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수첩을 찾지도 말라고 하니 급변하는 시대 앞에서 내던져진 것 같은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작년에도 여기에서 이 수첩을 샀는데….” 하면서 여직원에게 수첩의 행방을 묻던 그가 서점 문을 나서면서 “그럼 어디 가면 살 수 있어요?” 했던 목소리가 떨림으로 내 안에서 들려온다. 그의 당황한 소리는 또한 내 것이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아날로그 세대의 것이 아닐지."
방황 - 이종전
대형서점을 찾았다. 오늘은 책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다. 새로운 해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매년 12월이면 수첩을 구입하는 것으로 새해를 준비한다. 문구 판매대를 찾아갔다.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팬시제품과 문구류가 혼란스럽게 느껴질 만큼 많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정작 내가 원하는 수첩이 진열된 곳은 찾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가 나를 멈추게 했다. “아가씨, 이런 수첩 어디에 있나요?” 반사적으로 그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거기에는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내가 찾고 있는 수첩과 같은 종류의 것을 손에 든 채 직원에게 묻고 있었다. 직원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런 거 없어요.” 그 소리를 들은 사내는 “이거 작년에 여기서 샀고, 매년 여기서 같은 수첩을 구입해서 사용했는데 왜 없는 거예요?” 직원은 그런 건 모르겠다는 듯 다시 응대하지 않았다.
시원치 않은 대답에 못마땅한 듯 그는 매니저를 찾았다. 그리고 매니저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매니저는 문구류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그를 안내했다. 결국 같은 대답을 들을 수밖에 없는 그는 한참이나 문구매장 앞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여기서 매년 구입해서 사용했는데 왜 없는 거지?” 수첩을 구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게다. 그의 목소리는 울림이 매우 컸다. 대형서점이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울렸다. 내게 그의 소리는 급변하는 시대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당황하는 울부짖음으로 들렸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안절부절못하며 출입문을 나서는 그의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는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가 있었다. 행색도 허름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수첩에는 빼곡하게 뭔가 적혀 있었다. 그의 삶을 담은 것이리라.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모르지만 그는 일 년 동안의 삶을 기록한 수첩을 펼쳐들고 난감해 했다. 수첩이 없다면 ‘이제 내년을 어디에 담지?’ 일상을 계획하고 정리할 수첩이 없다는 현실 앞에서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절규하듯 “이거 어디서 구하지?!” 하는 소리를 남긴 채 인파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하라고!?’ 당황한 그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것은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한 세대가 당황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사라진 그의 모습을 응시해야 했다. 그의 모습은 곧 나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수첩 찾는 일을 포기한 채 말 없이 서점을 나섰다. 서점과 이어지는 공간은 백화점과 마트를 찾은 인파로 가득 찬 곳이다. 그는 수첩을 구하기 위해서 어딘가로 가고 있을까? 아니면 낙심한 채 그냥 집으로 돌아갔을까? 그럼 나는 어떻게 할까? 생각할수록 당황스럽다. 더 이상 수첩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 수첩을 찾는 나는 어디쯤에 살고 있는 사람인가? 돌아오는 길 내내 수첩을 구하지 못한 채 사라진 그의 모습과 내 자신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왜 수첩이 없지?’ 그 서점이 이해타산으로 수첩을 갖다 놓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메모장이나 일정관리를 위한 플래너는 있는데 유독 수첩만 없으니 모를 일이다. 지난날 수첩은 가계부와 함께 한 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중요한 필수품이었다. 따라서 연말이면 선물로도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더 이상 수첩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왜 대형서점에 수첩을 준비하지 않았는지, 정말 수첩 따위가 필요 없게 되어서 매대에서 철수시켰는지?
내가 카메라를 손에 잡은 지 40년쯤 되어갈 무렵 어느 날 오랜만에 찍은 필름을 현상해서 작품이 될 만한 것을 만들어 볼 양으로 현상소를 찾았다. 그런데 현상소를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프로기사들이 운영하는 현상소는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평소에 알고 있었던 전문 현상소를 찾아갔다. 하지만 거기서 들은 것은 필름현상은 하지만 확대인화를 하려면 을지로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결국 나도 디지털 카메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디지털 카메라엔 애착이 가지 않는다. 더욱이 작품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굳이 아날로그만 집착하기보다는 디지털로 갈아타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리라. 하지만 아날로그적인 것이 주는 맛과 멋은 디지털로는 담을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꺼내서 기록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때가 묻어가는 수첩은 이런저런 일과 만남, 간단한 메모까지 나의 일상을 고스란히 간직해준다. 일 년이면 하나의 수첩이 나의 일 년을 그대로 담아서 보관해준다. 비록 내가 기록한 것들이지만 수첩은 나의 인생과 일들을 고스란히 담아 역사에 남겨준다. 때로 그 안에는 나의 부끄러움이 담길 수도 있다. 수첩은 일기책과 달리 간단한 메모와 일정만 기록되지만 나에 의해 선택된 것만이 아니라 나의 일상의 모든 것을 기억해준다. 계획했던 일을 취소한 것도, 뭔가 생각이 바뀌어서 지우고 다시 기록한 것까지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겨진다.
한데 이제 그마저 할 수 없게 될 것 같다. 아니, 하지 말란다. 더 이상 수첩을 찾지도 말라고 하니 급변하는 시대 앞에서 내던져진 것 같은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작년에도 여기에서 이 수첩을 샀는데….” 하면서 여직원에게 수첩의 행방을 묻던 그가 서점 문을 나서면서 “그럼 어디 가면 살 수 있어요?” 했던 목소리가 떨림으로 내 안에서 들려온다. 그의 당황한 소리는 또한 내 것이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아날로그 세대의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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