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슬슬 자기 세계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뿌듯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너무 일찍 그런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나마 그런 일에 재미를 붙이고 살았는데 그마저 없어지니 적막강산이 따로 없다.’"
손녀의 반란 - 장기오
맞벌이하는 아들 내외로 하여 한동안 손녀를 우리 부부가 키웠다. 그들이 야근이라도 하게 되면 우리는 손녀를 눕혀 놓고 <호랑이와 곶감> 같은 동화를 이야기해 주면 그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스스로 잠이 들곤 했고, 또 잠이 올라치면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곤 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곤 했다. 잠든 손녀의 얼굴을 살짝 비비면 풋풋한 사과 냄새가 났다.
시들시들 늙어가는 것이 지겹고, 산다는 것이 하등 재미없던 시절에, 손녀는 천사 같았다. 내가 외출했다 돌아와 손녀가 노는 방을 빠끔히 열고 들여다보면 손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다리를 있는 대로 뻗대며 “까악.” 하고 소리를 내질렀고 나도 마주 “까악.” 하고 맞대응을 하면 손녀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번개같이 달려들어 나에게 안겼다. 내가 덥석 안아주면 엉덩이를 들까불며 좋아했다. 그런 아주 예쁘고 천진한 시절에 나는 1960년대 노래 “꽃집의 아가씨는 예뻐요.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라는 노래를 패러디해 “우리 집 윤진이는 예뻐요.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하며 손녀를 꼭 껴안고 토닥거려 주면 손녀는 댓바람에 손사래를 치면서 그런다. “할아버지 틀렸다.” “왜?” 하고 물으면 “할아버지 잘 들어요.” 그러면서 목소리를 가다듬어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 집 윤진이는 예뻐요. 그렇게 예쁠 수가 있어요. 이렇게 하는 거야.” 한다. 나는 파안대소를 하고 손녀 말대로 “ ……그렇게 예쁠 수가 있어요.” 하면 싱긋이 웃으며 내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렇게 손녀는 애교만점이었다. 그러다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달라졌다. 어느 날 하학버스를 기다렸다가 손녀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데 마트 앞에서 딱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대부분 마트 앞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나는 시침 뚝 따고 “왜?” 하면 “저기 한번 들어 가보자!” “뭐하려고?” 하면 “뭐가 있는지 한번 가보자.” 하고는 쪼르르 뛰어들어가 버린다. 나도 어슬렁거리며 따라 들어가면 제가 먹고 싶은 과자 매대 앞에 딱 서서 나를 기다린다. 그렇게 과자 하나를 집어 들고 손을 잡고 집으로 오면서 오물오물 먹는데 그게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그래서 또 노래를 불러준다. “우리 집 윤진이는 예뻐요 그렇게 예쁠 수가 있어요.” 하고. 그런데 어느 날 이변이 있어났다. “할아버지, 아니다.” “왜?” “ ……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하는 거야.” ‘이제야 말뜻을 알기 시작하는구나.’ 하며 대견스러워했다.
그러다 둘째가 태어나면서 우리 부부가 애들 돌봐줄 힘이 부친다는 핑계로 딸 부잣집 처가 식구들이 함께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일산으로 아들네가 이사 가버렸다. 그래서 명절 때가 되어야 겨우 얼굴 한 번 볼 수 있다. 떨어져 사니 자연히 정情이 그전만 못하다. 그러나 목소리라도 한번 듣고 싶어 전화를 가끔 하곤 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손녀는 처음에는 조잘조잘 학교 이야기, 짝꿍 이야기 등등을 곧잘 하더니 어느 날 오랜만에 전화를 했더니 댓바람에 이런다.
“할아버지, 왜 전화했어?” “응. 윤진이가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 그러자 손녀가 “할아버지 나 지금 바쁘거든, 전화 끊어요.” 하고는 찰깍 전화를 끊어 버린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 전화기를 들고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무엇으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엄청 서운한 마음으로 소파에 맥없이 앉아 있는 그런 내 얼굴을 마누라가 보더니 고소하다는 듯이 깔깔 웃는다.
“섭섭해?”
“허, 참.”
“실망했어?” 한다.
나는 속으로 그랬다. “못 본 사이에 커 버렸구나.”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며칠을 두고 마음이 서늘했다. 마누라는 이를 두고 지금도 놀려댄다. ‘당신이 쌜쭉해서 앉아 있는 모습이 가관이었다.’고.
이후 나는 걸려온 전화는 받아도 내가 먼저 손녀에게 전화를 하질 않는다. 어쩌다 다른 일로 자식들과 통화를 하고 윤진이를 바꾸어줘도 손녀는 그전처럼 미주알고주알 깔깔대면서 할아버지에게 일러바치듯 조잘대지를 않는다. 이제 슬슬 자기 세계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뿌듯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너무 일찍 그런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나마 그런 일에 재미를 붙이고 살았는데 그마저 없어지니 적막강산이 따로 없다. 나는 시골에서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양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하고, 마누라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집에 붙어있지를 않는다.
아. 인생은 고달프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구나. 70에 비로소 깨닫는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손녀를 생각하면 웃음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그래도 낙이라면 낙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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