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르는, 나를 모르는 이들로 가득 찬 1호선 전철 안. 사람들의 사연이야 각양각색이겠지만 그들은 ‘약속시간을 지켜준다.’는 ‘편리하고 안전한 교통수단’을 이용 중이다. 스마트폰으로 오락을 하거나 뉴스를 보거나 웹툰을 본다. 영화나 드라마를 즐긴다.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꼼꼼히 살핀다. 운전할 때는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이다. ‘다음 정차 역은 종로3가’라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내릴 차비를 서두른다. 손에 든 돋보기를 케이스에 담고 읽지도 않은 책을 덮어 다시 가방에 집어넣는다. 시계를 본다. 약속 시간까지는 30분쯤 여유가 있다."
전철 안 풍경 - 한복용
서울 종로에 있는 잡지사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전철을 탄다. 집에서 의정부중앙경전철역까지는 걸어서 5분여, 회룡에서 환승하여 1호선으로 갈아탈 참이다.
승용차를 없애고 처음 전철을 타야 했을 때 참으로 막막했다. 요금은 물론 이용하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가까운 거리도 차로 이동했던 때문이었다. 나중에야 교통카드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환승할 줄 몰라 요금을 이중 지불한 적도 있다. 환승역 이용 방법은 한 달쯤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회룡역은 의정부 다음역이니 대개는 목적지까지 앉아 간다. 가방을 뒤져 책을 꺼낸다. 전철 안에서의 독서는 긴 시간의 무료함을 달래준다. 추운 날씨에 따뜻한 의자에 앉아 하는 독서,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색다른 경험이다. 휑하던 전철 안은 이동할수록 사람들과 그들의 수다로 채워진다. 가끔 잡상인들도 오간다. 책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살핀다. 도봉산역에 다다르자 나의 오른쪽에 앉았던 남성이 일어선다. 앞에 서 있었던 아저씨가 앉으려는 순간 아주머니 한 분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와 아무렇게나 그 자리에 구겨 앉는다. 아저씨는 빈자리를 기다린 보람도 없이 아주머니에게 자리를 빼앗긴다.
그녀가 바삐 앉으면서 핸드백으로 나를 친다. 하지만 자신의 무례를 알아채지 못하는 듯하다. 놀란 내가 신경질적으로 바라본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 앉기가 무섭게 핸드백에서 전화기를 꺼내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주머니를 번갈아 찔러보고 자리가 불편한지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세를 연신 바로잡는다. 부산스럽다.
창동역에서 문이 닫힐 무렵, 왼쪽에 앉았던 아저씨가 바삐 일어나 달려 나간다. 하마터면 닫히는 문에 그가 끼일 뻔했다. 그 자리에 대학생인 듯한 청년이 앉는다. 퀴퀴한 냄새가 풍긴다. 난방을 하고 있는 전철 안에서 그가 풍기는 냄새는 역겹다. 머리를 감지 않았을까, 악취에 가깝다. 나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후 숨을 얕게 내쉰다. 그는 계속 꼼지락거린다. 다리를 떤다. 그의 움직임이 거슬린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냄새는 더욱 강하게 풍긴다. 그가 가방에서 종이뭉치를 꺼내든다. ‘마케팅믹스관리’란 제목의 인쇄물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두꺼운 안경을 쓴 앳된 얼굴이다. 멋쩍다. 얼굴을 돌릴 때쯤 그의 전화기가 울린다. 친구인가 보다. 그는 가방 위에 펼쳐놓은 종이를 한 손으로 누르고 통화에 열중이다.
“나 공부해야 해. 봐도 봐도 모르겠어. 한 장 외우고 넘기면 앞에 것이 다 지워져버려. 미치겠다.”
나도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이 난다. 이 젊은이나 나나 기억이 지워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보고 또 봐서 내 것이 되어버린 줄 알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비웃으며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는 기억. 나는 수없이 많은 시간을 그 일로 실망하곤 했다.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읽고 또 읽는다. 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것조차 목적한 일이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다. 일명 ‘벼락치기’의 특성이다. 평소에 차근차근 쌓아두지 않은 잘못이다.
