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편의 '이달의 문제작'에 대한 박양근교수의 작품론을 통해 애정어린 관심을 바랍니다.
<오해> 김순경
<간벌間伐> 백두현
<어허라 사랑> 이행희
피아제의 인지이론과 수필자아의 심리 해석 - 박양근
행동하는 인간은 자신의 능동성을 중시한다. 주관적 존재로서 객관적 상황을 거부하고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인지력이 발전한다. 행동은 유전적 요인이나 숙명보다는 환경적 자극을 통해 재구성된다는 인지이론은 스위스 태생의 피아제(Jean Piaget, 1896∼1980)가 간파한 내용이기도 하다. 1900년대에 아동의 행동발달을 과학적으로 설명한 이론가인 그는 자신의 자녀들이 주변 환경에서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연체동물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과 흡사하다는 데 착안하여 1930년대에 인지발달이론을 정립하였다.
“발달한다”는 명제는 인간이 주변 세계를 능동적으로 변형시켜 인지구조를 재조직하는 과정을 지칭한다. 개체는 대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대상을 변형시킨다. 대상을 옮기고 결합하고 분리시키는 조작 행동이 내면화할수록 정신적 수행은 원활해진다. 수필의 경우, 수필가가 자신의 행동을 관찰하고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가운데 한 편의 기억 완성체가 만들어진다. 어찌 보면 작가는 글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인지하고 미완의 행동을 발달시키려는 글 쓰는 존재라고 하겠다.
피아제는 인간을 성장시키는 인지과정을 네 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 째는 대상을 의식하는 감각 동작기이며, 두 번째는 세계를 인식하는 전 조작적 사고기이며, 세 번째는 논리적 추리력을 가지는 구체적 조작기이며, 네 번째 단계는 실제상황을 넘어 추상적 세계도 인지하는 형식적 조작기이다. 나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두 기제로서 조직과 순응을 제시하였다. 조직이란 별개의 감각들을 통일된 구조로 결합하는 능력이다. 순응은 동화와 조절로 나누어지는데 동화란 외부 요소들을 유기체의 내부 구조에 통합시키는 것이며, 조절이란 환경으로 인하여 개인의 조직이 수정되는 과정을 말한다. 이것을 수필에 대비하면 착상, 인식, 집필, 외연 확장이고 조직은 소재를 불러 모으는 것이며, 동화는 주제와 소재를 결속시키는 것이며, 조절은 수필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아발전을 뜻한다. 그렇게 보면 글쓰기를 통한 자아성숙은 피아제가 제시한 아동의 인지발달과 별다른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수필과 피아제의 인지론을 연관시켜 수필 읽기를 한다면 어떤 결과를 얻을 것인가. ‘대상 없음’이 ‘대상 있음’으로 전환하여 대상이 없어져도 그것이 계속 존재함을 인지하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실제 상황을 넘은 추상적 개념이 언어화하고 글을 구성하는 도식(scheme)이 한 편의 수필에 집중한다. 이번 호에는 작가 자신의 오류를 정정하여 새로운 인식체계에 다다르는 심적 추이를 추적한 수필들을 찾아 인지와 언어 간의 교합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김순경의 <오해>
<오해>는 어떤 행동의 잘못을 인지하고 그것을 교정한 경험을 기록한 수필이다. 대학에 재직하는 김순경은 전문 지식인이 그렇듯이 쉽사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지닌 한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환경에 놓인 대상을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맞추려 한다. 로고스가 넘치는 패기만만했던 시절의 그는 강의실 안에서는 학생들이 자신이 정한 규칙을 따라주기를 원했다. 그렇지 않은 학생은 문제학생으로 여기고 그들의 정서적 파토스를 살피지 못하였다. 이런 심적 구조는 서두에서 살필 수 있다.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 누군가 교실 뒷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가 사라졌다. 교실 안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자 숨어버린 것이다. 나는 모른 체하고 강의를 계속하였다. 잠이 와서 세수하러 나갔나 싶어 자리를 둘러봤지만 빈자리는 없었다.
