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이 되었지만 미세먼지는 아직도 자욱하다. 저만치 앞의 길도 짙은 안개에 묻힌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지금 나의 영농현실이 이처럼 암담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자연의 농사법을 따라 한 발 한 발 나아가다보면 지금의 어려움 저 너머에는 더욱 선명한 길이 보일 것이므로."
자연의 농사법 / 이수안
겨울답지 않게 바람 한 점 없이 포근한 날이 며칠째 계속된다. 그때문에 저기 읍내 풍경이 미세먼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공기가 탁하다고 바깥일을 무작정 미룰 수는 없다. 어서 이 일을 마쳐야 복숭아나무 전지를 할 게 아닌가. 황사마스크를 쓰고 희뿌연 먼지를 헤치며 길을 나선다.
화물차를 몰고 가는 곳은 은행나무 숲이다. 읍내를 벗어나는 지점에 나목으로 서 있는 우람한 은행나무 숲에 들어 차를 멈춘다.
나무 아래에는 지난가을에 떨어진 은행이 땅이 비좁을 정도로 깔려있다. 이 보배를 아무도 주워가지 않은 것이 그저 고맙다. 갈퀴로 긁어모아 잎사귀를 대충 걷어내고 은행만 자루에 담는다.
복숭아 농사에서 큰일 중의 하나는 소독을 자주 해야 하는 점이다. 열흘에 한 번, 장마철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도 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이렇게 농약을 많이 뿌리는 농민을 비도덕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알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시판되는 농약은 대부분 저독성이며 잔류기간도 열흘 정도다. 하여 병을 예방하기 위해 약 성분이 없어질 때쯤 다시 소독하는 것이다. 수확 2주 전에 소독을 멈추기로 되어있는 규정만 지키면 유통되는 농작물에는 잔류 농약 성분이 거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혹시 수확기에도 뿌린다면 지탄받아야겠지만, 허용 범위 내의 사용까지 한데 묶어 비판하는 여론을 대할 때면 농사꾼으로서의 자존감이 위축되고는 한다. 그렇다면 소비자들이 그렇게나 두려워하는 농약을 직접 뿌려야 하는 농민의 건강이야말로 안전한 걸까.
요즈음은 농기계가 좋아 방제기에 앉아 운전만 하면 되니까 소독하는 일이 힘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한 이랑을 다 뿌리고 돌아서 다음 이랑을 시작할 때면 나는 내 건강이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바로 직전 이랑을 뿌릴 때 하늘을 뒤덮을 듯 뿜어져 나와 안개처럼 자욱하게 공중에 머무는 농약을 숨 쉴 때마다 들이마시기 때문이다. 더러는 쿨럭쿨럭 기침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방제복을 입고 방제 마스크를 쓰지만 그 작은 입자를 다 막을 수는 없다.
그런 위험 속에서 하는 일임에도 장마철에는 소독을 해도 치료가 잘 안 된다. 품종에 따라 이 약 저 약을 다 써 보아도 효험이 없어 실농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내 건강이 위협받는 것은 다음 문제고 복숭아나무 지키기에도 역부족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찾은 길이 자연에 물어보는 것이다. 내 복숭아나무와 똑같이 장맛비를 맞는 저 산의 나무는 어째서 병에 걸리지도 않고, 동해 피해도 없으며, 벌레 피해도 적은 걸까. 돌봐주지 않아도 건강하게 자라는 자연 속의 나무, 나무들…. 어떻게 하면 내 복숭아나무도 저처럼 단단하게 키울 수 있을까. 나를 따라하면 길이 보일 거라는 자연의 진중한 대답에 깨닫는다. 감기가 든 뒤에 약을 먹는 것보다 감기에 들지 않도록 체력을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사람도, 땅도, 그리고 나무도….
사실 나는 진즉에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다만 자연의 농사법을 따를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돈만 주면 손쉽게 사 쓸 수 있는 농약이나 거름을 두고 농자재 대부분을 직접 만들어 써야 하는 농사법이 아닌가. 힘들고 번거로워도 포기하면 안 되고, 빠른 효과가 없어도 지치지 않아야 한다. 장정도 없이 농사짓는 처지고보니 농약사에서 사 쓰는 편한 길을 택한 것이다.
이제 나는 지금까지 온 길과는 다른 새로운 길에 발을 내디뎠다. 이웃들에게 함께 갈 것을 권했지만 내가 한발 앞서가면 뒤를 따르겠다며 관망하고 있다. 섣불리 시작했다가 농사를 망칠까 염려하는 까닭이다.
이웃의 염려와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지난겨울 내내 자연의 농사법을 공부했고 친환경농약도 만들었다. 한 해 동안 쓸 천연농자재도 꼼꼼히 준비했고 필요한 시설도 보강했다. 이 길로 들었다고 이쪽 길만 고집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다가 안 되면 뒷걸음질도 하며 천천히 전진하다가, 땅과 나무와 내가 이 농사법에 익숙해지면 그때 이 길로 죽 가리라는 복안이다.
두어 시간 쓸어 담은 은행의 양이 엄청나다. 이걸로 한약처럼 푹 달여 진액을 받으면 올해 복숭아 농사에 쓸 살충제는 충분하고도 남겠다. 1억 년 전부터 살았으며 몇 번의 빙하시대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은행나무. 그 강한 생명력이 올 농사에서 모든 벌레로부터 내 복숭아나무를 지켜줄 것이다.
한낮이 되었지만 미세먼지는 아직도 자욱하다. 저만치 앞의 길도 짙은 안개에 묻힌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지금 나의 영농현실이 이처럼 암담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자연의 농사법을 따라 한 발 한 발 나아가다보면 지금의 어려움 저 너머에는 더욱 선명한 길이 보일 것이므로.
이수안 님은 《문예운동》으로 등단. 수필집: 『날마다 해가 뜨는 이유』 『포도밭에서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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