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작

[수필과비평 2018년 7월호, 제201호 신인상 수상작] 그리고, 나의 길 - 양순례

신아미디어 2018. 7. 3. 11:07

"추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처럼 부대끼던 시간도 새롭게 채워지리라. 엮어진 진실이 엉키고 모래성이 될지라도 인연은 소중하다. 한걸음 비켜서서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 웃고 놀다 해 지면 바래다주면서. 꿈속에서 만나는 엄마 대신, 현실에서 마주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 풀꽃처럼. 미움이 미움을 미워할 때까지."





   그리고, 나의 길   -   양순례


   아들이 어미의 재혼 얘기를 슬그머니 입에 담는다. 나를 위한 말임은 알면서도 왠지 서운하다. 늙은 어미가 걱정이 되는 것일까. 자식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되지. 이불 속에서 뭉그적대던 몸을 일으켜 외출 차림으로 대문 밖을 나선다. 춥다. 이런 날은 손가방도 귀찮다. 골목길 눈 위에 발자국이 무수히 찍혔다. 저 발자국들의 주인은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나갔을까. 주인 잃은 발자국에 발자국을 포개며 어수선한 상념에 잠긴다.
   내가 맡은 대상은 지적장애자다. 보호자의 동생이 힘에 부쳐서 나를 불렀다. 전혀 예기치 못한 장애인의 내면세계와 마주하면서 당혹에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기본적인 생활도 혼자서는 어렵고, 가족이 돌보기에는 버거운 존재. 이런 장애자의 육신과 정신은 고요할 때가 드물다. 말썽을 일으키고, 잘못된 말 전달로 서로간의 의가 상하게도 하여 늘 긴장해야 한다.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요양사와 보호자가 모두 병이 났다. 요양사는 늘 속이 더부룩하고, 보호자는 끊임없이 머리가 아팠다. 검사를 받아 보았지만 모두가 신경성이다. 한숨이 겨울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졌다. 한 치 걸러 두 치라고 보호자는 아내의 눈치를 살핀다. 동생은 늘 형이 마음에 걸린다. 수시로 전화하고 직장생활 중에도 짬짬이 시간 내서 형한테 들른다. 그때마다 형은 알아듣기 힘들어 짜증나고, 동생은 답답해서 언성이 높아진다. 고민이 깊어졌다. 홀로 사는 큰형님한테 보내기도 그렇고, 재가 요양만으로는 더 이상 버텨내기가 버겁다. 보호자 아내는 서두른다. 소중한 내 남편이 장애 시아주버니 때문에 지레 죽겠다며 백방으로 시설을 알아본다. 하지만 시설에 가는 것도 쉽지 않다. 가족학대로 인한 살인사건이 발생하다보니, 법인시설 입소가 까다롭다. 아직 연로한 노인도, 그렇다고 중증장애도 아니니 더더욱 어렵다. 오늘도 보호자는 나를 붙들고 매달린다.
   “요양사님의 처분만 기다리겠습니다.”
   보호자의 체념어린 말에 나는 마음이 편치 않다. 어머니의 유언도 저버리고 사설기관에라도 보내야 할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는 보호자의 말이 자꾸만 내 뇌리에 스친다.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이 생각난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폐증 아들과 사는 엄마는 끝없는 관심으로 우연찮게 아들의 ‘서번트 증후군’을 발견한다. 엄마의 사랑 속에서 아들은 피아니스트로 크게 성장한다. 중병을 앓는 엄마는 편히 눈을 감는다. 장애아들은 하고 싶은 피아노를 마음껏 칠 수 있게 되었고, 엄마는 아들의 길을 지켜보게 되었으니 이들에게는 세상을 얻은 거나 매일반이다. 바로 그것만이 내 세상이다. 장애인에게 사랑은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영화였다.
   요양사 일을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 처음 면접 때였다. 왜 요양사를 택했냐는 물음에 나는 솔직히 내 꿈을 실토했다. 젊어서는 자식들 뒷바라지에 바빴고, 이제부터는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노약자 보살피는 일을 하고 싶다고.
