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눈물이 찬란한 봄의 서막이라면 나는 기꺼이 울 뿐이다. 겨울의 등을 떠미는 봄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사람은 충분히 시리고 아팠단다. 그러니, 안녕! 오늘도, 나는 울기로 했다."
나는 울기로 했다 / 이은정
아프다. 눈물이 나오려나보다. 코끝이 찡해지더니 이내 관자놀이가 뻐근하다. 귀 뒤쪽 임파선에서 시작된 통증이 정수리까지 이어진다. 눈자위가 욱신거리다 종내 눈물이 맺힌다. 예측하지 못한 눈물은 이렇듯 통증을 동반한다. 울어야 할 상황이 예측되면 통증이 없다. 슬픔이 충분히 예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발적인 눈물은 통증과 함께 온다.
그저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당이 있고, 나무가 있고, 너머에 온통 산을 마주한 네모난 세상이었다. 고운 소리를 내며 봄비가 내렸다. 안녕. 껌뻑 졸고 있던 컴퓨터 화면에서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순간 혼백이 상처한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리고 통증이 시작된 것이다. 감정을 기다려주지 않는 눈물은 거침없다. 까닭을 모르니 황당하고, 휴지를 쥐었을 땐 이미 봇물이 터진 후다. 안녕. 봄비의 목소리는 반갑다는 인사가 아니었다. 잘 가라는 인사였다. 어린아이처럼 가지 않으려는 겨울의 엉덩이를 툭툭치며 달래는 목소리였다. 이 사람은 충분히 시리고 아팠단다. 그러니, 안녕!
저기 작은 액자 속에 내가 울고 있다.
세수만 해도 빛나던 시절, 스튜디오에서 사진 촬영을 했다. 완벽한 화장과 스타일링을 마치고 예쁜 옷을 입었다. 번쩍이는 조명 앞에 서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중년의 사진작가는 많은 걸 요구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총체적 예쁨’이었다. 웃어야 했고, 눈을 크게 떠야 했고, 신체 곡선이 드러나도록 몸을 비틀기도 예사였다. 내 미소가 마음에 들면 “좋아! 예뻐!”를 외치며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몇 벌의 옷을 갈아입고 나니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사진작가에게 다가갔다. “작가님, 부탁이 있어요. 식사 끝나고 진행할 때는 우는 모습을 찍어주세요.”
사진작가는 깜짝 놀랐다. 스텝들도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그랬을 것이다. 여자라면 예쁜 사진을 남기고 싶은 게 당연했다. 작가는 울 수 있겠느냐 물었다. 나는 물론 울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이 사진찍는 일만 이십오 년을 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당황스럽다고 했다. 나는 우는 사진을 갖고 싶었다. 맑고 예뻤던 오월의 어느 날, 나는 울기로 했다.
내가 감정을 잡을 때까지 작가는 기다려주었다. 기다리면서 카메라 셔터를 계속 눌렀다. 눈물이 나오는 찰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했다. 모든 스텝이 숨소리를 죽이고 내 눈을 주목했고 나는 보란듯이 눈물을 흘렸다. 통증 없던 눈물은 섧은 소리를 내었다. 저릿한 가슴을 움켜쥐기도 했다. 못생기게 미간을 찌푸렸고 화장이 지워지며 얼룩졌다. 마스카라가 흘러 검은 눈물 자국이 생겼지만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나는 울고 싶은 만큼 울었다. 창밖의 투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건너편 건물에서 굴절되는 햇살을 아파하며. 여물지 않은 청춘을 보내며.
사진작가는 들떠 있었다. 우는 여자 사진은 처음 찍는데 뭔가 전율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무슨 생각하며 울었어요?” 스텝이 물었다. “저렇게 예쁜 하늘만 봐도 눈물이 날 때가 있죠.” 나는 밝게 웃으며 답해 주었다. 나보다 한참 어린 스텝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리다고 다 모르는 건 아니겠지만 몰라도 되는 건 모르고 살아도 좋다. 웃는 방법을 아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어찌 됐든 눈물은 슬픔과 한 몸이고, 가끔은 오늘처럼 통증을 동반하기도 하니까. 할 수만 있다면 웃고만 살아도 좋지 않을까.
사진이 나왔던 날 스튜디오에서 전화가 왔다. 일 년에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이벤트에 뽑혔다고 했다. 작가가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뽑아서 그 사람에겐 촬영비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몇 십만원짜리 촬영이었다. 작가에게 어지간히 충격적인 사진이었나 보았다. 그렇게 공짜로 받은 사진 속 나는 여전히 울고 있다. 인상을 쓰며 못생기게, 내가 가진 가장 정직한 표정으로. 존재하는 것에 의미없는 눈물이 어디 있을까.
다시 창 넘어 네모난 세상 속으로 들어선다. 봄비가 헐벗은 나뭇가지 하나하나 애무하듯 건드리고 지나간다. 지렁이가 소리 없는 디스코를 추고 개구리는 더 높이 뛸 준비를 한다. 납작 늘어진 작은 냉이가 입을 벌려 봄비를 취한다. 어디선가 날아든 벚꽃 잎이 창가에서 맴돈다. 춘향이 그네 타듯 바람을 탄다. 예고 없는 눈물의 통증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어떤 상념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봄이 오려는 작은 몸부림이 다만 눈물이 되었다. 마치 내 인생에 봄이 온 듯 더없이 반가웠다. 살다 보면 불현듯 눈물이 말을 걸 때가 있다. 가장 정직한 내 모습을 마주하는 시간이다. 통증은 아프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음을 안다. 오늘 이 눈물이 찬란한 봄의 서막이라면 나는 기꺼이 울 뿐이다. 겨울의 등을 떠미는 봄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사람은 충분히 시리고 아팠단다. 그러니, 안녕! 오늘도, 나는 울기로 했다.
이은정 님은 농민신문 전원생활수기공모전 대상, 동서문학상 가작, 한국예총 《예술세계》신인상 등단.
'월간 좋은수필 > 좋은수필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7월호, 신작수필26인선 I 와온의 석양 - 이주옥 (0) | 2019.02.08 |
---|---|
『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7월호, 신작수필26인선 I 변화, 인심인가 섭리인가 - 류인석 (0) | 2019.02.08 |
『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7월호, 신작수필26인선 I 도서관글 읽고 한 숟가락 글을 쓰는 까닭 - 김용옥 (0) | 2019.02.07 |
『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7월호, 신작수필26인선 I 습지 풍경 - 엄현옥 (0) | 2019.02.07 |
『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7월호, 신작수필26인선 I 새 - 김창식 (0) | 2019.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