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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5월호, 통권199호 I 세상 마주보기] 썰물의 노래, 모항 - 고해자

신아미디어 2018. 6. 20. 08:28

"유독 여행을 즐겨하던 친구가 꽃샘바람에 나선 길일까. 초등동창 모임에서 산티아고로 여행 가자는 친구는 2년 만기통장은 이미 꾸려졌지만 정작 본인은 세상을 뜬 뒤다. 어룽거리는 별 하나, 아직도 미뤄둔 숙제 같은 여행길이 남아서인지 웅덩이로 함초롬히 얼굴 내민 친구도 물주름을 밝힌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숙원이던 여행의 길목처럼 봄 마중 길의 재회다. 물길이 내어주던 눌변 같은 비움에 경계를 지우자, 2월 끝자락에 그리움이 깃든다."







   썰물의 노래, 모항    -    고해자

   아이처럼 구르던 시간이었다. 전북 부안군 변산면 모항리, 모항해수욕장을 낀 큰 바위 위의 숙소. 가방을 내려놓자 창밖 해변으로 빼앗긴 다섯 명의 룸메이트가 막간이 아깝다며 이구동성으로 나가자고 한다. 인적 없는 해수욕장을 독차지할 요량인지 아이처럼 ‘어른아이들’의 발걸음이 바빠진다. 나이들은 어디에 묶어두고 왔는지 달음박질할 태세다. <The Girl from Ipanema>란 보사노바 곡의 통통 튕기는 멜로디가 흐르자 콧노래가 새어나온다. 마치 이 곡의 주인공인 양 이파네마 해변을 가로지르던 소녀처럼 자신들을 한껏 토닥인다. 일행이 아니랄까, 포즈를 취하는 족족 연거푸 셔터를 눌러댄다.
   어느새 잔물결이 오가느라 살랑이던 모래사장도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부지런히 수위를 조율한다. 조용하던 백사장이 넓어지는 만큼 오가는 목소리에 힘이 실려 주객이 전도되는 느낌이다. 모래톱이 생겨날 때마다 이들의 배꼽인사는 마치 환영 의식 같다.
   제법 물이 빠지자 해수와 연결된 가느다란 쇠파이프가 눈에 띈다. 백사장을 가로지른 또 다른 길이다. 보이는 만큼이라도 양끝 지점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모래사장 위의 모래성처럼 가건물을 짓고 사는 조개들의 동네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파이프 하나에 기대선, 사방은 단층으로 수평인데다 널따랗고 길쭉하다. 가로 세로의 비율까지 잰 듯한 대단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좀체 헤아릴 수도 없는, 하얀색의 패류 한 종 모두가 되레 까치발을 드는 모양새다. 하나같이 보석처럼 어여쁜 뭇별, 거대한 일가로 한솥밥을 나누는 속살을 본다. 거주 평수이나 몸집 또한 모두 고만고만한데 대운하를 이루고도 한 가족처럼 꼭 잡은 손을 놓지 못하는 듯해 애틋한 이유다.
   그들의 기다란 행렬은 마치 어릴 적 보던 까만 밤하늘에 수놓던 은하수를 떠올리고 추억하게 한다. 통일된 복장에 동글동글한 중심으로 천장조차 거둔 이들의 거처, 그 가운데로 뾰족한 돌기를 두어 숨소리 또한 맞출 듯한 그들의 연대의식에 놀란다.
   그새 훌쩍 넓어진 백사장의 반경에 발길이 분주해진다. 팔각정 아래의 큰 바위 둘레로 다가서자 눈길을 의심할 지경이다. 너른 바위를 꽉 메운 또 다른 세상, 한 점 빈틈이 없다. 굴과 홍합 등 눈에 익은 것들도 끼어 있어 정감이 더 간다. 드문드문 빈집들의 무리가 돋보인다. 대문도 활짝 열어두어 누군가가 세 들어오길 기다리는 눈치다. 게다가 누군가와 나눈 따뜻한 밥상의 향기까지 오래도록 감돈다. 어깨를 나란히 하여 커다란 바위를 의지처로 삼은 온갖 생명체들의 결속이 굳건해 보인다. 다양한 조개의 무리는 큰 바위의 거대한 버팀목이자 멋진 외출복으로 제공될 만큼 깃드는 어울림을 엿본다. 어떤 무대의 인위적 연출과는 비교 안 될 만큼 낯빛부터 유다른 종류의 다양성만큼이나 모든 경계를 허문다. 흡사 우리의 다문화를 보는 듯하고 이들의 어떤 콜라보까지 상상해보게 된다. 다툼이 없는 세상,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주는 소통의 행보에 방점을 찍게 된다.
   모항해수욕장, 계절을 넘나드는 훈풍의 읊조림에 노래와 시가 일어설 듯하고 예상 밖 이면에 눈 맞추느라 숨이 찬다. 제주 섬사람조차 반할 지경이니 누구와의 동행에도 오감만족에 입 다물지 못할 공간이다.
   몇 해 전 떠들썩했던 서해안 기름 유출 사고 시, 애끓던 그 이웃의 한 자락쯤일 테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찾아들어 시커먼 기름기를 거둬내고, 닦아내던 손길들도 연상케 한다. 이곳도 자연을 지키려던 그 노고의 연장선상의 걸작선인지도 모른다.
   잠시 시간을 잊자 널따란 백사장에 자잘한 빈 조개껍데기 무리가 반짝인다. 수많은 모래 위로 유독 부챗살을 펼쳐, 세 개의 붉은 반원을 새겨놓은 꽤 큰 조개껍데기 한쪽이 눈길을 잡아끈다. 그 가까이로 움푹 파여 있는 자리에 물 빠지다 생긴 모래거울이 살랑인다. 웅덩이 곁으로 가까이 앉자 실바람에 누군가가 살풋 얼비친다. 유독 여행을 즐겨하던 친구가 꽃샘바람에 나선 길일까. 초등동창 모임에서 산티아고로 여행 가자는 친구는 2년 만기통장은 이미 꾸려졌지만 정작 본인은 세상을 뜬 뒤다. 어룽거리는 별 하나, 아직도 미뤄둔 숙제 같은 여행길이 남아서인지 웅덩이로 함초롬히 얼굴 내민 친구도 물주름을 밝힌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숙원이던 여행의 길목처럼 봄 마중 길의 재회다.
   물길이 내어주던 눌변 같은 비움에 경계를 지우자, 2월 끝자락에 그리움이 깃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