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밝히는 등불 같은 존재는 아닐지라도 세상을 위해 내 몸을 태우는 촛불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탁한 목소리도 더 아름다운 화음으로 다듬어 가겠습니다. 진정 기쁜 박수로 환하게 웃어 줄 우리 가족에게 감사합니다. 너무 병약했던 탓에 모질거나 강인하지는 못했지만 뜨거운 사랑이 있어 그 힘으로 껍질을 깨고 나옵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정신으로 정진을 다짐해 봅니다."
게임 - 서정자
“나도 한잔 줘.”
체념하듯 남편이 포도주잔을 내민다. 그가 응원하는 야구팀이 경기에서 역전당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법 많은 점수 차로 앞서 나가고 있었다. 자기가 경기에 출전한 듯 의기양양했다. 이대로 한 이닝만 잘 버티면 확실한 승리였는데.
구회 초 잘 던지던 투수를 바꿨다. 상대팀 타자가 하나둘 공을 치고 나가기 시작하더니 만루 홈런을 맞았다. 동점이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경기장에서 환호성을 지르는 팬들과 야유를 보내는 관중으로 나뉘었다. 모든 게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패색이 짙은 경기에 감독 때문이라고 남편은 푸념한다.
“원래 야구는 구회 말 투 아웃부터래, 한 번 더 기회가 남았으니 지켜봐.”
목이 타는 듯 포도주를 단숨에 비우는 그에게 해 주는 말이다. 벌써 자정이 가까워온다. 오늘 저녁 내내 길고 지루한 시간을 그는 흥분과 탄식을 번갈아 가며 텔레비전 속에 눈과 귀를 빠뜨리고 있다.
그는 야구광이다. 야구경기만 있으면 몇 시간씩 리모컨을 독차지한다. 가끔 주말에 시청하는 가족 드라마는 진작 포기한 상태다. 기다림이 지겨워서 시간이 짧은 다른 스포츠를 권유해 보기도 하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다.
그는 프로야구가 시작하던 해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지역 연고팀을 응원해 왔다. 경기를 이기는 날이면 선수처럼 기뻐했고, 패하는 날이면 경기 중 실수를 저지른 선수나 감독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곤 했다. 따지고 보면 남편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단지 좋아하는 팀의 경기 결과에 따라 즐거워하고 언짢아하는 그의 단순함이 우습기도 하지만 늘 한결같은 그가 존경스럽다.
겨울이 지나고 채 봄이 오기도 전에 시작하는 야구 경기는 다시 초겨울이 다가올 무렵에나 끝이 난다. 일 년의 삼 분의 이를 길고 긴 대장정의 경기를 치른다. 이 과정에 정들었던 감독도 친구나 형제같이 지내던 선수도 흡족한 성적을 내지 못하면 자리가 바뀔 수 있다. 결과에 따라 많은 희비가 엇갈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스포츠는 별로 즐기지 않는다. 이편저편 편 가르기도 마음에 안 들거니와 이기고 지는 결과가 싫기 때문이다. 강자만 살아남는 냉정한 세상의 이치와 닮은 듯해서다. 경기에 진다고 해서 약한 선수도, 이긴다고 해서 강한 선수도 아니다. 한순간의 경기력에 따라 강약이 갈리고, 그 결과로 죄인이 되거나 영웅이 되는 게임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
침묵으로 돌변한 남편은 쉬이 잠이 들 것 같지 않다. 나 또한 거실 탁자 위에 포도주 한 잔을 따라 놓고 멍하니 앉아 있다. 오늘 직장으로 찾아왔던 친구의 어두웠던 얼굴이 떠나질 않는다. 갑자기 회사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다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여러 날 동안 회사의 경영권을 두고 밀고 당기던 협상이 결렬되면서 직원들은 일터를 잃게 된 모양이다. 물론 아직 다 끝난 건 아니라는 여지를 주고 있지만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짙은 그늘은 현 상황을 처절히 말해 주고도 남았다. 오늘 저녁 내내 남편이 즐기고 있는 야구경기처럼 그들의 게임에는 역전이나 동점은 없을 것 같았다. 승리에 취한 점령군처럼 출입문을 거세게 밀어제치고 들어올 새 경영자는 현재의 주인은 물론이고 열정을 가지고 일하던 직원들을 교체할 예정이라는 말에서 그녀의 깊은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새 경영자가 떠나라면 떠나야지만 직장이란 의미가 남달랐던 그녀에게는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는 작은 여지에 미련이 자꾸 가는 모양이다. 회사를 창립하던 그 해부터 지금까지 몸담아 온 곳이다. 그 힘들고 어려웠던 세월을 변함없는 마음으로 젊음을 불살랐던 회사이니, 사무실 곳곳에 눈물로 얼룩진 흔적도 남아 있을 것이다. 시선가는 곳마다 아린 추억이 어려 있기도 하겠다. 처음 직장에 나가던 때에 좋아하던 그녀의 모습이 내 뇌리에 가득하다.
평생 그곳에서 일만 하면서 머물려고 한 것은 아니란다. 그곳이 지루하거나 따분해서 떠나고 싶을 때 마음 편하게 그만두어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게임에 패배한 선수가 외면당하고 내팽개치듯이 문밖으로 내쳐지는 건 상상도 못했단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바뀔 운명에 힘들어 하던 친구의 모습이 이 밤의 휴식을 밀어낸다.
느닷없이 우리는 유니폼을 입은 야구선수라는 생각이 밀물져 온다. 안타를 치고 일루에 나가 흡족해 하는 내 모습이 있는가 하면, 안타를 얻어맞은 투수처럼 울상이 된 친구의 모습도 있다.
남편의 한숨 소리가 흘러나온다. 남편은 아직도 야구경기 중일까. 그렇지 않으면 지금은 어떤 게임에 끼여 고뇌하고 있을까.
서정자 ---------------------------------------------------
경남 거제 출생. 거제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료.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당 선 소 감
종이컵에 봉지커피와 따뜻한 물을 붓고 방금 받은 전화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수필의 본질도 모르는 나에게 등단이라니…. 글의 형태가 뭔지도 간격조차도 구분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감사하기보다는 무서워집니다. 애벌레가 날갯짓을 위해 껍질을 벗듯 새로운 수필 세계가 얼마나 환희에 찬 인생일지 떨리는 마음으로 첫 걸음마를 하려 합니다. 얼마나 더 성숙해질 수 있을지 자신감보다는 두려움이 더 커집니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기운을 북돋아 주던 문우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소중한 그 무엇을 주기 위해 땀과 열정을 다해 지도해 주시던 교수님께도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어둠을 밝히는 등불 같은 존재는 아닐지라도 세상을 위해 내 몸을 태우는 촛불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탁한 목소리도 더 아름다운 화음으로 다듬어 가겠습니다. 진정 기쁜 박수로 환하게 웃어 줄 우리 가족에게 감사합니다. 너무 병약했던 탓에 모질거나 강인하지는 못했지만 뜨거운 사랑이 있어 그 힘으로 껍질을 깨고 나옵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정신으로 정진을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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