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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1월호, 신작수필 22인선 I 제주 인디언, 김영갑 - 송명림

신아미디어 2018. 11. 1. 11:40

"지금쯤 그도 마음에서 사진을 내려놓았을까? 능선을 따라 그와 함께 걷는 길은 초원위의 남자가 딛고 선 기하학적 문양과 닮아있었다. 난 기억하리라. ‘그 섬에 한 인디언이 있었다고.’"

 

 

 

 

 

   제주 인디언, 김영갑         /    송명림

 

   두 시간째 마라도 겨울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구멍 숭숭 뚫린 제주 돌멩이가 되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채. 이 지구별에는 마치 넘실대는 검푸른 파도와 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아무리 정면돌파가 내 주된 인생 전략이라지만 세상 풍파가 머리 위로 덮쳐버려 숨이 막혀버릴 것만 같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러면 일단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당도한 후, 죽음의 문턱까지 참았다 내쉰다는 해녀의 숨비소리 마냥 긴 한숨을 토해낸다. 마라도 바로 전엔 독도였다.
   겨우 살 만해진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어졌다. 어느새 내 발길은 제주의 동쪽 표선으로 향해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동안 책으로만 만나던 그의 원본 사진들이 보고 싶어졌다. 그 인생이 궁금했었다. 첫 사진을 대하는 순간 다시 숨이 턱 막혔다. 방금 떠나온 그 바다가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설문대 할망의 번개를 맞았나싶게 아찔하더니 시공간이 얽힌 듯 아득해졌다.
   한참을 또 그렇게 있다가 표 받던 사람에게 되돌아갔다. 갤러리 관장이라 했다. 다짜고짜 그 작품을 구입하고 싶다고 했다. 내 집에도 숨구멍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헛헛한 웃음과 함께 돌아온 대답은,
   “죄송합니다. 작가님은 작품을 파신 적이 없어요. 딱 한 장만 인화하시거든요. 다행히 그 바다 작품이 저희 갤러리의 내년 달력 7월 사진으로 들어가 있으니 구입하셔서 사인이나 받아 가시죠. 마침 컨디션이 좋아 나와 계십니다.”
   “선생님이 나와 계시다고요?”
   김영갑 씨는 루게릭 환자였다. 그의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보면 얼굴에 달라붙은 파리조차 손을 들어 쫒아버릴 수 없을 때도 있을 만큼. 언제 심장 근육이 멈추게 될까하는 두려움과 매일 대면하고 살아가야 하는 무서운 병이 그를 덮친 것이다.
   갤러리 복도를 돌아가니 중간산 기슭의 아늑한 햇볕을 받으며 그가 앉아있었다. ‘인디언이 한반도에 태어났구나. 그래서 제주도에 깃들어 산 거로구나.’ 첫눈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디언들을 볼 때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그에게서 풍겨 나왔다. 침묵과 길들여지지 않는 무엇이 버무려진 느낌이랄까. 정령을 숭배하여 숲 속 과일 하나를 따 먹을 때조차 허락을 구하는 그들. 김영갑씨는 마를 대로 마른 몸이지만 당당해 보였고 다양한 색실들을 손으로 짠 원통형 모자와 긴 옷을 입고 있었다. 나 또한 인디언들의 성지인 자이언 캐년에 갔다가 구입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초원 위의 남자’라는 인디언 고유 문양이 그려진. 두 인디언.
   김영갑 씨가 나를 보았다. 천천히 다가가 바다 사진에 사인을 받았다. 힘겹게 손이 움직였지만 달필이었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편안한 침묵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고해성사 하듯 말했다.


