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03세를 맞으신 어머니는 모든 삶의 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셨다. 하루 중 이십여 시간을 주무시면서도 누군가 오면 눈 뜨고 웃어주며 손잡아 주시는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실까. 깊은 잠 속에서 엄마의 소녀시절을 그리워할까. 늘 가슴에 품고 사는 자식들, 예쁜 손주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실까. 어머니의 모습에 내 모습이 오버랩 되며 내 딸의 가슴에서도 나의 흰 머리칼이 반짝이는 듯하다. 나는 봄 햇살을 받으며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를 흥얼거린다. 또 한 번의 봄이 찾아온 것이다."
산다는 것은 - 신정호
따스한 봄볕을 느끼며 한 걸음 내딛는데 내 가슴팍에서 반짝 빛나는 게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 하나. 아, 조금 전 병실에서 어머니를 가슴에 안았을 때 한 오라기가 붙었었나 보다. 마치 어머니와 나의 인연의 끈인 것 같아 쉽게 후~ 불어 날려 보내질 못하겠다.
몇 달째 고비를 넘기며 버티시면서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 것을 보면 삶은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이 결코 아닌가 보다. 머지않아 내게도 다가올 순간들이 작은 두려움과 함께 파고든다.
얼마 전 친구들과의 모임에 모 제약회사 직원이 건강보조식품을 들고 와서 장황하게 설명을 했다. 요즘 손이 저리거나 눈이 파르르 떨리고 사물이 침침하게 보이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느냐고. 이런 전조 증상들을 무시해 버리면 언젠가는 뇌혈관이 막혀 뇌경색이 오고, 터지면 뇌출혈이 되어 반신 마비나 언어장애가 올 수 있다고. 마침 요즘 들어 내게 나타나는 증상이기에 귀를 쫑긋하고 들었다. 그는 들고 있던 약 한 알을 쪼개어 스티로폼 조각에 그 액체를 떨어뜨리니 얼마 안 되어 구멍이 뻥 뚫렸다. 즉, 그렇게 우리 혈관에 막힌 통로를 깨끗이 뚫어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신청을 했다. 물론 약국에서 구입하는 것보다 훨씬 싸고, 다른 몇 가지 의약품도 서비스로 준다는 말에.
집에 와서 약상자를 열어보니 그동안 선물 받았던 종합 비타민이며 칼슘, 오메가3 등이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가득했다. 나는 내 건강에 자신이 있어서 한 번도 건강보조제를 산 적이 없었고, 있어도 먹지를 않았었다. ‘에고~ 있는 것이나 착실히 먹을 걸.’ 하고 후회해봐야 이미 늦었다. 설명한 대로 혈관이 깨끗해지길 기대하며 이것부터라도 신경 써서 먹어 봐야지.
늙어감이 어찌 몸뿐이겠는가. 정신적으로 외롭고, 때론 노엽고, 서럽고, 힘들 때가 많아진다. 게다가 지인들로부터 온 청첩장이 쌓이던 자리에 이젠 부고訃告가 앉아있다. 요즘은 자식들이 결혼하면 대부분 분가를 해서 집에는 두 노인만 썰렁하게 지내는 집이 많다. 나 역시 둘이만 남아 사랑보다는 쌓인 정으로 사는 생활이 되다 보니 매사가 무덤덤해진다. 우스갯소리로 이 나이에 두근두근 설레는 건 심장병이라나?
우리 선조들이 3대, 4대가 한 울타리 안에 살면서, 자식들은 아침저녁 부모님의 잠자리를 살피며 요 밑에 손 넣어보고 문안 인사를 드리고, 손주들 재롱으로 온 집안이 떠들썩했다던 그 옛날이 부럽다.
우리의 현실은 명절이나 생일에 자식들 얼굴을 잠깐 보거나, 간간이 전화나 휴대폰 동영상으로 손주들과 나누는 몇 마디 안부만으로 만족해야 하고 그것도 감사하며 지낸다. 그 정도면 도리를 다한다는 젊은 세대와, 그래도 더 많이 배려해주고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우리 세대의 관점은 좁혀지질 않는데,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어렵다. 시대가 바뀌면서 핵가족화 되어 분가를 하게 되니 조부모는 자연 아웃사이더가 되고 말았다. 나도 자식들과 한 울타리 안에서 살고 싶었던 희망이 힘도 못 써보고 깨지고, 각자 다른 삶의 터전을 잡았다. 나는 가끔 이웃사촌만도 못하다는 푸념이 절로 나온다. 저물 녘 빈집에 들어설 때면 오래전 통통거리며 달려와 안기던 녀석들이 그리워지는 마음을, 내 나이가 되어야 알 수 있으리라.
‘엄마도 소녀일 때가/ 엄마도 나만 할 때가/ 엄마도 아리따웠던 때가 있었겠지….’라는 노랫말처럼 애틋한 시절을 보내고 인생을 마무리하는 단계까지 오게 되었다. 속절없이 지내온 젊은 날이 어제인 양 또렷한데 언제 이리 빨리 세월이 흘렀는지 아쉽기만 하다. 주위에서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게 아직은 어색하고, 지하철이나 고궁 등에서 경로우대를 받는 것도 썩 유쾌하진 않다.
올해 103세를 맞으신 어머니는 모든 삶의 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셨다. 하루 중 이십여 시간을 주무시면서도 누군가 오면 눈 뜨고 웃어주며 손잡아 주시는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실까. 깊은 잠 속에서 엄마의 소녀시절을 그리워할까. 늘 가슴에 품고 사는 자식들, 예쁜 손주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실까. 어머니의 모습에 내 모습이 오버랩 되며 내 딸의 가슴에서도 나의 흰 머리칼이 반짝이는 듯하다.
나는 봄 햇살을 받으며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를 흥얼거린다. 또 한 번의 봄이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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