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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7년 9월호, 세상마주보기] 정겨운 ‘뚱이’ 그리고 나 - 최유나

신아미디어 2017. 9. 21. 16:59

"저 하늘나라에는 지금까지 나와 함께했던 존재들이 모여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어렸을 적 키웠던 금붕어, 우리 집에서 태어났던 아기 잉꼬들과 그 엄마, 아빠 잉꼬, 주황색 카나리아들 그리고 아직도 우리 집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뚱이’, 그리고 그것들 한가운데에 있을 저세상의 엄마까지. 나와 같이 보냈던 시간이 그들에게 행복이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정겨운 ‘뚱이’ 그리고 나   -   최유나

   ‘뚱이’의 앞 다리에는 굵은 주삿바늘이 꽂혔고, 텔레비전 뉴스에서나 시청하던 ‘프로포폴’과 심장을 멈추게 한다는 물약이 녀석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미 의식도, 기력도 없이 혀를 내빼물고 축 처져 있던 녀석은 자신의 핏줄로 스며들어 가는 주사약이 느껴지는 듯 온몸을 두어 번 움찔했다. 그것으로 ‘뚱이’의 14년의 삶은 끝이 났다. 긴 고민의 시간을 보내며 결정한 녀석의 안락사였지만, 존재의 생명을 거두는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염증으로 잔뜩 부풀어 있던 ‘뚱이’의 배는 호흡이 멈추어지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홀쭉해졌다.
   반려견을 키우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겠지만 나는 ‘뚱이’와의 이별이 이렇게 금방 올 줄은 몰랐다. 14년을 사는 동안 병치레 한 번 없었고, 그저 건강하게 펄떡펄떡 잘만 뛰어다니던 녀석이었다. 개의 평균수명이 10년 조금 넘는다 해도 ‘뚱이’는 시골집 마당에 어울리는, 튼튼한 잡종견이니 15년, 아니 20년은 충분히 나와 함께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답답한 생각이었다. 개는 덩치가 클수록 노화가 빨리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지난여름, ‘뚱이’는 종일 바닥에 엎드려만 있었다. 추우나 더우나 사람 곁에 있고 싶어서 방문이 열리기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오던 녀석이,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방안으로 들어오라고 아무리 불러도 꼼짝하지 않았다. 작년 여름은 유별나게 더웠고, 사람보다 개는 체온이 더 높다고 하니 그저 날씨 탓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노쇠의 시작이었다.
   개도 늙어갔다. ‘뚱이’의 이마에 빼곡하던 황금색 털 사이로 흰 털이 드문드문 보이고, 나중에는 흰 수염까지 돋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 첫 흰 머리칼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당황했다. ‘뚱이’의 노쇠는 결국 눈에까지 이르러 이 늙은 개는 세상을 떠나기 전 5, 6개월 동안 시력을 잃은 채로 살았다. ‘뚱이’에게도 죽음의 천사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함께하던 생명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엄마가 세상을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나는 온몸으로 그 과정에 맞서야 했다.
   걷기도 싫어하는 녀석을 둘러메고 병원으로 향하는 길, 지나가는 사람들은 강아지가 무척이나 귀엽다며 말을 건넸다. 까맣고 동그란 눈에 살짝 처진 두 귀를 하고, 내 어깨 위로 앞발을 가지런히 얹은 모습은 누가 봐도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고마운 말에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다만 치료만 받으면, 나은 ‘뚱이’를 안고, 그 길을 다시 걸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의사는 ‘뚱이’의 상태가 무척 안 좋다며, 지금까지 집에서 큰일 없이 지낸 것이 기적이라는 말을 했다. 일단 2, 3일 입원을 하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지만, 인간도 ‘뚱이’도 모두 자연에서 온 것, 늙음과 죽음을 되돌릴 수 있는 권한은 피조물인 우리에게 결국은 없었다.
 
   아직 우리 집 곳곳에는 ‘뚱이’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뚱이’가 쓰던 밥그릇도, 녀석의 사진도 그대로 있다. 그리고 입원하기 전, 약이 먹기 싫어서 주둥이에 약을 묻히고 도망가다가 녀석이 집안 벽에 묻힌 얼룩도 여전히 그대로이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그대로 그 자리에 두었다. 고통 때문에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다가도 내 손이 자신의 몸에 닿는 순간, 소리를 속으로 삼키던 뚱이, 그랬던 녀석의 흔적들을 후다닥 치워버리는 것은 ‘뚱이’에 대한 애정이 아니고 예의가 아니었다. ‘뚱이’가 있든 없든 이곳은 ‘뚱이’의 집이고, 나는 그 모든 흔적들을 소중히 간직할 책임이 있었다.
   개를 또 키우고 싶으냐는 사람들의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말한다. 내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짐짓 놀라며, 병들어 죽을 때를 지켜보는 과정이 너무 힘들지 않느냐고 다시 묻는다. 하지만 그것들의 죽음을 생각하기에 앞서 항상 곁에서 고물거리는 그 움직임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게다가 늙음과 죽음은 그 어느 누구라도 겪어야 하는 과정이리라. 나 역시 늙고 병들어 죽을 피조물인 이상, 다른 것들의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갈은 없다. 그것은 그대로 오롯하게 받아들여야 할 생명의 속성인 것, 신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나’라고 말했듯이 생명에게 있어 죽음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그저 그것들을 품어 안고 함께 가는 것이 마땅하다.
   저 하늘나라에는 지금까지 나와 함께했던 존재들이 모여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어렸을 적 키웠던 금붕어, 우리 집에서 태어났던 아기 잉꼬들과 그 엄마, 아빠 잉꼬, 주황색 카나리아들 그리고 아직도 우리 집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뚱이’, 그리고 그것들 한가운데에 있을 저세상의 엄마까지. 나와 같이 보냈던 시간이 그들에게 행복이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지금 앞서 간 그들과 함께하지 못해 서러운 마음 정도는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 우리는 언젠가 어디서든 만나게 될 테니까. 내 손길이 아픈 ‘뚱이’한테 위로가 되었듯이 ‘뚱이’의 다정한 눈과 보드라운 털, 그리고 포근하던 ‘뚱이’의 체온은 나에게 영원한 위안이 될 것이다. 내 마음 한구석에는 ‘뚱이’가 여전히 그 맑은 눈망울을 굴리며 뛰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