   “저도 사진을 찍었더랬습니다. 선생님의 작품과 삶을 보며 제가 왜 사진을 내려놓았는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선생님처럼 치열하게 사진을 위해 살 자신이 없었던 거네요. 저 자신이 용서가 됩니다.” 그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실렸다. 우린 또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나에 대해 뭔가를 물으셨다. 잘 알아들을 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짐작가는 대로 정성껏 대답한 기억이 난다.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한참이 흐른 후 관장이 들어와 이제 쉬시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김영갑 씨는 좀 더 있겠다고 하셨다. 관장은 내 손에 들린 달력을 보더니 바다 사진을 구입하고 싶어 했었다고 전했다. 김영갑 씨가 관장의 귀에 대고 뭔가를 지시하는 듯했다. 관장은 눈이 동그래지더니 다시 묻고는 내게 말했다.
   “작가님이 그 작품을 원하는 대로 주라 하십니다.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작품은 다음 달 세종문화회관 전시 때 함께 가져 갈 터이니 그때 인수하세요.”
   그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청년시절 김영갑 씨는 스물여덟 살이었던 어느 날, 밥벌이로서의 사진도 사랑하던 여인도 모두 정리하고는 그의 이어도를 찾아 제주로 내려왔었다. 그 후로 20년 동안, ‘제주도’ 그리고 ‘사진’ 정말 이렇게 딱 두 단어만 인생에 남겨놓고 모두 지워냈다. 내 바다 사진도 몇 날을 웅크리고 기다리다 새벽 동트기 전 그가 이야기하는 ‘삽시간의 황홀’을 찍어 낸 것이리라. 그럴 땐 보통 먹는 것도 잊는다했다. 겨우 빈집 아궁이 옆에서 쓰러지듯 눈만 부치고는 또 다시 피사체를 찾아나서는 삶. 몸이 혹사된 건 당연하였으리. 그러던 어느 날 셔터도 누를 수 없게 만든 루게릭이 찾아왔다. 그제야 폐교에 자신과 사진의 집, 두모악을 마련하였다.
   그와 대면한 순간, 바닥에 내려놓았던 묵직한 짐. 그동안 사진을 포기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나 스스로 못 찾고 있었나보다. 약사라는 비교적 안정된 직업을 뒤로하고,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하여 전시회도 했었다. 작가보다는 이론가라 결론내린 내게 1980년대 이 땅은 척박했다. 결국 스승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나는 서양 미술사로 석사를 하나 더 받았다. 그렇게 난 사진의 세계에 푹 빠져 살았고 개척자로서의 사명감도 있었다.
   5년 만에 귀국했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던 상황은 가혹했다. 우선 예상치 못했던 사진계의 날선 경계심. 맘이 다쳤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선 초대 사진 큐레이터를 제안했지만 1년간 무급. 소위 ‘열정페이’였다. 한 전문대학에서는 사진역사를 강의하라 했지만 시간 강사료는 교통비 정도였다. 그나마 전임이 되려면 거액의 상납금이 관행이라는 주변 귀띔. 간신히 버티던 마음의 실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당시 나에게도 또 모교에 신참내기 교수가 된 남편에게도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가 딛고 선 현실은 딸아이랑 우리 세 식구가 깃들여 살 조그만 둥지의 월세 보증금조차 낼 형편이 못되었다. 두 살 된 딸은 1년 전 큰 수술을 받아 너무도 허약했다. 또한 10년 만에 귀국한 남편은 ‘왜 한국의 은행에선 신용으로 돈을 안 빌려 주냐?’ 며 은행 창구 직원과 토론만 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는 미국에서처럼 호주머니에 지폐 한 장 없이 출근했다가 낭패 보는 일이 종종 있었고 그때 마다 슬퍼했다. 전에 믿음직했던 그는 어디 갔나 싶었다. ‘돈이란 없으면 불편한 것’이라 정의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이 그제야 피부에 아프게 와 닿았다. 내가 뭔가 해야만 했다. 꿈만 먹고 살 수가 없었다.
   한편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난 제약업계에선 대한약사회를 통해 미국까지 연락을 해왔었다. 그 회사가 귀국 후 마케팅 과장을 다시 제안해왔다. 돌봐야 할 아이가 있고 출근거리가 멀다고 완곡히 거절했더니, 하루 7시간씩 주 4일 근무에 풀타임 연봉이면 어떠냐며 끈질기게 구애하였다. 넘어갔다. 급한 불만 끄고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자 했지만 삶의 물줄기는 일단 들어선 방향으로 계속 흘러갔다. 게다가 난 지칠 만큼 열심히 노까지 저어 그날에 이르렀다.
   제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문득 <김영갑 평전>이 쓰고 싶어졌다. 사진으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십년 만이었다. 김영갑 씨 작품들은 대부분 무제. 시간 날 때마다 내려가 주요 작품들에 대해 인터뷰하여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 모습을 찍어 초상사진 시리즈로 평전에 넣었으면 했다. 그가 어떤 작가였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마음 흡족하게 정리해드리고 싶었다. 후에 그가 동생처럼 여기던 중앙일보 사진전문기자 권혁재씨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야기를 들어 만나보고 싶었어요. 영갑이형은 자꾸 날더러 그 많은 작품과 필름을 정리해 달라 해요. 맘은 굴뚝같지만 난 못한다 했어요. 벌써 제주도 습기 때문에 못쓰게 된 것도 많은데…. 제주도청이 기념관을 만들자고 하지만 형은 손도 못 대게 해요, 나도 반대지만. 형은 다 불태우고 갈 거라고만 해요. 그러지도 못할 거면서.”
   하지만 굳게 먹었던 맘 같지 않게 자꾸만 제주행이 미루어졌다. 드디어 돌아오는 주말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는 김영갑 씨와 함께 할 작업구상에 푹 빠져 있었다. 아리조나 인디언 공예가에게서 구입한 ‘초원 위의 남자’가 새겨진 은 브로치도 선물로 준비했다. 그와 잘 어울릴 듯했다. 그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김영갑 씨가 돌아가셨어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목 놓아 울었다. 말 안 듣는 육신, 이제 훨훨 던져버렸으니 그 좋아하는 이어도를 마음껏 노니시겠다고,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되뇌면서. 난 그날 제주에 가지 않았다. 브로치만 보냈다. 가능하면 함께 태우던지 묻어달라고.
   한 달 후에 간 제주. 김영갑 씨가 내게 선물처럼 주고 간 바다 사진이 달력에서도 넘실대던 2005년 7월에 말이다. 유언대로 화장한 유골가루 반은 두모악 앞마당에, 나머지는 그가 가장 사랑했던 용머리 오름에 뿌려졌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나러 간 곳이다. 처음 만나던 날, 그는 오름을 모르던 나에게 용머리 오름과 아부오름을 꼭 가보라 권했다. 비행기 시간이 넉넉지 않아 아부 오름만 들렸다 왔는데 결국 이렇게 용머리 오름을 오르게 하시는구나했다.
   용머리 오름의 포근하게 들어간 굼부리. 이름대로 용이 누워 있는 듯 유려하면서도 영적인 분위기에 감싸여 있었다. 그가 깃들어 있어 더욱 그러하리라. 그의 글이 떠올랐다.


   “초원과 오름과 바다를 홀로 거닐면,
   나의 영혼과 기억 그리고 자연이 하나가 되어 나의 의식 속으로 스며든다.
   그럴 때면 훌륭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도 사라진다.”


   지금쯤 그도 마음에서 사진을 내려놓았을까? 능선을 따라 그와 함께 걷는 길은 초원위의 남자가 딛고 선 기하학적 문양과 닮아있었다. 난 기억하리라.
   ‘그 섬에 한 인디언이 있었다고.’




⁕ 송명림 님은 <일현수필문학회> 활동. 미술과 여행이 수필과 만나는 문학적 좌표를 찾아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