예닐곱 정거장쯤 지나 통화를 마친 남학생은 가방에서 다른 인쇄물을 꺼내들고 한숨만 푹푹 내쉰다. 아들뻘 되는 학생, 간밤에 잠을 설쳤는지 안색이 창백하다. 그에게서 풍기는 악취에 머리가 아팠지만 그의 퀭한 눈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건너편에 빈자리가 난다. 그리로 옮겨 앉고 싶다. 저만치에서 할머니가 헛기침을 하며 기세 좋게 걸어와 앉는다. 바로 앞에 섰던 이는 멈칫거리다가 자리를 할머니에게 넘긴다. 할머니는 금방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다.
핸드백으로 나를 쳤던 아주머니가 내린다. 그 자리에 참하게 생긴 여학생이 앉는다. 내년에 있을 평창올림픽 공식 패딩으로 유행이라는 ‘롱패딩’을 입었다. 에코백을 뒤적여 책을 꺼내던 학생은 무엇에 놀란 듯 벌떡 일어선다. 그 자리에 보따리 서너 개를 든 할머니 한 분이 앉는다. 일어선 학생은 할머니 바로 앞에 서서 꺼내든 책을 읽는다.
읽던 책에서 이미 신경이 떠난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냄새 나는 학생이 여전히 거슬리기는 하지만 서서 갈 자신이 없다. 연세 드신 분들이 사방 군데군데 앉거나 서 있다. 언제부터 지하철에 노인들이 이렇게 많았나. 오전 열 시가 넘은 시간이라지만 젊은이 보다는 대개가 노인들이다. 노인을 보고도 내 몸은 꼼짝하지 않는다. 다른 때 같으면 자리를 양보했을 것이다. 더구나 몇 정거장 더 가면 내려야 한다. 하지만 꼼짝도 하기 싫었다.
왼쪽에 앉은 남학생은 여전히 인쇄물을 만지작거린다. 그의 시선은 연신 바쁘게 사라지는 바깥 풍경에 있다. 그러고 보니 기말시험 기간이다. 조카 하늘이도 밤 새워 공부하고 대충 씻은 얼굴로 모자 하나 눌러쓴 채 집을 나섰다. 잠귀가 밝은 나도 덩달아 밤을 꼬박 새웠다. 속이 불편하고 어지럽다. 내 몸이 불편할 때는 자리를 양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못돼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마음을 굳혔다. 눈을 지그시 감는다. 서 있는 노인이 뭐라 하지나 않을까, 나는 별의별 생각에 잠긴다. 전철 안 누군가의 눈에 보이는 나는 자리 양보하기 싫어 딴짓하는 아줌마이다.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모르는, 나를 모르는 이들로 가득 찬 1호선 전철 안. 사람들의 사연이야 각양각색이겠지만 그들은 ‘약속시간을 지켜준다.’는 ‘편리하고 안전한 교통수단’을 이용 중이다. 스마트폰으로 오락을 하거나 뉴스를 보거나 웹툰을 본다. 영화나 드라마를 즐긴다.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꼼꼼히 살핀다. 운전할 때는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이다.
‘다음 정차 역은 종로3가’라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내릴 차비를 서두른다. 손에 든 돋보기를 케이스에 담고 읽지도 않은 책을 덮어 다시 가방에 집어넣는다. 시계를 본다. 약속 시간까지는 30분쯤 여유가 있다.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과비평 2018년 04월호, 통권198호 I 책머리에] 나로 인한 피해자들 - 고동주 (0) | 2018.05.17 |
---|---|
[수필과비평 2018년 03월호, 통권197호 I 다시 읽는 이달의 문제작 작품론] 사랑의 이름으로 - 허상문 (0) | 2018.05.16 |
[수필과비평 2018년 03월호, 통권197호 I 세상마주보기] 봄의 환상 - 장영자 (0) | 2018.05.15 |
[수필과비평 2018년 03월호, 통권197호 I 세상마주보기] 세상의 당신들 - 이주옥 (0) | 2018.05.15 |
[수필과비평 2018년 03월호, 통권197호 I 세상마주보기] 바람 산 - 이은일 (0) | 2018.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