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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2월호, 통권196호 I 세상마주보기] 얽힌 삶 - 김성애

신아미디어 2018. 3. 31. 12:29

"불교에서는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한 수행을 가르친다. 수행을 한다면 모든 것을 허허롭게 바라볼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다. 불교에서 사람이 현실에서 살아가는 모습인 생멸문을 말할 때 여덟 가지 고苦를 제시한다. 그중에서 사랑하는 이를 볼 수 없는 애타는 고통을 생로병사의 고 다음으로 친다.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을 달래어 주는 큰 가르침이다."





   얽힌 삶  김성애

   오늘도 내가 다니는 아침 길가에 한 여인이 서 있다. 몇 달 전부터 봐온 그 여인이다. 처음에는 차를 운전하는 중이라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가 그냥 지나쳤지만  일주일에 서너 번 조우하면서 혹시나 하고 눈이 가게 되었다. 변함없이 그 시간, 그 장소, 그 여인이다. 오십대쯤 나이에 자태가 조용하고 찬찬해 보이며 옷은 색깔 맞춰 맵시있게 입었다. 체격도 훌쩍하고 화장기 없는 얼굴이지만 피부는 깨끗하다. 그냥 보아도 괜찮은 부인 같다.
   요즘같은 의료제도가 잘되어 있으니 정신에 이상이 있으면 병원에 가면 된다. 차림새로 봐서는 가족이 있을 것 같은데 저렇게 그냥 놔두다니…. 무슨 사연이 있어 항상 그 가로수 아래에 서서 나름의 의식을 치르는가? 눈을 감고 천천히 팔을 올리고 내리고 하는 모습은 단순히 운동이 아니다. 무엇을 향해 기원하는 명상의 수행자를 닮았다. 진지한 자세에 함부로 웃을 수 없다. 무엇이 여인을 저 상태로 만들었을까? 저런 행동을 할 때까지 수많은 갈등과 괴로움을 겪었겠지. 세상이 견고하게 쳐 놓은 어떤 그물망에 걸려 정신이 망가져 버렸단 말인가?

   오래전 내가 약국을 하고 있을 때였다. 겨울이 저만치 멀어졌지만 기세를 부리는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른 봄날이었다. 약국 유리문 안으로 따스한 햇살이 들어올 무렵, 할아버지 한 분이 약국을 들어섰다. 단골 환자분이 아니었다. 사오 년 전 중풍에 걸렸다 하며 몸놀림과 걸음걸이가 불편하여 우리 약국까지 오는데도 두어 번 길가에 앉아 쉬어온다고 했다. 동작은 불편하지만 두툼한 윗도리가 품위 있어 보이고 말씀도 점잖았다. 외모만으로도 한때는 좋은 사회적 지위에 있었지 싶었다. 
   자신의 약과 할머니 약을 구입했다. 약을 조제할 동안 “우리 할멈이 한 나의 병수발 몇 년에 내가 일어나니 자기가 누워버렸네.” 한다. 남의 얘기처럼 하지만 미안하고 안타까워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체념한 듯 조용하였다. 많이 풍족한 것 같지 않고 가족이 여럿 되지 않는 듯하다. 허기야 육십대를 넘어서면 자녀들이 모두 분가하고 부부만 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게 현실이다. 할아버지의 상태로는 할머니를 돌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두 분의 처지가 난감하여 내 마음도 답답해졌다. 한참 쉬었다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돌아선 발걸음이 더욱 힘들어 보였다.
   다음날 동사무소(지금의 주민자치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그 후로 자원봉사하는 사람이 그 댁을 방문하여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봉사원이 알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방에 할머니가 꼼짝도 못하고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이불을 들치니 할머니가 발가벗고 있어 놀랐다 한다. 나도 놀랐지만 이유를 들으니 수긍이 갔다. 할아버지도 몸이 온전치 못하니 할머니의 옷을 일일이 입히고 벗기지 못하여 그리한단다.
   외롭게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병든 부부가 돌보는 이 없이 생활하는 어려움을 누가 알 수 있는가? 몸이 주는 고통보다 마음의 외로움과 괴로움은 언제나 더 큰 법, 우리가 모르는 주위의 불행한 사람들은 말이 없다. 모르니 그런 사람이 없는 줄 안다. 그 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또 몇 번 할아버지가 힘든 걸음으로 약국에 다녀갔다.
   찬바람이 휭휭거리는 겨울, 약국에 불이 환하게 켜진 이른 밤이었다. 건장한 젊은이가 와서 장례에 필요한 몇몇 용품을 구입하면서 할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알려주었다.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라는 할아버지 말씀을 덧붙였다. 그는 할아버지의 아들이라 하였다.
   내가 한 일은 별것 아니었다. 약국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기껏 동사무소에 전화나 했을 뿐이다. 자신이 부끄러웠다. 직접 그 댁을 찾아가 따뜻한 무엇인가 했어야 했다. 그때 난 행동하는 양심이 되지 못했다. 
   알고 보니 돌아가신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사랑한 사람이었다. 본부인이 아니었다. 아마도 두 사람은 가정을 버리고 떠돌이생활을 한 것 같았다. 별세 전 위급한 소식을 듣고 본집 아들이 묵묵히 아버지의 가시는 길을 돌보기 위해 왔던 것이다. 그동안 마음을 옥죄던 그물망이 풀어졌다. 남은 가족들도 애증을 날려버리고 사랑과 용서로 그들을 애도했으리라 기대해본다.
   사랑은 어쩌면 얽히고설킨 토양 위에 솟아나는 한 송이 순수의 꽃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해맑은 꽃이라도 세상이 단단하게 쳐놓은 도덕이라는 그물망에 걸리게 되면 제대로 피기 어렵다. 자신들의 뜻과는 달리 배반자란 낙인이 찍혀 아웃사이드로 외롭게 일생을 마치고 만다. 인정 없고 이해심 없는 사람들의 시선이 매서운 칼이 되어 가슴을 찌른다. 어떤 형태로든 비극일 수밖에 없다. 그 사람 아니면 안 되는 여성이 있다 해도 사회의 일원으로 떳떳이 살기 위해선 그녀를 귀한 비단으로 감싸서 가슴 속에 숨겨야 한다. 자신을 억제하고 정신에 의지해야만 한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한 수행을 가르친다. 수행을 한다면 모든 것을 허허롭게 바라볼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다. 불교에서 사람이 현실에서 살아가는 모습인 생멸문을 말할 때 여덟 가지 고苦를 제시한다. 그중에서 사랑하는 이를 볼 수 없는 애타는 고통을 생로병사의 고 다음으로 친다.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을 달래어 주는 큰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