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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9년 1월호, 통권207호 I 사색의 창] 새해, 나를 돌아보다 - 신규

신아미디어 2019. 2. 11. 10:46

"내 지금까지, 내가 좋아서 즐기며 하는 것에서 만족을 찾지 못하고 꼭 무엇을 이루어야겠다며 전전긍긍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만든 속박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제 내가 설정한 속박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삶의 자유를 만끽하며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그려본다. 우선은 어설플지라도 그 자체가 결단이며 용기이다."


 




   새해, 나를 돌아보다      -    신규


   한 해의 끝자락에서 또 다른 한 해의 시작을 생각한다. 지난날들을 무탈하게 보냈다는 은혜에 감사드리면서도,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에서는 홀가분함보다 아쉬움이 앞선다. 이맘때면 연례행사처럼 치르는 일이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나를 되돌아본다.
   새해, 새아침에 떠오르는 밝은 태양, 부지런한 사람들은 벌써부터 그날의 태양을 맞이하러 산이나 바닷가를 찾아 나설 준비를 한다. 자신만의 무엇인가를 염원하고 성취를 기원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경건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려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어느 한때는 삶의 현장에서 남보다 먼저 얻고, 먼저 이루려는 성급함으로 옆을 돌아다볼 여유가 없었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렸다. 그때는 그것이 생존경쟁에서 이기는 일이었고, 승자의 기쁨이었다. 모두가 내 이기심으로 가려진 졸렬한 마음이 그어놓은 한계였으리라.
   세월이 흐르면서 ‘승자’의 의미와 목표도 다르게 느껴졌다. 매년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것은 삿된 마음을 줄이고 안분지족하며 유유자적하는 생활이다. 그러나 실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굳어진 생각과 행동의 관성력은 쉽게 방향을 달리할 수 없었다. 진솔한 내 삶의 정체와 의미를 찾으려고 애써 보지만 마음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심은 욕심을 부르고, 그것은 메아리처럼 돌아와 나를 다시 옥죈다. 마치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굴러 내려오면, 숙명처럼 다시 밀어 올리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반복의 연속이었다.
   심기일전하여 가슴을 열고 새해의 빛나는 태양을 미리 맞이한다. 욕심이란 무엇이며, 어떤 것은 줄여야 하고 또 어떤 것은 더 다져야 하는가.
   착하게 살고 있는 한 농부가 있었다. 어느 날 농부는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는다. ‘아침 해가 뜰 때 출발하여 해가 질 때까지 하루 동안 걸어서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면 그 안의 모든 땅을 주겠다.’고.
   농부는 그 넓은 땅을 차지하면 누릴 황홀한 설계를 그리며 밤새 잠을 설치다가 새벽녘에 출발 장소로 갔다. 농부는 해가 동산에 얼굴을 내밀자마자 있는 힘을 다하여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아까워 준비해 간 먹을거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쉬지 않고 걷고 달리기를 반복하다가 해가 넘어가려는 순간 가까스로 출발했던 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농부는 곧바로 쓰러지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이 달려가서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그의 입에서는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한 발짝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너무 무리한 나머지 그렇게 죽고 말았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의 동료가 그 자리에 무덤을 파고 농부를 묻었다. 그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은 겨우 그가 묻힌 3아르신(약 한 평)밖에 되지 않았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한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내용이다.
   내 욕심의 끝은 어디까지 일까. 계절따라 가끔 다니는 산행의 목표는 이제부터 정상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꽃철에는 꽃에 묻히고, 숲이 우거지면 녹음에 몸과 마음을 맡기다가 내려오면 된다. 하얀 눈이 산과 들을 장식하면 설경에 취해보고, 행여 삭풍에도 벼랑 끝에 버티고 서 있는 낙락장송을 만나면 그 의연함에 찬사를 보낼 것이다. 정상이 아니면 어떠하겠는가. 7부 능선도 좋고 산문의 언저리도 좋다. 그저 저도 아니면 한적한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신비로운 자연의 심포니에 심취하다가, 그것도 싫증이 나면 해 질 녘에 천천히 내려오자. 이렇듯, ‘인생의 산’을 오르면서도 욕심을 줄여 만족의 목표치를 낮춘다면 굳이 정상에 오르지 않더라도 나름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뿐이 아니다. 유비무환이라며 아직 돌아오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며 졸라맸던 마음의 허리띠를 풀어버리자. 한번 풀어 나보다 못한 동네 찾아보고, 한 번 더 풀어 소원했던 친구와 박주일배라도 나누자. 정장을 차려입고 오랜만에 최고급 레스토랑에도 가보자.
   ‘인연’이라는 깊은 골을 음미해 본다. 맹자는 ‘세 가지 불행’ 중의 하나로 ‘자기 것만 너무 집착하고 사랑하는 편협함’을 들었다. 어느 심리학자는 인연의 집착은 이기심에서 야기되는 폐단이라고까지 했다. 인연을 무조건적인 관습이나 내 자신의 편협함에 묶어두지 말고, 과감하게 풀어서 따뜻하게 넓혀보자.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모두가 한 뿌리인 것을…….
   배움에는 끝이 없다지만 현재의 나에게 배움이란 어떤 의미인가. 끓임없는 지식의 충족이 혹시라도 현학적이거나 과시를 위한 허세는 아니었는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처세학도 아니고, 세상의 진리를 설파한 철인들의 행적을 모방할 것도 아니다. 하물며 사서四書와 육예六藝를 배우고 익힐 재능도 여력도 없다. 서가에 꽂혀 있는 낡은 책을 펴들고 읽어도 즐거우면 그만이다.
   내 지금까지, 내가 좋아서 즐기며 하는 것에서 만족을 찾지 못하고 꼭 무엇을 이루어야겠다며 전전긍긍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만든 속박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제 내가 설정한 속박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삶의 자유를 만끽하며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그려본다. 우선은 어설플지라도 그 자체가 결단이며 용기이다.
   그래서 낙낙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기쁨을 마음껏 누려보자. 설령 조금은 흐트러진다 한들 누가 탓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