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름을 씻으려고 마신 술이 번민을 더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저런 이유로 취할 일 또한 일생에 천 번뿐이겠는가. 다만 술을 마실 핑계가 있을 때 마음을 나눌 그대가 나는 필요하다. 그러한 그대와 함께 취하고 싶다."
그대와 함께 취하리라 - 류경희
백 년 동안에 천 번은 취해야 하리
한 잔 술이 만고의 시름을 능히 씻을 것이니
돌려가며 마신 막걸리에 주흥이 도도해진 미범 선생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풀어 한시 한 수를 써 내렸다.
이미 해가 기울었지만 집으로 돌아가기가 왠지 망설여지는 오월의 저녁. 별다른 약속은 없었으나 좋은 이가 그곳에 있다는 충분한 이유로 예닐곱 명의 술꾼들이 대폿집에 모였다. 얼떨결에 부름에 응해 술자리의 한쪽을 차지하게 된 나는 왁자지껄한 시장 대폿집의 소음에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사람냄새 나는 정겨운 분위기와 금방 친숙해졌다.
옆자리의 김 선생은 이곳이 불편하지 않느냐며 스스럼없이 술자리에 어우러진 나를 오히려 걱정해 주었다. 이런 분위기가 나의 고향이라며 웃는 내 얼굴을 그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살펴보았다.
어수선하고 남루하나 한없이 편안한 이 술집을 닮은 대폿집들이 있던 거리.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그림이 바로 내 유년시절 일상의 풍경이었다.
시내의 한복판에 있던 우리 집 주위에는 무수히 많은 볼거리들이 있었다. 특히 학교 가는 길목에 작은 술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열 지어 있었는데 열 살 먹은 우리가 밀어도 자빠질 것 같은 엉성한 출입문의 유리에는 붉은 페인트로 나름대로의 차림표가 쓰여 있었다. 한글을 깨친 나와 동생은 큰 소리로 동동주, 족발, 두부찌개를 읽으며 학교를 오갔다.
처마가 낮은 함석지붕의 술집에 사는 친구들이 있어 우리는 일찍(?)부터 술집에 드나드는 경험도 했다. 언제나 코가 범벅이던 동생을 업고 다녔던 키 큰 옥자와 상고머리 도미가 생각난다. 경상도 말을 하는 도미는 똑같은 억양의 사투리를 하는 푸근한 이모와 둘이 살았는데 친구 집이라고 찾아 온 우리에게 도미 이모는 출입문 한쪽에 붙어있던 찬장을 열고 술안주로 준비했을 오이를 꺼내서 먹으라고 건네주곤 했다.
어린 눈에도 옹색해 보이는 작은 홀과 울긋불긋한 한복 치마가 벽에 매달려 있던 좁은 방 한 칸이 전부인 집안에는 항상 야릇한 냄새가 배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오랫동안 찌든 술 냄새가 아니었나 싶다.
학교가 파하면 당연히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도미네 집은 만만한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조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에야 일어나는 듯싶은 이모는 상냥하진 않았지만 조무래기들을 귀찮아하지 않아서 우리는 마음 놓고 제 집처럼 도미네 집을 드나들었다. 물론 어머니는 당신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네 대폿집에 들러 놀다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셨고 나 역시 그 친구들 말은 내비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공부 빼놓고는 못하는 것이 없었던 도미와 한없이 너그러웠던 언니 같은 옥자는 어느 날 시내에 큰 도로가 생기면서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살던 집들이 도로로 들어가 모두 헐려 친구들도 사라진 집과 같이 어디론가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고향에 나이가 들어서까지 살고 있는 나는 어릴 적 친구들이 살던 집 위를 늘 자동차를 타고 지나 다녔지만 특별히 그 아이들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친구들의 집과 너무나 닮아 있는 시장 대폿집에서 문득 잊고 있던 고향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같은 땅 같은 냇가라 해도 번쩍거리게 변한 것은 고향이 아닐지 모른다. 영악스럽게 살아오면서 그토록 떨쳐 버리려 애썼던 세련되지 못하고 어수룩한 기억들이 모두 진정한 고향임을 이제야 깨닫고 그리워하지만 이제 아름답고 천진하던 시절은 희미한 흔적으로만 안타깝게 남아 있을 뿐이다.
술잔 비우기를 재촉하는 한자리의 술친구들을 정겹게 바라보았다. 누군가 순간적인 치기에서 재래시장 가운데의 소박한 술집으로 오늘 일행을 이끌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소중한 것을 가려서 즐길 줄 아는 한마음이 있기에 기꺼이 이 자리에 모여 술잔을 나누는 것일 테니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오랜 지기로 느껴졌다.
미범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지에 쓴 한 시를 낭송했다.
백 년 동안 천 번은 취해야 하리.
한 잔 술이 만고의 시름을 능히 씻을 것이니.
멋진 노래다. 그러나 시름을 씻으려고 마신 술이 번민을 더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저런 이유로 취할 일 또한 일생에 천 번뿐이겠는가. 다만 술을 마실 핑계가 있을 때 마음을 나눌 그대가 나는 필요하다.
그러한 그대와 함께 취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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