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가볍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풍물에 맞춰 앙감질을 해본다. 그때처럼 균형이 잡히지 않고 몸 전체가 비틀거린다. 창피한 생각에 누가 쳐다보지 않았을까 뒤돌아보니, 빨간색 치마를 입은 여자가 입을 가리며 웃고 있다."
우쭐 - 박철하
내 집 대문을 보는 순간 교도소의 정문이 떠올랐다. 크기는 달라도 교도소의 빨간 벽돌담과 하얗게 칠한 철문이 교도소의 겉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 이십여 년 전 일이다. 당시 사십을 갓 넘었을 때였다. 지인이 교도소교화위원이 되어보지 않겠느냐고 타진해 왔다. 나는 교화위원이 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뭔지도 모르면서 승낙했다. 직장상사와 협의도 하지 않은 채 결정을 내리고 많은 후회를 했다. 두 주에 한 번씩 교도소를 방문하기 때문에 직장에서 시간 조절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 와서 그런 청탁이 온다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용기 아닌 객기가 앞서지 않았나 싶다.
교육, 문화, 교양수준도 다르고 지식과 연령이 다양한 피교육자를 상대로 강의를 한 내가 참 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격적으로 수양을 쌓은 종교인도 아니고, 학문적으로 높은 지식을 쌓았거나 권력을 쥔 것도 아니다. 그런 내가, 다양한 신분의 사람을 인성교육 하겠다고 나섰으니,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다. 당돌하다.
교도소에 들어가려면 절차가 복잡하다. 밖에서 방문목적과 신분을 밝히고 교도관이 문을 열어 주어야 들어갈 수 있다. 들어가서 독자적인 행동도 용납하지 않는다. 반드시 교도관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스스로 통제된 그곳에 왜 갔느냐고 물어봤다. ‘오직 남들 앞에 우쭐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는 답이다. 남들 앞에 우쭐대고 싶은 심정은 나만이 가지고 있을까?
직장을 그만두고 빈둥거리며 놀고 있을 때, 이웃사촌이 동네에 친목모임을 갖는데 함께하자는 권유가 있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동참하게 되었다. 모임은 한 달에 한 번씩 열렸는데, 친목모임은 잿밥이고 주목적은 동양화 감상이었다.
나는 승부욕이 강하고, 이따금 잡기놀이를 즐긴다. 화투놀이는 돈이 오고 가기 때문에 노름이 분명할 텐데 제 분수를 모르고 끼어들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게임에 이길 확률은 제로이다. 게임 상대는 프로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나비 화려한 불꽃에 몸을 던지듯 달려든다. 남들 앞에서 돈은 잃어도 괜찮다는 특유의 우쭐되는 심성이 작용한 듯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주머니에 있던 돈과 옆 사람에게 빌린 돈 마저 잃었으니, 한 달 용돈보다 한참 넘는 액수이다. 노름판 속설에 돈 잃고 속 편한 사람 없다는 말이 맞나 보다. 속이 쓰리고, 집을 나설 때의 설렘과 부푼 마음은 온 데 간 데 없고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제 집 가는 사람이 아니고 포승에 묶여 교도소를 향하는 수인의 모습이 나다. 하늘을 보니 그믐달이 아내의 얼굴로 보인다.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 아내는 이 시간 잠 못 들고 불안한 마음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결혼생활 40여 년 동안 내가 한 행동이 떠오른다. 가장이라는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산 세월이 원망스럽다. 아마도 한순간의 잘못을 저지른 수인들이 지금의 나와 같은 처지가 아닐까?
문득 젊어서 교도소에서 했던 강연 내용이 되살아났다. 강연 제목은 ‘풍파있는 삶’이었다. 강의는 보이스카우트 아이들과 같이했던 율동으로 분위기를 잡으며 시작된다. 어제만 해도 과거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맛이난다고 하지 않는가?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신이 났다. 칠십여 명이 모인 소강당은 열기가 가득했다. 교도관도, 수인들도 강사도 하나가 되어.
시간이 나면 도서관을 찾게 되었다. 책을 읽다 보면, 이 많은 책을 언제 다 읽지 하는 조급증이 앞설 때가 많다. 그러다가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에 글쓰기를 시도해 본다. 얼마 못 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감당할 수 없어서 포기한다. 흥미로운 일에는 심사숙고하지 않고 덤비는 습성에서 이루어지는 실수의 반복이다. 나는 반복되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책은 말한다. 우주는 신이 인간에게 준 최대의 선물이라고, 그리고 겸손해지라고.
근래에 와서 가끔 내가 쓴 글이 세간의 화제를 모으는 책이 되어 각 미디어를 장악하는 공상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읽고 쓰는 시간보다 상상의 세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때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인터뷰하는 나를 발견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다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힌 것이 한두 번 아니다.
오늘도, 책에서 많은 곳을 여행하고 뿌듯함에 도서관을 나서는데 멀리서 풍물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정월 대보름이다. 풍물 소리를 들으니 어릴 적 모습이 떠오른다. 보름날이 되면 어른들은 풍물을 치고, 마을은 축제의 분위기로 들뜬다. 풍물패들이 마을을 돌 때에 동네 꼬맹이들은 풍물패들과 무리를 짓는다. 그중 흥이 많은 나는 풍물 소리에 맞추어 앙감질하며 어깨춤을 춘다.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집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가볍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풍물에 맞춰 앙감질을 해본다. 그때처럼 균형이 잡히지 않고 몸 전체가 비틀거린다. 창피한 생각에 누가 쳐다보지 않았을까 뒤돌아보니, 빨간색 치마를 입은 여자가 입을 가리며 웃고 있다.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1월호, 통권205호 I 세상 마주보기] 2미터의 거리감 - 유영자 (0) | 2018.12.31 |
---|---|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1월호, 통권205호 I 세상 마주보기] 살신자애殺身慈愛 - 백남일 (0) | 2018.12.31 |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1월호, 통권205호 I 세상 마주보기] 줄행랑 - 박순자 (0) | 2018.12.31 |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1월호, 통권205호 I 세상 마주보기] 진흙 속의 진주 - 박길중 (0) | 2018.12.28 |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1월호, 통권205호 I 세상 마주보기] 하늘은 - 김용대 (0) | 2018.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