서두는 ‘보이지 않는’ 학생이 어떻게 다루어지는가를 제시한다.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 “누군가”, “사라졌다”, “숨어버린”, “모른 체”, “빈자리” 등은 학생에 대한 그의 인식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언어의 집합이다. 달리 말하면 타자라는 환경적 대상은 그의 의식 내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피아제가 말한 감각−동작기에서 아동은 행동을 감각한다. 대상을 개별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가운데 자기중심적 행동을 취한다. 김순경도 누군가를 보았지만 그 감각은 순간적이다. 잠시 후 “큰 키에 잘생긴 청년”이 다시 등장하였을 때 비로소 “문제 학생으로 낙인찍혀 졸업을 못 할 뻔했던” 학생임을 알아차린다. 그때에도 그의 의식은 여전히 대상의 처지를 고려하지 못하는 피아제의 제2단계인 ‘전 조작적 사고기’에 머물러 있다.
줄거리는 오해가 해소되고 두 사람이 서로를 인식하는 관계를 이루어낸 경위를 설명해준다. 전개부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작가는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그 취지를 훼손하는 행동을 불손하다고 여겼다. 그의 열정적인 교육관은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배우는 것이다. 그때의 “목표달성을 위한 원칙”이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자만이었음을 지금은 뉘우치지만 당시는 옳았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초임 교수답게 열정만 앞세우고 좌충우돌할 때였다. (중략) 목표 달성을 위해 원칙만 앞세우는 회사 간부처럼 학생들을 대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에 쉬는 시간도 없이 강의를 계속할 때가 많았다. 수업시간이 되기도 전에 교실에 들어가 책상부터 정리정돈시켰고 책이 없는 학생은 바로 내보냈다.
그 원칙을 무시하는 학생이 나타났다. 학생은 월요일 첫 시간부터 강의 중에도 잠을 잔다. 대부분 밤새 놀며 술을 마신 경우로 여겨진다. 학생의 행동은 강의실 환경을 깨뜨리므로 제대로 혼내 주어야 한다. 자기 집중성의 단계에서 사람은 대상의 한 부분에만 집중하여 다른 가능성을 도외시하는 비가역성에 빠진 듯이 작가도 추측을 합리화하기 위한 여러 명분을 첨가한다. 학생이 매번 담배와 술 냄새를 풍길 뿐만 아니라 다른 교수들도 덩달아 학점을 주지 않겠다고 야단을 부리니 편견의 집중성은 더욱 높아진다.
문제학생에 대한 올바른 인지는 직접 대면하면서 시작한다. 대면은 보이지 않던 대상을 보이게 만든다. 나아가 작가를 단순히 가르치는 교수가 아니라 학생의 문제를 풀어주려는 상담자의 신분으로 바꾸어준다. 달라진 관점은 두 사람 사이의 소통도 진실하게 만든다. 자기중심의 선입관이 무너지면서 학생중심의 인지공간이 마련된다. 회사에서 노조대의원과 대화를 한 경험과 “송구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학생의 낮은 목소리와 학생시절에 방황했던 자신을 떠올린 기억이 서로 작용함으로써 문제학생의 환경에 대한 인지력이 발전한다. 마침내 작가는 자아의 탈중심화에 다다르는데 이 단계가 피아제가 말한 3단계이다. 학생도 자기방어기제에서 벗어나 진실을 말한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학생은 밤에 아르바이트한다고 했다. 아쉬운 것 없이 잘 지내다 외환위기로 회사가 무너지자 부모는 이혼했고 친척 집에 얹혀살면서 자신과 동생의 학비를 번다고 했다. 하는 일은 나이트클럽 웨이터였다.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술시중을 들고 바로 학교로 와 교실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이 이야기할 동안 김순경은 내내 “천장만 쳐다보”는 반응을 취한다. 그 자세는 자책과 미안함과 동정심의 표현이다.