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하늘에 앉아 꿈꾼다. 모든 것을 품어서 키우는 무등의 하늘처럼 한라에서 백두까지 우리가 어우러져 꽃을 피우는 그날을."
무등산* 예찬 - 임동옥
서석대에 올라 창공을 바라보았다. 서석대 6각기둥 정수리를 만졌다. “모난 바위에 앉아도 꽃방석”이라고 범 시인은 말했지.
불현듯 먼 옛날 이곳이 바다였다는 생각이 스쳤다. 2억만 년 전 무등산의 하늘은 바다였다. 무등산은 서슬 퍼런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닷속 어디쯤에 있었다. 바다 위 하늘에는 오직 바람과 햇빛만이 오갔다. 무등산은 선캄브리아기에서 중생대 백악기까지 최소 3번 이상의 화산 분출로 만들어졌다. 백악기에 이르러 해남과 화순에서 공룡들의 광기狂氣로 지축이 흔들렸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태평양판과 아시아판이 서로 충돌하였다. 이 두 판의 열점이 웅혼한 에너지가 되었다. 그 힘은 바다를 가르고 하늘로 치솟아 천왕봉과 서석대나 입석대가 된 거다. 무등산에는 세계 최대 크기의 주상절리대와 국내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암괴인 너덜이 만들어졌다. 드디어 무등산은 바다의 하늘이 되었다. 무등산 꼭대기는 서석대나 입석대, 주상절리대의 하늘이고 너덜의 하늘이다.
무등산은 풀과 나무들의 지엄한 하늘이고 동물들의 하늘이다. 세인봉을 오르는 계곡의 눈밭은 봄의 전령 복수초의 하늘이고 원효계곡 발원지와 물통거리는 늘씬 날씬한 노각나무의 하늘이다. 입석대는 기후변화에 민감한 구상나무의 하늘이고 주상절리로 병풍을 친 서석대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철쭉꽃의 하늘이다. 무등산에서 제일 높은 천왕봉은 하늘에 닿고 싶은 주목의 하늘이고 광활한 초원을 거느린 중봉은 바람으로 빗질하는 억새의 하늘이다. 실개천이 흐르는 상류계곡은 오월항쟁을 상기하듯 꺾으면 피가 나는 매미꽃의 하늘이고 수많은 단을 새긴 시무지기폭포는 샹들리에 등불을 밝히는 괭이눈의 하늘이다. 볕이 잘 드는 세인봉은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에 나오는 소나무의 하늘이고 무등산 중턱의 너덜은 바위에 맺힌 이슬을 먹고 자라는 왕다람쥐 꼬리의 하늘이다. 너덜의 바위와 바위 사이에 생긴 공간은 노란 목도리를 두른 담비의 하늘이고 무등산의 신갈나무숲은 하늘다람쥐의 하늘이고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의 하늘이다. 풍암제는 풍암정에서 들려오는 풍류 소리에 파문을 일으키고 멸종위기종 수달의 하늘이다. 무등산은 산천초목의 생사여탈을 관장하는 암울한 검은 하늘이 아니라 일천 종이 넘는 식물이 공감하며 살아가는 늘 푸른 하늘이다. 무등산은 날마다 햇볕을 내리면서 너무 더운 날에는 구름으로 땡볕을 가려주고 가끔 단비를 뿌려 모든 생명체에 생기를 불어넣는 하늘이다.
무등산은 광주 사람들의 하늘이고 광주정신을 키운 하늘이다. 무등산은 산고수장山高水長하여 배산임수의 터에 광주와 화순과 담양을 만들었고 광주전남 사람들의 하늘이 되었다. 언제나 이들을 넉넉한 품으로 감싸고 있는 무등산 꼭대기에는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 세 봉우리가 한곳에 어울려 있다. 바로 하늘과 땅과 사람의 왕이 함께 모인 그 이상 더할 수 없는 산을 의미한다. 그 정상의 북측은 북산의 하늘이고 서측은 서석대의 하늘이다. 남측은 입석대의 하늘이고 동측은 광석대의 하늘이다.
천天·지地·인人 삼재三才. ‘천은 하늘이고 만물의 근본이며 조물주를 뜻하고 천계天界나 태양계의 성격과 기능을 가지고 있다. 지는 지구의, 인은 만물의 성격과 기능을 의미한다.’ 천왕봉은 지왕봉이나 인왕봉과 그 높이를 탓하지 않고 오순도순하니 조화調和의 하늘이다. 지왕봉은 가르치고 이끌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교화敎化의 하늘이고 인왕봉은 합리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를 정의로 받아들이는 치화治化의 하늘이다. 이 삼재가 바로 광주정신의 모체이고 민주화정신의 산실이다.
내가 앉아있는 무등산의 하늘에는 한라산에서 백두산을 잇는 흰 구름이 두둥실 떠있다. 서석대는 밤에는 은하를 타고 온 별들과 함께 놀고 낮에는 너와 나 우리가 찾는 꽃방석이다. 그러니 무등산은 별들의 하늘이고 너와 나의 하늘이다. 무등은 언제나 나를 받쳐주고 너를 지지해 주며 우리를 안아주는 큰 덕이 있는 하늘이다. 섬김의 덕은 외롭지 않다. 늘 이웃과 더불어 함께하는 하늘이다. “사람이 먼저다.”라고 말하는, 받드는 하늘이다. 무등산은 하늘에 맞닿아 있으면서도 뽐내거나 뻐기지 않고 누구에게든 꽃자리를 내어주는 하늘이다. 바로 무등산은 덕을 베풀며 섬기는 리더십의 표본이요 공감의 하늘이다.
그 하늘에 앉아 꿈꾼다. 모든 것을 품어서 키우는 무등의 하늘처럼 한라에서 백두까지 우리가 어우러져 꽃을 피우는 그날을.
* 무등산無等山: 통일신라 때 무진악武珍岳 또는 무악武岳이었고, 고려 때 서석산瑞石山이란 별칭과 함께 무등산이라 불렸다.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2월호, 통권206호 I 지상에서 길찾기] 꼬순이의 죽음 - 조흥제 (0) | 2019.01.10 |
---|---|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2월호, 통권206호 I 지상에서 길찾기] 겨울산에서 - 정지연 (0) | 2019.01.10 |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2월호, 통권206호 I 지상에서 길찾기] 엄나무에 대한 단상 - 이현실 (0) | 2019.01.09 |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2월호, 통권206호 I 지상에서 길찾기] 아버지의 마음 - 이임순 (0) | 2019.01.09 |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2월호, 통권206호 I 지상에서 길찾기] 남 몰래 흘리는 눈물 - 이양주 (0) | 2019.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