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핀 흰 국화를 마음으로 마광수 시인의 영정에 바친다. 아이의 고독과 어른의 고독에는 얼마큼의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나이는 어렸지만, 정신적으로 성숙했던 시절에 체험한 내 고독과 외로움의 크기가 작지 않음을 알기에 무턱대고 그렇게 심적으로나마 영정 앞에 서서 가만히 있기만이라도 하고 싶다. "
흰 국화 꽃잎 날릴 때 - 박주희
그의 사십구재일이 지났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다음 삶의 과보토果報土는 어디로 정해진 것일까. 지난 구월 초에 그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한국 최고의 윤동주 전문가로 우리에게 ‘부끄러움의 미학’을 알게 해 준 마광수 교수가 스스로 삶의 정점을 찍고 운명을 결정해버렸다. 오한이 났다. 한 사람이 가는 마지막 길의 고독과 외로움이 몸 안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와 일면식도 없었다. 애독자도 아니었으며 마광수 교수의 문학을 지지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단지 문학의 울타리 내에서 그의 인생사를 들은 한 사람으로서 그의 삶이 애달팠다. 뒤늦게 언론에서 그에 대해 조명하는데 무슨 소용일까. ‘있을 때 잘 해라.’라는 말은 언제나 진리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다 한들 마광수 시인의 장례식 영전에 국화 한 송이라도 얹어 명복을 빌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이번 가을은 유독 사라지는 것에 시선이 머문다. 풍성한 먹을거리 너머의 도사리가 생각나듯 삶의 곁에서 제대로 생을 펼치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기억은 퇴적되고 풍화를 거쳐 아스라해진다. 마광수 교수가 죽은 직후 시끌벅적하던 언론이 두 달 새 잠잠해졌다. 그를 기억하던 많은 이도 죽을 것이다. 그의 문학과 삶은 기록으로 남겨져 누군가에 의해 가끔 회상되겠지. 그 생각 너머 국화 한 송이 보인다.
가을꽃은 국화이다. 누군가는 단풍이나 온갖 과일, 바바리코트 같은 것을 떠올릴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입추와 함께 하얀 국화가 가슴에 핀다. 그 국화가 내 삶에서 가장 순수했던 시절을 곱씹게 한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전학하니 학교 온실에서는 특별히 대국을 큰 화분 하나 하나에 한 포기씩 정성 들여 키우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원예반을 책임지고 있어서 자주 내 눈에 들어왔다. 서울 근교에서 전학 왔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해 어디에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나의 쓸쓸함을 알아챈 것인지 탐스럽게 꽃이 피는 대국은 고상한 기품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그때부터 용건이 없음에도 화분 앞을 지나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화분 앞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국화에 날아드는 곤충들도 눈에 들어왔다.
국화를 대하며 내 시야는 넓어졌다. 학교와 집을 오가며 만나는 수많은 식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나무와 풀이 친구가 되었다. 내가 평생 쏟아놓을 말 대부분을 그때 다 하지 않았을까 하고 지금도 생각한다. 자연물인 그것들이 대답하지 않자 드디어는 얘기하는 나와 듣는 나로 분리했다. 그리고 듣는 나를 자연물에 상관시켜 대답시켰다. 그때의 수많은 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짐작건대 내 인생 최대의 고민이 많았던 시기를 지나고 있어 인간의 삶, 운명, 돈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 끝에는 죽음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자연에 삶의 고달픔을 풀어놓으며 위안을 받던 때에도 국화를 보기 위해서 온실 화분 앞을 종종 어정거렸다.
세상에 꽃은 국화만 있는 듯했다. 오직 국화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일이 벌어졌다. 크게 생각하면 큰일일 테고 작게 생각하면 사회화를 덜 겪은 소녀의 무지에서 비롯된 일화라고 생각하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내게는 사회적 구속이나 상징으로 대표되는 틀을 깨버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 때마다 더욱 선명해지는 지점이다. 그것은 내 순수나 천진함과 고별하게 된 최초의 기억인 것만 같아서다.
왕따에서 벗어났다. 왕따일 때 나는 그 일면을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많은 시간을 혼자 지내다 보니 고독하고 외로웠지만 홀가분한 점도 있었다. 사춘기가 시작되고 있어서인지 철이 들기 시작한 것인지 돈의 실체를 다 알아버린 탓인지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친구들은 동성이든 이성이든 하나같이 어려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현실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자꾸 과거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남자 형제들 틈에 자라 씩씩했고 키도 컸으며 눈물이 많았지만, 의협심이 강해 때로 앞장서서 누군가와 맞서기도 했던 나였다. 왕따 이후의 소심하고 염세적으로 변해가는 모습 속에서 나는 자존과 자학을 오가며 줄다리기를 했다.
초등학교 육학년 때, 반 아이가 병원에 입원했다. 시험 때면 채점 도우미로 함께하던 여자애였다. 전학 온 후 친구라는 말을 잘 쓰지 않던 내가 친구라는 말을 쓰고 싶었던 상대였다. 학교에 며칠 나오지 않는 아이의 얼굴을 보러 길을 나섰다. 뭔가를 손에 들고 가야 한다는 강박은 있었지만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십시일반이라고 여럿이 동행했으면 좋으련만 숫기도 없고 혼자 놀아 버릇하여 귀찮은 생각도 있었다.
병원으로 향하던 발길은 꽃집 앞에서 멈췄다. 그때가 어느 계절이었는지 정확히 생각은 나지 않지만, 손바닥만 한 국화가 눈에 들어왔다. 흰색의 꽃을 좋아하는 내 취향대로 흰 국화 한 송이를 투명비닐에 싸서 병문안을 갔더랬다. 친구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해했다. 당시는 왜 그 표정인지 알지 못했다. 들국화 같은 소국 한 다발도 아니고 흰 국화 한 송이를 들고 가다니. 흰색이나 노란색의 대국은 조의弔意로 헌화하는 데 쓰인다는 것을 나중에 그 친구에게 들어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장례는 각 집에서 치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처럼 대부분 장례식장에서 상례喪禮를 치렀다면 아마도 눈치껏 알아채지 않았을까. 모르는 건 잘못이 아니었건만 이와 같은 사례들로 사춘기 이후의 나는 자꾸 작아져 가고 있었다.
그때 일만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그 아이 엄마의 표정이 살아나 죄송한 마음도 든다. 그래도 어쩌랴. 몰라서 그랬던 것을. 또 흰색 국화가 그렇게도 많이 좋았던 것을. 가장 좋은 것을 함께하고 싶던 친구였다는 것을. 그때의 내가 눈앞을 스친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하얀 국화 한 송이 들고 병문안 가는 내가 걸어간다. 지금의 내게로 웃음이 번진다.
가슴에 핀 흰 국화를 마음으로 마광수 시인의 영정에 바친다. 아이의 고독과 어른의 고독에는 얼마큼의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나이는 어렸지만, 정신적으로 성숙했던 시절에 체험한 내 고독과 외로움의 크기가 작지 않음을 알기에 무턱대고 그렇게 심적으로나마 영정 앞에 서서 가만히 있기만이라도 하고 싶다.
가을바람에 흰 국화 꽃잎 한 잎 두 잎 그를 따라 푸른 하늘로 날린다. 그의 분노가 사라졌기를 바란다. 부디 쌓인 업장이 흩날리는 꽃잎과 같이 소멸하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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