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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8년 08월호, 통권202호 I 사색의 창] 약장수 - 김대겸

신아미디어 2018. 10. 23. 10:15

약장수는 자주 그랬던 것처럼 “애들은 가라.”를 꺼내놓았다. 결정적 순간에는 늘 어김이 없었다. 그것을 공개할 쯤에 약장수는 애들이 위험해질 수 있으니 가야 한다고 했다. 결국 ‘애들’이었던 나는 그곳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약장수의 그 맹독이란 것은 애들이 보면 안됐던 다른 것들처럼, 밤이면 불끈 품는다는 그 전설의 맹독을 말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도깨비시장 앞을 지날 때면 그때 보지 못했던 상자 안의 것을 상상해 본다."







   약장수    -    김대겸


   도깨비시장 어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약장수를 둘러싼 구경꾼들이었다.
   텔레비전이 잘해야 건넛집에만 있던 시절, 약장수는 인기가 무척 좋았다. 그들은 아무데서나 쉽게 볼 수 없는 차력과 묘기 같은 공연을 펼쳤다. 때론 원숭이를 내보내서 재주를 부리게도 했다. 거기에 뛰어난 입담까지 빠지지 않았다. 더구나 이 모든 구경이 공짜였다. 나는 초등학교를 파하면 종종 근처에 있는 시장 쪽으로 돌아 집에 가곤 했었다. 시장 안 장난감가게 앞에서 실컷 서있다 오는 것도 좋았지만 잘만 하면 이 신기한 약장수 공연을 볼 수도 있었다. 다만 약장수가 시장에 그리 자주 오는 편은 아니었다. 한번 왔던 약장수가 다시 오는 법도 없었다. 약장수를 보는 건 운이 좋은 날이어만 했다. 그들은 종종 마술을 부리는 듯한 약을 꺼내놓았다. 만병을 통치하고 만물을 신통한다 했다. 광약은 모든 것을 새것으로 바꿔놓았고 어떤 약은 그 자리에서 아이들의 밑으로 회충이 뽑아내는 진기한 일을 벌였다. 물론 약의 효능이 무엇인지 끝내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도중에 나오는 “애들은 가라!” 때문이었다. 
   나는 겹겹이 서있는 어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맨 앞줄 땅바닥에 자리를 잡고 약장수 공연을 보았다. 이번은 다른 약장수들과는 달랐다. 묘기도 없고 원숭이도 없었다. 그저 약장수 옆에는 작은 서랍만 한 상자 하나가 수건으로 덮인 채 놓여있었을 뿐이었다.
   “자! 이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이냐? 아마존에서 살고 있는….”
   먼 외국이라면 미국만 그리던 시절, 약장수의 ‘아마존’이라는 말이 귀에 쏙들어왔다. 작은삼촌이랑 비슷한 또래의 청년 약장수는 그것이 뱀도 아니요 맹수도 아닌 아직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무시무시한 동물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상자에서 가까이 앉아있던 내 주위 사람들을 상자에서 조금 더 뒤로 물러나 앉도록 했다.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독을 가져, 물리면 3초 안에 코끼리도 죽습죠.”
   수건 사이로 상자가 조금 보였다. 상자엔 구멍들이 송송 나 있었는데 나는 무엇이 보일까 그곳을 더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수건의 그림자 탓에 구멍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약장수는 상자를 툭하고 한번 흔들었다. 그러자 “캬-앙.” 하고 무엇이 짓는 소리 비슷한 것이 상자 안에서 들렸다.   
   약장수는 그것이 살던 곳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열거했다. 그 많은 청중들의 웅성거림은 점점 조용해졌다. 마이크도 없이 하는 그의 말이 더 잘 들렸다. 
   “확인해 보고 싶다면 이쪽으로 와 상자 안에 손을 넣어 봐도 좋습니다. 대신, 뒷일은 절대 책임지지 않아요!”
   약장수는 군중을 둘러보며 신청자를 받겠다고 했다. 물론 나서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천에 깔려있는 우리나라 독사도 아니고, 또 아마존 밀림에서 어떻게 이곳까지 잡아왔단 말인가. “에이! 그런 게 어딨어?” 하고 누군가가 나설 법도 하였지만 전혀 그러질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대목은 약장수가 꾸민 고도의 계략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면 입막음의 방편이 되었을 테고 궁금증이 드는 사람라면 궁금증이 더욱 들도록 만드는 기막힌 한 수였을 테니 말이다.
   김동리의 소설 ≪화랑의 후예≫에 나오는 황 진사를 떠올린다. 그는 몰락한 양반으로 가문의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다. 하지만 살아갈 방도는 뚜렷이 없어 남에게 빌붙는 데 이골이 나있다. “곰의 쓸개, 오리의 혀, 지렁이 오줌, 쥐의 똥, 고양이 간 같은 걸로 훌륭한 약을 지어서 일만 가지 병마를 퇴치”한다고도 한다. 작가는 그런 그의 허세와 허풍을 내세워 근대 조선 양반들의 무능력한 가식을 꼬집는다. 황 진사가 한 “화랑의 후예”라는 주장 역시 ‘소똥 위에 눈 개똥’이 명약이라는 그의 주장처럼 막연하고 입증 불가능할 허황된 것일 따름이다.
   요즘, 노인들이 어떤 병원서는 치매 예방주사를 맞는다고 한다. 주사는 은행잎에서 추출한 혈액순환제로 오래 기간 복용했을 때 노인에게 인지능력을 개선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한동안 치매를 예방한다며 종종 병원에서 선전을 내걸기도 했던 약이다. 하지만 근래 여러 연구들은 그것이 단순히 치매를 예방하는 것엔 별 효과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단지 치매예방을 위해선 그를 권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노인들은 오늘도 주머니를 탈탈 털어 치매예방주사를 맞으러 간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시절 약장수가 다시 돌아와 병원에 있단 말인가?
   약장수는 자주 그랬던 것처럼 “애들은 가라.”를 꺼내놓았다. 결정적 순간에는 늘 어김이 없었다. 그것을 공개할 쯤에 약장수는 애들이 위험해질 수 있으니 가야 한다고 했다. 결국 ‘애들’이었던 나는 그곳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약장수의 그 맹독이란 것은 애들이 보면 안됐던 다른 것들처럼, 밤이면 불끈 품는다는 그 전설의 맹독을 말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도깨비시장 앞을 지날 때면 그때 보지 못했던 상자 안의 것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