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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0월호, 통권204호 I 지상에서 길찾기] 우리의 소원은 ‘동물의 왕국’인가요 - 정호경

신아미디어 2018. 11. 27. 18:18

진실하고 착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무서운 총·칼보다 밤낮으로 좋은 글을 가까이한 사람들입니다. 요즘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어디에서 단 한 사람인들 찾아볼 수 있을까요. 김구 선생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했지만, 나의 소원은 무엇보다 먼저 옛날 우리 조상님들의 ‘그 따뜻한 인간성과 선비정신’을 다시 찾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동물의 왕국’인가요    -    정호경


   사람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참 고단하면서도 재미있네요. 왜냐하면 많은 변화가 있으니까요. 4계절이 분명한 한국 땅에 태어난 것을 나는 무척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봄날 연못가에서 쫑알대는 개구리들, 들녘의 찔레꽃, 장독대 앞의 채송화 그리고 여름날의 노랑참외, 가을의 고추잠자리 그리고 겨울의 잘 삭은 김장김치의 그 깊은 맛 등 철 따라 우리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이 여러 가지 아름다운 변화들을 좀 보세요. 날씨가 좀 뜨거운들 무슨 상관입니까. 이만하면 우리는 살 만하지 않은가요.
   그런데 날씨가 더운 정도가 아니라 푹푹 찌네요. 고구마나 감자도 찐다고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들어온, 가장 익숙하고 실감 나는 표현은 ‘가오리를 찐다.’가 아닌가 싶네요. 가오리나 홍어의 맛은 푹 ‘찐다.’는 표현이 더욱 맛을 내니까요. ‘어린애가 방에 앉아 똥을 눈다.’보다는 ‘똥을 싼다.’는 표현이 더욱 실감이 나듯이 말입니다. 문학에서 사물에 대한 ‘적절한 표현’은 문장의 효과를 배가합니다. 각설하고, 사람을 가오리처럼 푹푹 찌는 요즘의 이 무더위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요. 우리는 밥상에 오르는 맨몸의 가오리가 아니라 사철 얇거나 두꺼운 옷을 입고 사는 사람이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래요. 얼굴이 두꺼운 사람은 마구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써버려도 아무 뒷걱정을 안 하지만, 나는 얼굴 가죽도 얇고, 심장도 약해서 수필 한 편 발표하고 나면, 남의 눈이 두려워서 걸핏하면 설사를 합니다. 이젠 나이가 들어 쓸 기력이 없어서 안 쓰기로 작정하고 나니 마음이 놓여 잃어버린 밥맛이 돌아왔습니다. 이러다가는 쌀값도 없는데, 백수百壽를 할까 또한 새로운 걱정이 생깁니다. 그러고 보니 인생은 이러나저러나 걱정의 연속이네요.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 미술시간에 쓸 크레용 한 통 살 돈이 없어서 아버지한테 말할 일이 며칠이고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쌀값 걱정이 새로 생겨 사람을 마르게 하네요.
   아무런 변화 없는 인생은 하얀 빈손일 뿐입니다. 오래 산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이지만, 의미 없는 장수長壽나 변화 없는 침체沈滯는 우리를 질식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어떤 새로운 변화를 바랍니다. 밥만 먹고 잠만 자면서 오래 산다는 것은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서 또한 삶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피곤한 호흡의 반복일 뿐입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의욕과 소망이 있는 데서 우리는 변화의 의미를 만납니다. 잠자리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계획이나 공상을 해보는 것도 일종의 변화입니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여 다른 환경이나 사람들과 만나는 것만이 반드시 삶의 변화는 아닐 것입니다.
   오늘 아침 수필 동인 몇 사람에게 미처 보내지 못한 신간 수필집을 보내려고 우체국에 가려고 했더니 ‘긴급재난문자’가 아침부터 소리를 지르며 날아 들어오네요. 오늘도 ‘폭염특보’이니 노약자는 외출을 삼가라고요. 그래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집안에 들어앉아 있어야 하니 텔레비전만이 유일한 내 친구가 되어줍니다. 어제도 오늘도 우리 농촌의 자연은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한데, 농부들의 농사가 무척 힘들어 보이네요. 모두들 걱정 없이 가족끼리 둘러앉아 묵은 김치에 보리밥이나마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사람들 사는 일이 참 어렵고 슬프네요.