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학생을 겉만 보고 문제학생으로 잘못 본 경솔함과 피곤하여도 학교에 꾸준히 오는 노력에 대한 감동과 졸업장을 받고 싶어 하는 절박한 현실과 진정한 교수상에 아직 다다르지 못한 후회라는 도식들이 결합하여 실제 상황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갖가지 문제를 조절하고 상황에 동화하는 인지력을 발전시킨다. 문제학생이 중견관리자가 되어 그 앞에 나타났을 때 김순경도 진정한 교수는 누구인가를 인지하는 단계에 다다른다. 그 인지는 “까맣게 잊은 제자”에서 “몇 해 동안 찾아뵙지 못한 선생님”을 떠올린 추상적 사고력에서 재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젊은 시절의 그릇된 오해를 풀어내면서 교수상에 대한 인지적 발달을 이루어내었다. 그 점에서 오해의 수정은 작가의 삶에서 힐링의 기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백두현의 <간벌間伐>
백두현은 지금 창문 곁에 서서 앞산을 바라본다. 그는 산의 모습을 그냥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무성해진 숲을 솎아내는 간벌작업을 지켜본다. 구경하는 동작과 살펴보는 행동은 다르다. 전자가 미적 감상에 빠져든다면 후자는 관찰자의 인지력을 촉진시킨다. 간벌은 불필요한 나무를 베어내어 남은 나무들이 잘 자라도록 일조량과 거리를 조절하는 산림관리방식이다. 효율성이 강조되다 보니 인위적으로 베어지는 나무와 남겨지는 나무로 나누어진다. 약한 나무는 나무의 의사와 달리 생명도 짧다. 이것에 대하여 작가는 “누가 뭐래도 유익한 행위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간벌작업을 계속 지켜볼수록 회의감이 생겨난다.
수필 <간벌>은 8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단락을 제외한 7개 단락은 간벌에 대한 작가의 인지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단계적으로 제시한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사람의 인지는 획득한 정보를 의식에 저장함으로써 발전한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는 세계에 무관심하지만 일단 자각하면 대상과 목표물을 향해 오감을 움직여 간다. 작가도 보이는 대로만 간벌을 생각하였지만 간벌의 의미를 인지한 후에는 그것의 문제점을 유추하기 시작한다.
인지의 변화는 두 번째 단락부터 일곱 번째 단락까지 계속한다. 매 단락은 작가의 지적 판단을 제시하는 ‘여는 문장’과 정서적 느낌을 전달하는 ‘마무리 문장’으로 구성된다. 이런 단락 형식은 간벌의 의미에 인간의 경제적 욕망과 이기심을 첨가하여 못 쓸 나무와 약한 인간에 대한 반생태적 의식을 강조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백두현은 간벌이 과연 숲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위한 것인가라는 인식의 분기점을 두 번째 단락에 둔다. 도시개발에서 배운 경제론을 숲 개발에 적용하여 “보기 좋고 효율적인 성장”을 꾀하는 것이 간벌이므로 약한 나무에게는 강요된 희생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서적 반응도 “그런 의미에서 그게 그거다.”라는 애매모호한 입장으로 선회한다. 보이지 않는 대상을 표현하는 피아제의 두 번째 단계에 다다른 백두현의 인지는 계속 수정된다.
참으로 곱씹어볼수록 슬픈 일 아닌가. 힘센 놈만 살아남고 약하고 못난 놈은 먼저 삶을 마감하게 하는 잔인한 행위다. 잘 자라는 나무야말로 내버려 둬도 잘 자랄 것을. 처음부터 햇볕이 적게 드는 불리한 위치에 자리 잡았다고 원죄를 질책하는 꼴이다. 정상적인 위치더라도 장애가 있어 자라지 못한 나무는 이미 힘겹고 서러운 처지인데 꼭 잘라내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인가. 경쟁력을 갖춰 잘 살고 있는 잘난 나무들은 훨씬 더 잘 자라게 하고 소외당한 나무들에겐 죽음을 강요하는 행위가 왠지 나로서는 서글프기만 하다.