   그런 내가 지금 갈등이다. ‘아픈 동생 하나 있다 생각하고 보살펴 주십사’던 보호자의 간절한 부탁이 귀에서 맴돈다. 엄마의 마음으로 돌보겠다던 처음 다짐은 지금 이 순간 흔들리고 있다. 모자라는 보호자의 손길까지 해결하겠다던 욕심이 과했던가.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요양사는 매사 소통이 어려운 장애자의 몸짓과 언어를 알아듣고 이들의 아픔을 해결해 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니던가. 장애자가 화를 내든, 심통을 부리든, 억지를 부리든 그것은 그의 의사 표현이다. 그는 제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세상이 야속할 뿐이다. 그의 속 터지는 심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나의 모자람이다. 꾸밈없이 진솔하게 표현하는 그들의 언어를 내 사고로 해독하려는 것은 내 불찰이다. 내 머릿속에는 그가 장애인이지만, 그의 마음에서는 내가 장애인일지 모른다. 자기의 요구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불통의 장애인은 나일 것이다.
   지난밤에 이래저래 밤새 뒤척였다. 어둠이 물러가자 케어를 다시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한결 편안해졌다. 언젠가는 시설에 보내기 싫어도 가야 하는 날이 올 터인데 서두를 일은 아니다.
   “우리 기도하며 새롭게 시작해 봐요.”
   보호자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하마터면 후회로 남을 뻔했다. 철없는 장애자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런 사람을 누가 미워하고 탓한단 말인가. 장애는 죄도 아닌데. 더 이상 변화는 기대하지 말자. 내 기준을 벗어나야 한다. 측은지심에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장애자와의 소통이 헝클어지는 사이 새해가 시작되었다. 눈 덮인 천지가 고요하다. 이제 내 마음도 조용히 내려놓고 다시 일어서야겠다. 지적장애에 관한 서적을 뒤적인다. 내 눈높이도 최대한 낮춘다. 신경과, 정신의학과 선생님과의 상담도 길어진다. 오십은 떼어내고 철저히 여섯 살짜리하고만 놀아야 한다. 방바닥에 엎디어 엉덩이 쑥 빼고 새를 그릴 때는 퍽 진지하다. 어깨를 토닥이며 잘 그린다고 칭찬해 준다. 분위기 깨는 발언을 해도 엇박자 내지 않는다. 어설프게 머리감고 빗질할 때도 엄지손가락 치켜 올려 준다. 우쭐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노래 부를 때도 곡조가 틀리면 어떠랴, 부르는 사람이 즐거우면 그만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처럼 부대끼던 시간도 새롭게 채워지리라. 엮어진 진실이 엉키고 모래성이 될지라도 인연은 소중하다. 한걸음 비켜서서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 웃고 놀다 해 지면 바래다주면서. 꿈속에서 만나는 엄마 대신, 현실에서 마주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 풀꽃처럼. 미움이 미움을 미워할 때까지.

  


 

양순례  ---------------------------------------------
   방송통신고등학교 졸업, 대전문학관 수필창작반 수료, 대전시민대학 수필창작반 수료 ‘에세이 대전’ 회원.

 



당선소감


   글쓰기를 배우면서 산다는 게 뭔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전에는 그냥 주어진 삶이라며 살았고, 꿈같은 건 꾸지도 못 하였습니다. 아니 꿀 수도 없었습니다. 늘 안개비를 맞으며 걷는 것이 내가 가는 길인 줄만 알았습니다.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나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운 좋게 글쓰기를 배우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된 요양사 일을 하면서도 글을 쓰고 있었기에 즐거웠습니다. 지금 내가 행복한 이유입니다. 모두 문학의 덕입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나머지 삶은 아름답게 흔들리고 싶습니다. 수상소감을 쓰려니 왠지 가슴이 떨리고 설레는 마음을 추스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내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은 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늘 제게 힘을 주시는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 열심히 노력하라고 뽑아주신 줄로 압니다. 이 기쁨을 ‘에세이 대전’ 문우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