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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6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울음 너머 맑음 - 정태헌

신아미디어 2019. 1. 21. 09:58

"이윽고 흙을 덮기 시작한다. 지아비 곁에 다시 묻힌 할머니는 이제 할아버지 손 잡고 산바람과 함께 노닐 수 있을까. 비로소 묵은 가슴이 풀어지고 할머니의 넋이 말갛게 보이기 시작한다."

 

 

 

 

 

   울음 너머 맑음         /      정태헌

 

   산록에선 뻐꾸기 울음이 일렁인다. 제를 올리고 고축이 끝나자 일꾼들이 파묘를 시작한다. 목관이 보이지 않자 삽을 물리치고 손으로 흙을 더듬는다. 체수가 작았던 할머니의 육신은 살을 벗고 몇조각의 뼈로 남아 있다.
   그날, 곡기를 끊은 지 닷새째가 되던 날 아침이었다. 밤새 곁을 지켰던 가족들은 눈을 붙이고 할머니 곁에 혼자 앉아 있었다. 목울대만 들락날락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는 할머니, 반드시 누워있는걸 보고 잠깐 마루로 나서는데, 끄응~, 숨을 몰아쉬는 단말마에 황급히 돌아보니 할머니의 머리가 마루 쪽을 향하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는데 어떻게 고개를 움직일 수가 있었을까. 마지막 안간힘이란 그런 것이었을까. 곁으로 다가가니 할머니는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었다. 혼신을 다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 텐데, 그만 내 부주의 탓으로 놓치고 말았다. 동공이 확대되며 숨이 멎었다.
   일꾼들의 손에 의해 유골이 수습되기 시작한다. 뻐꾸기는 그악스럽게 운다. 두상 부분은 육탈이 되었는데 갈비뼈 부위는 흙과 살이 엉켜 있다. 육탈이 덜 된 부위를 대나무 칼로 긁어낸다. 난 옆에서 뼛조각에 청주를 붓는다. 청주로 뼈를 씻어 수렴하는 것이다. 하체뼈는 무릎 부분이 토막이 나 있다. 정갈한 한지 위에 두상부터 시작하여 발가락까지 순서대로 맞추어진다. 다시 부위별로 한지에 싸고 각 부위마다 표시하여 깨끗한 종이 상자에 담는다. 할머니의 영혼은 뼈에 스며든 것일까.
   장례를 치르고 난 밤, 할머니는 꿈속에 손자에게 찾아오셨다. 할머니에게는 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가까웠던 모양이었다. 생전의 단아한 모습 그대로였다. 손자는 무서워 도망을 치고 있었다. 할머니는 밤새내 손자를 따르셨고 그 손자는 떼어지지 않는 발을 굴리며 도망을 쳤다. 임종의 순간을 놓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할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세이레 동안이나 꿈속에서 손자를 찾아오셨다. 손자는 가위눌리며 야위어만 갔다. 잠이 깨면 진자리가 자꾸 갈마들어 잠자리에 들기가 두렵기만 했다. 그때, 마지막 숨을 거두며 손자에게 하고 싶으셨던 말씀이 무엇이었을까.
   종이 상자에 담긴 할머니의 유골을 바라본다. 십수 년 동안 선산 밖에 머물렀던 할머니는 이제 지아비 곁으로 가게 되었다. 행전을 차고 두건을 쓴 아버지의 삼베 두루마기 자락이 바람에 순간 날린다. 뻐꾸기의 울음이 더 잦아진다. 유골 상자를 자청해서 안는다. 선산으로 올라가는 길, 몇 조각 안 되는 할머니의 유골은 가볍기만 하다. 이미 파놓은 광중壙中엔 햇살이 그득 고여 있다. 한지에 쌓인 할머니의 유골은 다시 광중에 두상부터 순서대로 놓인다. 끊이지 않고 뻐꾸기는 울어댄다. 산일 하는 일꾼이 저편 솔숲을 흘깃거리더니 구시렁댄다.
   ‘저놈의 뻐꾸기는 목도 안 아플 꺼나.’
   할머니의 은비녀와 흰 머리카락 몇 올이 손자의 양 손바닥에 놓인다. 자꾸만 되살아난다, 임종 때의 모습이.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뼈를 다 누이고 손자 손에 들려있던 비녀와 머리카락이 두상 곁에 놓인다. 이윽고 흙을 덮기 시작한다. 지아비 곁에 다시 묻힌 할머니는 이제 할아버지 손 잡고 산바람과 함께 노닐 수 있을까. 비로소 묵은 가슴이 풀어지고 할머니의 넋이 말갛게 보이기 시작한다.

 

 


정태헌 님은 1998년 《월간문학》 등단. 수필집: 『동행』, 『목마른 계절』, 『경계에 서서』, 『바람의 길』, 선집: 『여울물 소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