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떤 그릇을 닦으며 마음을 담아 왔는가? 잘 살아왔다고 생각되지만 아쉬움도 많다. 내가 이 놋그릇을 두고 떠날 때 삶의 자국을 고스란히 담아두고 싶다."
놋그릇 애가哀歌 - 이홍선
청색과 홍색의 금사 양단 겹보자기를 풀어 한지 상자를 열었다. 밥그릇과 국그릇은 연꽃 모양의 주머니에, 찬기들은 전통문양의 고운 한지로 싸고 띠지를 붙인 후 지끈으로 묶였다. 묶인 끝은 네 잎의 꽃잎으로 펼쳐져 있다. 그릇마다 다른 색깔로 포장되어 담겨 있는 상자 안은 울긋불긋 꽃밭이다. 포장이 야단스럽기는 하지만, 딸을 시집보내는 엄마의 정성을 고스란히 느낀다. 예쁜 포장을 풀기가 아까워 미리 사진부터 찍었다. 연꽃 모양의 주머니를 열었다. 합식기 안에는 찹쌀을 담은 청색 주머니가, 옥식기 안에는 팥을 담은 홍색 주머니가 넣어져 있다. 찬기들도 하나씩 조심스레 포장을 벗겨서 식탁 위에 놓았다. 칠첩 유기반상기다. 은은한 금빛 광택이 주방에 흐른다.
명절이 다가오면 놋그릇 닦는 일이 엄마의 큰일 중의 하나였다. 맏딸인 내게 동네 골목에 버려진 기왓장을 찾아오라고 했다. 기와가 귀했던 시절이다. 아낙네가 골목에 서성이며 마을 어른을 만나는 일이 조심스럽다며 나서지 않으려 했다.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그 말을 따르지 못했고, 기와 조각 찾는 일도 엄마 몫이 되곤 했다.
엄마는 미리 기와를 잘게 부수어 부드러운 가루로 만들어 둔다. 헛간에 널찍하게 가마니를 깐다. 놋그릇과 제기를 가마니 한쪽에 수북하게 쌓아놓고 기와 가루를 옆에 두면 닦을 준비가 끝난다. 뭉친 지푸라기에 기와 가루를 묻혀 녹청이 없어질 때까지 닦았다. 깨끗한 짚으로 한 번 더 윤이 반질반질 날 때까지 문질렀다. 그 일은 어둑어둑해질 때 겨우 끝이 났다. 엄마가 작은 종지를 닦아 보라고 했다. 이내 팔이 아파 와 하나도 제대로 못했다. 놋그릇을 쓰지 않게 되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라며, 엄마가 그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만 했다.
시댁에서는 일 년에 여덟 번의 기제사를 지낸다. 맏며느리인 내겐 버거운 일이었다. 4대 봉제사를 해야 하는 명절에는 그릇이 부족했다. 놋그릇 닦을 자신이 없던 나는 늘 힘들어 하다가 슬쩍 꾀를 내어보았다. 시어머님에게 낡은 목기와 제기를 새것으로 바꾸자고 했다. 이참에 편리함을 이유로 대고 밥과 국그릇을 스테인리스 그릇으로 여러 벌 사버렸다. 반대하실 줄 알았는데 은근히 반기는 표정이었다. 어쩌지 못해 온 당신의 뜻도 이미 같았으면서도 짐짓 내 속내를 재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었다. 새 그릇으로 차린 제사상은 그런대로 모양새가 났다.
퇴직 후의 여유로움으로 눈썰미가 바뀐 것일까. 제사를 지낼 때마다 스테인리스 그릇이 왠지 목기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유기반상기를 보는 순간, 밥그릇과 국그릇은 기품 있는 유기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금빛 놋그릇에 고봉밥을 담고 윤기 나는 접시에 푸짐하게 차린 친정엄마의 제사상은 언제나 품위가 있었다.
친정 부엌의 찬탁 위에는 검게 녹슨 놋그릇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그것이 보이지 않아 궁금했지만, 올케에게 물어보지는 못했다. 변색이 되고 닦기가 번거롭다는 이유로 챙겨놓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후회가 된다.
이제야 놋그릇 닦는 엄마의 마음을 살며시 짚는다. 그릇을 닦으며 고된 살림에 흩어지려는 당신의 마음을 닦아 담고, 집안에 복을 불러 담았던 건 아닐까. 녹 벗기는 일을 한 번이라도 따라 해보지 못한 것이 아파 온다. 마음 닦는 법도 더 일찍 익혀 보다 큰 그릇으로 지혜롭게 살 수 있었을 터인데.
뚜껑을 닫고 숟가락까지 놓으니 반상기라기보다 예술품이다. 황금빛 그릇은 은은하면서도 묵직한 빛을 낸다. 우아한 드레스 입은 며느리의 모습과도 같다. 이 아이는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놋그릇을 닦듯 마음을 닦아 지혜롭게 복을 담아 살기를 바라본다.
난 어떤 그릇을 닦으며 마음을 담아 왔는가? 잘 살아왔다고 생각되지만 아쉬움도 많다. 내가 이 놋그릇을 두고 떠날 때 삶의 자국을 고스란히 담아두고 싶다.
이홍선 ---------------------------------------------
대구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졸업(문학석사), 대구수필문예대학 수료, 대구수필문예회 회원, (전)칠곡군청 안전행정과장.
당선소감
가을 길목 햇살이 눈부신 날, 표표한 바람을 타고 기쁜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여고 2학년 때 한 권의 문집을 만들면서 글을 쓰는 게 꿈이 되었습니다. 바쁜 직장생활로 오랫동안 글과 담을 쌓고 살았지만 마음 한켠이 늘 허전했습니다. 언젠가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수필을 만나 내 안에서 꿈틀거리던 그 꿈을 이루게 되어 진정 행복합니다.
아직은 한없이 부족하고 두렵지만 공직생활을 마치고 덩그러니 맞이한 낯선 시간을 글 쓰는 일로 채워보려 합니다. ≪수필과비평≫, 더 큰 글의 바다에 몸을 싣게 된 영광을 안고 잠을 설칩니다. 지난 삶과 펼쳐질 새 삶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담아내며 누군가의 가슴에 위로가 되어줄 따뜻한 글 쓰고 싶습니다.
글을 안고 갈등하는 저에게 힘을 북돋아 주신 지도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함께 공부한 문우님들께도 따뜻한 고마움 전합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 참으로 고맙습니다. 곁에서 항상 응원해 준 남편과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아이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과비평 2018년 11월호, 제205호 신인상 수상작] 아버지의 문패 - 권경수 (0) | 2018.11.07 |
---|---|
[수필과비평 2018년 10월호, 제204호 신인상 수상작] 비둘기가 이소한 날 - 조계선 (0) | 2018.10.06 |
[수필과비평 2018년 10월호, 제204호 신인상 수상작] 반지와 과메기 - 서성수 (0) | 2018.10.06 |
[수필과비평 2018년 9월호, 제203호 신인상 수상작] 가지치기 - 함무성 (0) | 2018.09.10 |
[수필과비평 2018년 9월호, 제203호 신인상 수상작] 담쟁이넝쿨 - 이치운 (0) | 2018.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