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의 이번 여행은 의외로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개화기에 일찍 문명의 혜택을 받은 그는 중요한 가치를 위해 그동안 이룩한 많은 재물과 명예 등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목숨까지 내놓았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의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백 년 전 그가 뚜벅뚜벅 걸어와 내 앞에 선다."
최재형, 연해주의 선각자 - 김행숙
몇 달 전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에 가서 1900년 전후 그곳에 살았던 최재형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를 잘 모른 채 살아왔다는 것이 의아해져서 어리둥절했다. 낯선 이름의 그는 1860년 노비의 아들로 함경도에서 태어나 9세에 흉년이 들어 연해주의 지신허로 이주하게 된다. 11세에 가출하여 부두에 쓰러져 있는 것을 러시아 선장 부부가 가엾게 여겨 데려다가 친아들같이 키웠다고 한다. 양부모와 함께 상선 선원이 되어 세계를 다니며 문물을 넓혔다. 러시아어, 문학, 역사, 과학 등 서양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아무도 듣지 못했던 바이런, 실러. 푸시킨 등의 책을 읽었다. 선장 부부에게서 기계 다루는 법과 악기 연주하는 법 등 많은 것을 배웠다.
당시 그는 한인들 중 러시아어가 능통하고 높은 식견을 갖추게 되었으며 일찍이 장사에 눈뜨게 되어 많은 돈을 벌었다. 청년 때는 러시아 군대의 통역으로 일하며 군 관계에 폭 넓은 인맥을 형성하게 된다.
러일전쟁 후 국민회를 조직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폐간되었던 대동공보를 재발행하고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 러시아와 한인사회를 잇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는 교포를 위해 계속 장학사업도 했다. 당시 연해주에 사는 교포들에게 그는 등불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최 페치카라고 부르며 그의 사진을 집집마다 걸어놓고 존경하였다고 한다. 그는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가였다. 상해 임시정부가 그를 재정 총장으로 추대하였다. 러시아와의 국교가 정상화되자 뒤늦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성공의 비결은 유창한 러시아어였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한인의 노동력, 사업수완, 황금알을 낳는 군납품, 누구든 동등하게 대하는 그의 인품이라고 할 수 있다.
최재형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가 조선의 특사 민영환, 박영효를 만나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 그 이후 독립투사들 뒷바라지와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하고 러시아 전역에 대동공보를 통하여 일본의 만행을 세상에 알렸다.
안중근이 큰 뜻을 품고 그를 찾아왔을 때 그의 집에 머무르게 하고 거사를 준비하게 했다. 사격 연습할 곳을 구해 주었으며 하얼빈까지 가는 여비도 마련해 주었다. 거사에 쓸 8연발 부라우닝식 권총도 건넸다. 최재형은 러시아 변호사를 준비시켰으나 일본은 러시아인 변호사의 접견을 금지한다.
이듬해 안중근이 처형당한 후에 최재형은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안 의사의 부인과 자녀들이 최재형을 찾아왔을 때 그는 그들을 따듯이 돌봐주었다. 그는 러시아 군인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항일 의병을 도와 일본군 격파에 열심이었고 이 사건이 러시아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일본군의 압박이 심해지자 그도 신변에 위험을 느끼게 된다.
일행은 말년에 그가 살았던 고택을 방문했다. 집 중앙 벽에 태극기와 러시아 기가 그려진 동판에 ‘친로 한족 중앙총회 명예회장 최재형 선생이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하였던 집’이라고 쓴 표지판이 벽에 붙어 있었다. 집을 지은 지 100년쯤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외관이 깨끗했다.
유택은 공사 중이었다. 이 집은 개인에게 팔렸다가 다시 우리 정부에서 구입하여 집 안쪽으로 전시관을 만들고 있는데 관람하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성금을 모으고 있었다. 성금이 잘 안 걷히는지 공사는 지지부진해 보였다.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 (러시아 이름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 한 몸의 안일만 구했다면 그는 러시아에서 신망을 얻어 한인자치 기관장인 도헌으로 추대된 만큼 일생을 편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네 자녀를 비롯한, 사랑하는 가족들과 교포사업가인 그를 태양처럼 따르는 수많은 한인들이 있다. 그는 사업가였지만 고아원, 학교, 빈민 도와주기에 크게 기부하는 등 공공의 선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모범적 자치 기관장으로 초대를 받아 갈 때 사재를 털어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참석한 것도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닐까. 한인들에게 언제나 형제 같은 정으로 대했다고 한다.
연해주의 이번 여행은 의외로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개화기에 일찍 문명의 혜택을 받은 그는 중요한 가치를 위해 그동안 이룩한 많은 재물과 명예 등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목숨까지 내놓았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의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백 년 전 그가 뚜벅뚜벅 걸어와 내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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