세 번째 단락인 위 내용은 간벌에 대한 작가의 인지구조가 어떤가를 밝혀준다. “참으로 곱씹어볼수록 슬픈 일”이라는 표현은 간벌의 개념이 숲에서 사회로 확장됨을 보여준다. “힘센 놈과 약한 놈”이라는 이분법은 “햇볕이 적게 드는 불리한 위치, 힘겹고 서러운 처지, 원죄를 질책하는 꼴, 소외당한 나무들에겐 죽음을 강요하는 행위”라는 문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냉엄한 경제주의로 인하여 세상 약자들의 존재가 더욱 무시된다는 작가의 생각을 강조한다. 그래서 작가는 “누가 뭐래도 유익한 행위다.”라고 말했던 첫 느낌을 거두어들이고 “왠지 나로서는 서글프기만 하다.”는 감정으로 대체한다.
이 시점에서 백두현의 인지는 피아제가 말한 제3단계인 구체적 조작기에 다다른다. 도시개발이라는 사례와 간벌이라는 인공조림을 합친 네 번째 단락의 첫 문장 “인간세상의 도시개발도 그랬다.”는 간벌조차 “가진 자에게 더 유리해 돈을 버는 세상”을 만들어버린다는 개탄을 피력한다. 따라서 “이렇게 짠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라는 정서적 반응도 뒤따른다.
숲의 간벌과 경제정책을 비교하는 백두현은 나아가 자신의 의식 자체를 되돌아본다. 지금까지 숲만 보고 나무 하나 하나에 진지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과거를 “몰염치한 행위”였다고 자책한다. 이 반성은 문제학생에 대한 오해가 풀렸을 때 천장을 쳐다보았던 김순경의 반응과 비슷하다. 김순경이 그 학생을 무난하게 졸업시켜 사회의 일원으로 만든 것처럼 백두현도 쓰러진 나무가 인간들을 위해 “유용한 목재”가 된 것에서 경이로운 희생심을 발견한다. 수필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은 대부분 서술자의 성찰과 자성의 통로를 거친다. “<간벌>에서 작가가 자신을 두고 “나무만도 못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인지한 점은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라는 파토스적 표현에서 재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경제적 이윤으로 사회를 바라본 자신을 인지하는 단계는 피아제가 말한 형식적 조작기에 해당한다. 이 네 번째 단계에서는 추상적 언어로써 주변대상을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여섯 번째 단락과 일곱 번째 단락이 그 심적 발전을 제시한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자면 돈이 될 만한 아파트에 당첨되기 위해 청약을 한 것이 몇 번이고 남들보다 잘살기 위해 짧은 머리를 쥐어짠 적이 몇날 며칠이던가. 철거민들의 아픔을 뉴스로만 보았지, 내 일처럼 속상해 본 적 별로 없었고,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의 편리함을 덜어낸 적 또한 결코 많지 않다.