   오후 여섯 시 반이 넘은 저녁 시간인데. 방금 우리 빌라의 관리사무소에서 정말 재미있는 구내방송이 들려오고 있네요. “큰 멧돼지 한 마리가 빌라 안 숲속으로 뛰어 들어와 경비원들이 엽총으로 탐색하고 있으니 주민 여러분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길 건너 바로 곁에 숲이 우거진, 아름다운 공원이 있긴 하지만, 차들이 소리를 지르며 오가고 있는 이 번잡한 도심 속의 빌라에 멧돼지가 뛰어들어왔다고 하니 나는 별안간 시골 초등학교 때 장꾼들이 북적거리는 어느 장날로 돌아간 듯한 느낌입니다. 산에서 엽총에 선불 맞은 멧돼지이거나 혹은 배고픈 멧돼지가 장꾼들이 북적이는 장바닥 속으로 정신없이 뛰어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산짐승들이 배가 몹시 고팠던 모양입니다. 이러다간 밤에 현관 앞에서 배고픈 호랑이나 물귀신을 만나지나 않을까 겁이 납니다. 나는 오늘 텔레비전에 나오는 <전설의 고향>에 들어와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무서웠습니다. 사람도 산짐승도 물귀신도 모두 배가 고픈 모양입니다. 슬프네요. 지금 우리나라의 높은 자리에 앉아 정치를 하고 있는 꾼들이시여. 이 슬프고 안타까운 현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공짜로 지하철 타는 노인인데, 개찰구에서 승차카드를 꽂으면, 톡 튀어나옵니다. 젊은 사람들은 모두 카드를 익숙하게 잘 꽂아 차를 타러 안으로 속속 이어 들어가고 있는데, 카드가 자꾸 튀어나오는 오작동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다가 나는 그만 포기하고 6번 출구로 다시 되돌아 밖으로 나갑니다. 요즘 나처럼 머리가 둔한 정년퇴직 노인들은 가을하늘처럼 맑은 3천 5백 원짜리 해장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는 변두리 공원의 벤치에서 뜨거운 볕살을 피해 하루해를 보낸, 이 가난하고 슬픈 수필가는 오늘도 재미있는 세상 구경 잘했다며, 흐뭇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갑니다.
   이런저런 산짐승들이 도심으로 떼를 지어 나오는 것은 마트에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반찬 사러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산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먹이를 찾아 온 가족을 데리고 차도를 건너다 차에 치여 뇌진탕으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꿩들도 자동찻길을 날아 앞마을로 먹을 것을 찾아 건너다 관광버스 운전대 앞 유리창에 부딪혀 박살이 나곤 합니다. 문명이 발달하면 산짐승이나 사람이나 다 잘 먹고 잘살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네요. 나이가 많은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용돈 안 준다고 목에 칼을 들이댈까 겁이 나서 깊이 잠들지 못하는 세상이 돼버렸으니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지요. 나는 최근 이사해온 분당 미금역 사거리에 있는, 나만의 영양분인 돼지갈비나 믿고 살아야 합니까. 
   나는 요즘 텔레비전에서 <동물의 왕국> 프로를 보면서 ‘사자’나 ‘호랑이’ 등의 맹수들이 닥치는 대로 다른 동물들을 뒤쫓아 가서 목을 물어 숨을 끊게 한 다음, 온 가족이 모여들어 뜯어먹는 장면을 자주 봅니다. 이들은 사나운 포식동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날마다 보는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잘 알고 있으니 사자와 호랑이 종류의 사나운 포식동물은 이 아프리카의 평화로운 평원에서 다른 동물들을 위해 멸종시켜버렸으면 하는 나만의 생각을 합니다. 이는 동물의 세계뿐입니까. 인간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서양의 표독스러운 저 독재자들 말입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괜히 열을 받아 지독한 더위를 먹어 급한 김에 얼음냉수를 한 사발 들이켜다가 얼음덩어리까지 꿀꺽 삼켜버리는 바람에 숨을 못 쉬고 소파에 누워 얼음덩어리가 녹을 때까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실하고 착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무서운 총·칼보다 밤낮으로 좋은 글을 가까이한 사람들입니다. 요즘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어디에서 단 한 사람인들 찾아볼 수 있을까요. 김구 선생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했지만, 나의 소원은 무엇보다 먼저 옛날 우리 조상님들의 ‘그 따뜻한 인간성과 선비정신’을 다시 찾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남녀 간의 동물적인 성욕 충족과 돈과 감투싸움과 결사적인 음주운전으로 난장판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다름 아닌 바로 이 ‘동물의 왕국’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