음은 별 밭에 머문 열두 살 소녀다. 수수깡처럼 말랐던 어린 시절, 지구 반대쪽에서 별 바라기 흰머리소녀를 꿈엔들 그려봤을까. 크로아티아는 별빛마저 블루다."
블루, 크로아티아 / 류창희
블루, 꿈의 빛깔이다.
아드리아 해안 길을 달린다. 이곳은 앞차를 바짝 따라 붙어야 한다. 구불구불 한쪽은 산, 한쪽은 바다다. 그보다 더 마음을 졸이게 하는 것은 외길 1차선이다. 세계 10대 안에 드는 자동차 여행 비경이라고 했던가. 이 절벽 같은 길을 하루에 여섯 시간 이상 달렸다. 잔잔한 물결 너머 주홍빛 지붕이 문양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찾아간 곳은 스플리트다. 우선 쉬고 싶다. 그만큼 독일에서 시작한 운전이 힘들었다. 기우였다. 물에 젖은 듯 반짝이는 대리석이 명품거리와 독특한 풍물, 즉석 생선시장의 활기로 로마유적지까지 생동감이 있다. 궁전 벽을 따라 언덕을 내려올 때 음악연주자들의 화음이 더 머물다 가라고 붙잡는다. 점점 사람들이 몰려와 줄서서 걷는다.
블루, 지나치게 맑다. 카뮈가 햇볕 때문에 권총을 쐈다고 하듯, 블루도 조燥와 울鬱의 감정이 심하다. 가볍게 들뜨거나 깊은 우울로 빠뜨린다. 실연을 하였거든 혼자 동유럽에 가라지 않던가. 대륙에 갇힌 지중해 푸른빛에 매료된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뒤돌아 혼자 있는 남자를 지켜보라. 남자라고 지칭한 건 잘못이다. 여자를 지켜보라. 말 걸거나 위로하지 말고 그냥 지켜보라. 혹시, 다음날 오다가다 마주치면 씽긋 웃어주라. 그녀 얼굴의 마스카라가 씻겨진 검은 눈물이 말끔해졌을 것이다.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편다. “아침이니, 당연히 이빨 닦고 세수했겠지.” 나의 짝지는 도무지 문학적이지 못하다. 어제 그 남녀는 한 침대에 같이 있었다고 하니, 서로 아는 사이였냐고? 언제부터 사귀었느냐고 또 묻는다. 눈치가 없으니 평생 나 말고 다른 여인과 연애를 못한다. 아니, 어쩌면 내가 속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철썩 같이 남편을 믿는다.
나는 어떤가. 광장 앞, 카페가 있는 근처 호텔에서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는 공상을 하기도 한다. 그 연인들은 서로에게 매달리지 않는다. 징징대지 않는다. 네가 어젯밤 나를 가졌으니, 오늘 나를 책임지라 윽박지르지 않는다. 미련 따위는 없다. 김영하의 소설 《여행자》에서처럼, 해마다 정해진 그 날, 그 호실에서 일곱 번 ‘밀회’하고, 일곱 번 마지막이라는 거짓말로, 일곱 번 체크아웃하면 그뿐이다. 인생은 지나가는 소낙비다. 나무와 풀은 더 싱싱한 초록잎을 보일 것이고, 햇살은 오늘의 블루처럼 맑을 것이고, 일곱 빛깔 무지개가 나타날 것이다. 그중 나는 파랑만 찜한다.
연인들은 죽도록 사랑하고, 죽도록 싸운다. 떠난다. 그리고 찾아온 곳이다. 몹시 아픈 사람들이 숨어들어 과거를 토해내느라 쓰린속을 움켜잡고 속울음을 운다. 또한 죽기 직전의 영혼이 다가와 뒷모습을 바라본다. 어느 순간, 서로 위로의 눈빛을 보낸다. 다시 아드리아 해 아침바다가 향긋한 민트 빛이다. 또 다른 만남이다. 그냥 잠깐 안아주는 난롯불 같은 사랑이다. 그들은 잠시 후, 혹은 여행의 끝자락에 또 떠날 것이다. 따뜻함과 편안함을 오히려 불편하게 여기는 상처받은 영혼들이다. 크로아티아는 그런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곳이다. 그럼, 너는 그런 애절한 사랑이 있느냐고? “No, 코멘트!” 나는 바람 소리를 토해내는 빈 병, 구경꾼이다.
두브로브니크라고 쓴 굴다리 하나 순간적으로 들어서니 군중들의 행렬, 세계 사람들이 아니, 유럽 사람들이 죽기 전에 꼭 한번 다녀간다는 고성이다. 그렇다고 모두 올해 안에 장례식을 치룰 행렬은 결코 아니다. 크로아티아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떠났다가 서른 해쯤 지난 다음, 두부 한모에 아드리아 해의 짠맛으로 간수를 칠 것이다. 코발트블루의 바다를 그리워하며 야금야금 안주삼아 추억할 것이다.
거리의 유도화 수국 붉은 부켄베리아 꽃이 거리 배경이다. 그곳에 인형 같은 금발의 푸른 눈,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다섯 살 소녀와, 공갈 젖꼭지를 입에 물고 선글라스를 낀 유럽 아기들. 쓰레기통을 뒤지는 집시 할머니. 보스니아 시절 내전과 종교분쟁을 겪고 지켜 본 어르신들. 이빨 한두 개가 빠지고 낮술로 코끝이 붉어진 영감님들이 길거리 야자수 밑 벤치에 앉아 “어디서 왔느냐?”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환영의 호기심을 보인다.
과연 그들은 젊은 시절,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에 관심을 갖고 찾아올 것을 상상이나 하였을까. “나?” 그래, “너!” 말이다. 체력의 한계와 정신의 피폐를 극복하느라 종종걸음 치던 며느리 시절, 나야말로 상상도 못한 일이다. 내가 감히 그들의 슬픈 역사를 한가하게 관망하고 있다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성벽에 기대서서 주홍빛으로 물드는 노을을 바라본다. 바다가 점점 검푸르다. 고갯길을 걸어 올라와 작은 숙소에 누웠다. 총총 하늘 가득, 지금 내 마음은 별 밭에 머문 열두 살 소녀다. 수수깡처럼 말랐던 어린 시절, 지구 반대쪽에서 별 바라기 흰머리소녀를 꿈엔들 그려봤을까.
크로아티아는 별빛마저 블루다.
류창희 님은 《에세이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논어에세이『빈빈』, 『매실의 초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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