작가는 자아반성을 지향한다. “아파트 청약, 철거민의 아픔, 나의 편리, 부동산 세법”이라는 단어들에서 “인간들은 남보다 잘살기 위해 … 세상에 이로운지 고민한 적이 없다.”라는 명제를 찾아내어 주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작품이 끝나도 간벌에 대한 작가의 인지는 중단되지 않는다. 창문에서 비켜서면 잘려나간 나무들의 아픔이 잊힐 것이라 여겨지지만 인간 사회와 자연계에서 “새로운 경쟁은 다시 시작되리라.”는 점이 불가피하다고 자각한다. 백두현도 “오늘 간벌의 희생 또한 소중하게 기억되기”를 희망하면서 “또 한 그루의 나무가 힘겹게 눈앞에서 계속해서 쓰러지고 있”는 현실을 수긍한다. 숲이 경제논리에 지배되는 것을 볼 때마다 작가는 도시의 약자가 생각나서 서글프고 짠하고 미안스러울 것이다. 이렇듯 그의 인지는 간벌이 계속되는 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행희의 <어허라 사랑>
어린이의 인지과정은 피아제에 의하면 4단계이지만 성인의 경우 개인에 따라 인지의 결과가 다소 달라진다. 인지력이 발달하는 순서는 동일하지만 인지적 평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차이가 생겨난다. 그 이유는 성인의 경우 자신의 행위를 인지 대상으로 삼아 그 발전상을 살피기 때문이다. 이행희의 <어허라 사랑>은 김순경의 문제학생이나 백두현의 <간벌>과 달리 자신이 노래를 배우는 학습을 인지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행희가 가요를 배우고 있다. 노래하는 동작을 수용하는 감각이 자의적이고 개성적인 방식으로 펼쳐진다. 배우는 과정을 나름대로 분석하여 노래 잘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대중가요에 대한 인식도 수정하여 앞으로의 방향도 인지해 나간다. “되었다. 마음속으로 무릎을 친다.”로 시작한 <어허라 사랑>이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결미로 끝난 것도 학습 단계마다 인지력이 비례하여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래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밥을 할 때에도 앉아 쉴 때에도 밤낮 듣는다. 노래 안에 풍덩 잠겨 지낸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멜로디와 가사가 무의식 속에 각인된다. 어느 순간 내 입에서 저절로 멜로디가 흘러나오면 반 이상은 된 것이다.
노래를 배우는 방식은 “무한반복으로 주야장천” 듣는 것이다. 이것은 아동의 인지학습과 상통한다. 신체가 감각적으로 반응할 때까지 가사와 리듬을 반복하는 그녀는 청소기를 돌리면서도 멜로디를 몸으로 익힌다. 마침내 자신감을 얻은 작가는 “이제 시간문제다.”라는 자각 단계에 다다른다. 이 활동은 ‘발달 전 단계’로서 신체활동을 감각적으로 인지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작가는 노래 부를 차례가 다가오면 주위 사람들의 표정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흥이 넘치는 노래가 필요하건만 동요 <과꽃>을 불러 “딱 저 같은 노래 부르네.”라는 심드렁한 반응을 가져왔다. 난처한 상황에 다시 처하지 않기 위해 “청중모드”로 돌아갔지만 그녀에게 청중모드란 박자를 맞추고 두 손을 높이 들고 “유후”라는 함성도 질러주는 몸이 따라주지 않는 행동에 불과하다. 결국 불편한 심기에서 벗어나려면 청중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점을 자각한다. 청중들의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이 그녀의 인지적 목표이다.
그런데 한 곡 더 하란다. 뭘 할까. 뭘 하지. 달아 오르는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노래가 무엇일까. 곡명 책자를 열심히 훑는다. 이거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빠르고 구성진 트로트로 골라본다. 고저장단을 살려 최대한 꺾어가며 열창을 한다. “쌤이 이런 노래도 하나.” 깔깔 웃으며 반응이 좋다. 역시 내 나이에는 트로트를 할 줄 알아야겠군. 아무래도 이런 노래를 하나 더 준비해야겠다.
그녀는 트로트의 효과를 인지한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불렀을 때 보여준 청중의 긍정적인 반응을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나름의 사고체계를 세운다. 자아중심성을 극복하고 분위기에 맞는 흥겨운 노래를 배우고 불러야 한다는 조작기에 다다랐음을 보여주는 노래가 <어허라 사랑>이다.
‘어허라 어허라 사랑이 오네/ 나를 나를 울리려고 사랑이 오네.’ 시작부터 내 관심을 끈다. “허락도 없이 떠날 사랑 하나가/ 웃으면서 오〜고 있네.” 흠, 괜찮은데. 이어서 “달콤하고 변하기 쉬운 입술/ 불 내놓고 물 뿌려본들” 캬, 가사 좋은 걸. 이제 클라이맥스다. “이건 아니야 고개를 돌리려다/ 그리움만 보고 말았네.” 아, 쓰러진다. 멜로디가 미묘하게 오르내리며 사람을 밀고 당기다 살짝 놓아버린다. 안타까움을 최대치로 올려버린다. 명곡이다.
