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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3월호, 통권197호 I 지상에서 길찾기] 철없는 부모를 보고 - 이차순

신아미디어 2018. 5. 2. 08:19

"오늘 이 끔찍한 사고로 알려진 철없는 부모의 신세를 생각해 본다.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야 할 그 책임은 누구에게? 물론 자신에게 있지만 이들의 부모 책임도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모가 우선 깨달아야 할 일은 내 자식이 경쟁사회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열등생이라 보고 부모의 각별한 사랑과 사회의 따뜻한 배려가 더 절실하다는 생각을 하며 제2, 제3의  ‘철없는 부모’가 다시 발생하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해진다."






   철없는 부모를 보고    -    이차순

   다섯 살 소녀가 실종됐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후에야 아이가 안 보인다는 신고에 경찰이 찾아 나섰다. 수색대는 근처 야산을 뒤졌고 동원된 연인원은 수백 명에 달했다. 나는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으나 매스컴에서는 연일 소녀의 실종사건을 중요뉴스로 다루었다. 의혹은 소녀의 측근이라는 심증이 있으나 물증이 없었다. 마침내 수사망에 걸린 범인은 바로 소녀의 아비였고 다섯 살 소녀는 이미 여러 달 전에 죽어 산속에 매장되어 있었다. 이러고도 아비는 내연의 처와 아무 일이 없다는 듯 딸이 살아있는 것 같이 위장해온 여러 정황들이 너무 경악스러웠다.
   한 소녀의 애석한 죽음에 대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또 하나의 사건을 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어린 삼남매가 모두 이불 속에서 질식해 숨졌다는 뉴스보도였다. 숨진 삼남매는 네 살, 두 살, 그리고 15개월 된 아기라는 데 나는 또 경악했다. 이 아기들의 죽음은 철없는 부모의 과실로 보게 했다. 무책임과 잘못된 출발이 이런 비극을 낳았다고 본 이유는 아기들 아비의 나이는 이제 스물두 살, 어미는 스물한 살이라는데  ‘아이가 셋이라니!’ 이들은 통념을 벗어난 어린 나이의 부모였다.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울 나이에 생활은 어떠했을까?  ‘철없는 부모’, 이들의 정신 상태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비극의 시초는 어디에 있었던 걸까? 물론 잘못된 출발과 무책임의 문제는 어린 부모에 있다. 그러나 모든 잘못을 어린 부모에게만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도 있겠고 가깝게는 철없는 어린 부모의 부모도 책임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갖춰야 할 능력과 책임감도 부족한 자식에게 부모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걸 도와주었을까!
   문득 내 가까운 친구, 보살님이라 부르는 친구가 떠올랐다. 이 친구는 나와 갑장同甲이고 매우 친한 사이다. 40대 중반에 둘째 아들로 인해 마음고생을 크게 겪었다. 그래도 아들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 전생前生의 업으로 돌리던 친구가 하루는 나에게  “우리 둘째는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몰라.” 하면서도 이 아들을 더 챙겼다. 이때 알게 되었지만 대학교 재수생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던 것이다. 입시를 앞둔 상태에서 이성친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쓰일 때였다. 한데 아들의 여자친구가 임신까지 했다면? 그때만 해도 미혼남녀의 임신은 큰 사건이었고 당사자의 부모는 얼굴도 못들 만큼 창피한 일이었다. 이 친구가 한탄하듯  “진즉 알았으면 유산을 시켰어야지!” 이런 뜬금없는 말을 꺼내 나는 누구의 말인지 몰라  “누가 임신했는데요?” 묻자, 둘째 아들이라며 벌써 6개월이 지났다고 했다. 이때는 해외에서 근무하던 남편도 귀국할 무렵이었고, 남편은 이 아들에겐 호랑이보다 무서운 아버지였다. 선비 같은 큰아들에게는 말도 못 꺼낼 일이라 손위 시누님과 의논을 했다고 한다. 갑자기 이런 엄청난 이야기에 나는 가슴이 답답했다. 우리 나이에 벌써 손자를 본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축하도 못 하겠고 그렇다고 가볍게 말할 입장도 못되어 시누님께 들은 말씀을 먼저 물었다. 시누님께서는 둘째의 여자친구가 자라온 환경과 7남매 중 끝에서 둘째라는 말씀을 들으시고는 딸을 둔 부모 입장을 생각하라고 하셨단다. 나도 같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큰아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언젠가는 모두 독립해 나갈 것이니 큰아들이 결혼할 때까지 결혼식은 올려주지 못해도 세 사람 생명이 걸린 문제로 생각되니 잘 생각해보라고 하였다.
   벌써 30년 전 일인데 그때의 일이 생각났다. 둘째의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고 여학생은 두 살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이들은 학원에서 알게 되었고 나이로 봐도 딸이 없는 친구라 누나가 생겼구나 했단다. 그런데 어느 날 임신을 했다면 놀라지 않을 부모는 없다. 그해 둘째는 대학에 합격했고 여름에 아들을 낳았다. 학생 신분이라 뒤에 모든 책임은 부모가 안아야 했다. 이후 정신없이 수년을 보내온 사이 둘째는 군복무부터 마쳤고 복학해서 졸업을 하였다. 바로 직장도 갖게 되었다. 미혼모인 아이 엄마는 피아노 레슨으로 생활비를 보탰다고는 하나 두 집의 부모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은 둘째 아들도 한 가정을 책임진 가장이 되었고 그때의 우리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다섯 살 소녀에게 일어난 비극과 어린 삼남매의 질식사, 이런 끔찍한 사건을 보며 그때 내 친구의 고민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친구는 진정 세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만일 그 아들을 돌봐주지 않았다면 둘째 아들은 한때의 자기 실수를 평생 후회하며 사회에 왕따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 친구 보살님은 젊은 나이였음에도 그런 난처한 상황에서 참 지혜롭게 넘어왔다는 데 감탄을 한다. 이 친구는 지금도 보살菩薩행을 실천하며 끊임없이 새벽예불에 동참하고 있다. 친구는 모든 게 부처님 가피加被라며 감사해 한다. 그 기도의 덕인지 내가 보아도 이 친구는 원하는 일들이 잘 풀린다고 느껴왔다. 이 친구를 절에서 만나면 가끔 그 손자 소식도 듣게 된다. 손자도 지금은 청년이 되었고 유명 종합병원, 정형외과 수술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 이 끔찍한 사고로 알려진 철없는 부모의 신세를 생각해 본다.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야 할 그 책임은 누구에게? 물론 자신에게 있지만 이들의 부모 책임도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모가 우선 깨달아야 할 일은 내 자식이 경쟁사회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열등생이라 보고 부모의 각별한 사랑과 사회의 따뜻한 배려가 더 절실하다는 생각을 하며 제2, 제3의  ‘철없는 부모’가 다시 발생하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