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지않아 가을이 오면 전개될 속리산의 아름다운 변신을 기대해 본다. 숲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변신은 변절이 아니라 단지 생존을 위한 수단이며,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또 다른 시혜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무인 찻집 손님 - 윤혜주
초저녁 숲정이에 풀벌레 소리 자욱한 밤. 구애의 세레나데가 요란하다. 밤이 깊어 갈수록 암컷의 선택을 받기 위한 수컷들의 아름답고 우렁찬 소리로 통나무집이 들썩인다. 한여름 배시시 웃던 앉은뱅이 들꽃들의 웃음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싸그락싸그락 막새바람에 마른 풀꽃 향기만 가득하다. 밤이면 푸른 달빛싸라기 나리고 낮이면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물이 끓는, 여기는 서너 평 남짓한 천상의 화원. 주인 없는 무인 찻집이다.
토옥~톡! 산수유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던 어느 해 봄. 산 중턱 인적 드문 이곳에 귀농을 꿈꾸던 젊은 부부가 매실농사를 짓겠다며 찾아 들었다. 몇 해가 지나자 정직한 땅은 그들의 땀에 결실로 보답했다. 마침내 매실나무는 순하고 아늑한 흙 깊숙이 뿌리를 굳게 박고 새순을 틔우더니 꽃을 피웠다.
산중턱이 연분홍 치마를 둘렀다. 그 분홍빛 나부낌에 홀린 듯 아름아름 숨차게 사람들이 찾아 올라왔다. 봄의 튕김과 흥성거림, 그리고 수런거림까지도 사랑하며 꽃이 좋아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농장 주인이 쉬어가라고 배려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가을이면 집들이 오종종 발아래 걸린 산 중턱엔 발그레한 단풍이 비단처럼 깔렸다. 그뿐이겠는가. 가슴 시린 겨울 산의 신음 소리까지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농장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인심 좋은 주인이 농장 한편에 아담한 통나무로 비바람 막아줄 작은 공간을 만들어 차 한 잔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찾아온 이들이 점점 늘어나자 바쁜 농장 주인은 양은 주전자와 불을 내놓고 셀프를 권했다. 그때부터였다. 누구나 물을 끓이고 차를 가져와 마시며 사색에 잠기다 돌아가는 공간으로 사랑받기 시작하였다. 누가 먼저였을까. 그들이 여기저기에 놓고 가는 지폐와 동전이 눈에 띄게 늘어나자 주인은 항아리 하나를 가져다 입구에 내놓았다.
흔적을 남기고픈 건 생명을 가진 것들의 본능일까. 내부는 머물다간 이들의 흔적으로 빼곡하다. 토라져 돌아앉은 것 같은 서너 개의 테이블 위에도 이빨 빠진 찻잔에도 깨알 같은 글씨로, 혹은 정체불명의 낙서가 상흔처럼 남아 있다. 누군가 남긴 아픔의 흔적에 위로의 댓글이 달리고 그 댓글에 또 다른 사람의 공감이 달리면 위로는 배가 되었다. 산골 작은 찻집이 그들에게 주는 의미는 뭘까. 즐거움도, 아픔도 서로 나누고 공유하는 커다랗고 따뜻한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그 남자가 배낭에 소주 한 병 넣고 이곳으로 찾아든 것은 마른 나무 뼈에 눈꽃이 피고 검버섯 사이사이로 하얀 꽃이 우우 돋아나던 지난겨울이었다. 실직의 고통을 차마 가족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도망치듯 집을 나와 출근길이 되어버린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남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야심차게 출발한 회사는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하는 손꼽히는 기업이었다. 건실하고 책임감이 누구보다 강했던 남자는 일찌감치 인정을 받아 젊은 나이에 중책을 맡았다. 그에 부응하듯 회사는 날로 발전했다. 그러나 생산이 늘고 흑자가 나면 날수록 쌓여가는 화학폐기물 처리에는 모두가 뒷전이었다. 남자는 수없이 상부에 보고서를 올리고 호소했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이들의 무관심으로 남자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만 되어 돌아왔다.
그것은 예견된 사고였다. 허술하게 처리한 폐기물이 빗물에 범람하고 말았다. 서슬이 퍼런 환경오염이라는 법 앞에 남자는 책임자라는 이유로 제물로 바쳐졌다. 가혹한 형별이었지만 다시 받아주겠다는 회사와의 약속을 굳게 믿고 긴 시간 철창 속 생활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그에게 회사는 싸늘하게 재취업을 거부했다. 그의 선택이 가족의 고통으로 이어진 현실 앞에 절망했다.
찻집 안 빼곡히 들어차 있는 사연 하나 하나를 더듬어 읽어가면서 남자는 분노에 떨던 마음을 조금씩 누그러뜨렸다. 그곳 어디에도 절망이라는 말은 없었기에 언제부턴가 조금씩 마음 추스르는 곳이 되어 갔다. 긴 시간 그가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가슴에 희망과 용서라는 단어를 새기고 찻집을 나서던 날. 시월상달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우리네 삶이 그렇듯 살아온 삶과, 살아갈 삶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갖은 부침을 겪는다. 그럴 때 누군가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눈길을 보내 본 적이 있는가. 그럼에도 상대에게 받을 수 없어 이내 촉촉해지고 절망으로 변하는 눈빛이 되어 본 적 있었던가. 그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전혀 다른 모양으로 다가왔다가 서로의 배면을 드러내면서 공감하거나 위로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긴 터널 끝에 하얗게 밝아지는 빛을 보고 비좁게 맺혀 있던 가슴 안쪽이 열렸다면 마음 붙일 곳 없는 세상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무인 찻집이 사랑 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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