위 단락에서는 노래를 배우는 동작과 서정적 반응이 교차한다. “괜찮은데, 가사 좋은 걸, 쓰러진다.”는 평가 문구는 가사 자체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자신이 부른 음조와 가락에 취한 자기 칭찬이다. “흠, 캬, 아”라는 감탄사도 노래에 점점 익숙해가는 자신에게 주는 일종의 추임새이다. 작가는 마침내 지속적인 학습만이 목표치에 대한 인지력을 높여준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제시된 모토가 그 점을 전해준다.
‘되면 한다.’ 요즘 내 모토는 ‘하면 된다.’가 아니라 ‘되면 한다.’이다. 나이 지긋한 이가 ‘하면 된다.’며 너무 설쳐도 주위 사람이 피곤하다. ‘되면 한다.’는 안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일단 해본다. 그리고 할 만큼 다 해보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한다’로 끝나지 않는가. 안 한다는 말이 어디 있나. 부정적 체념이 아닌 긍정적 수용이다.
<어허라 사랑>을 배운 과정에서 작가가 인지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한 곡을 잘 부를 수 있게 된 성과이고 다른 하나는 ‘되면 한다.’는 원리를 입증한 점이다. 그 연역적 사고는 계속 ‘고’라는 학습 효과를 증가시킨다. 구체적 사물을 초월하여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상황을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형식적 조작기라는 네 번째 단계에 다다르면 실천 가능한 새로운 조합을 만들 수 있다. 인지의 완성 단계에 다다른 이행희는 또 하나의 트로트가 아니라 트로트와 전혀 다른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 그것은 “조용한 발라드 한 곡”이다. 이제 작가는 때때로 분위기 있는 곡을 부를 경우도 있으므로 다음에 배울 곡명으로 이소라가 부른 <바람이 분다>를 정해두었다고 당당하게 밝힌다. 인지를 통하여 배운 체계적인 사고 능력을 지평적으로 연장하지 않고 입체적으로 해결한 그녀의 확장력은 앞서 해석한 김순경과 백두현과는 다르고 피아제가 설정한 어린이의 인지와도 다르다. 그 차이는 노래에 내재된 멋과 흥이라는 감성적 반응을 구현한 때문일 것이다.
이행희의 문장은 생생하면서도 경쾌한 톤을 유지한다. 노래 가사보다는 멜로디를 무의식 속에 각인시킨 덕분에 수필의 톤도 유연한 어조에 자연스럽게 맞추어졌다. 그녀가 노래를 배운 방식은 “입에서 저절로 멜로디가 흘러나오면 반 이상은 이루어진다.”였다. 그 ‘되면 한다.’가 이행희의 인지적 평형성에서 남다른 차이를 갖게 하였다.
덧붙여
한 편의 수필은 소재를 인지한 시점에서 시작한다. 착상이라고 부르는 순간에 작가는 숨겨진 의미를 포착하기 위하여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이 지닌 낯선 의미를 추적해 나간다. 이 과정은 피아제가 말한 인지과정과 흡사하다. 어린이는 처음에는 몸으로 대상을 감각화하고, 새로운 상징을 찾아내고, 논리적 추리력을 갖고 마지막으로 실제적 조작을 넘어 다른 논리를 이끌어낸다. 작가도 착상과 언어적 표현과 의미 발굴을 거쳐 문학이라는 상상의 완성 단계에 다다른다. 김순경이 문제학생을 다루면서 얻은 교수의 자격, 백두현이 간벌과 도시계획에서 찾아낸 강자의 논리, 이행희가 이루어낸 트로트에서 발라드로의 발전은 모두 자신의 인지를 어떻게 수필로 표현하였는가에 일치한다.
수필은 감각적 접촉에서 시작하여 추상적 사고로 나아가는 글쓰기 수행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사물이 지닌 가치를 언어로 저장하는 정신과정은 피아제가 말한 인지발달이론을 차용한다고 하여도 지나침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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