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동화가 가지는 대표적인 특징은 읽는 문학, 보는 문학, 듣는 문학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성인문학을 읽어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방법으로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동화책 읽어주세요.”나 “동화책 읽어줄까?”라는 말을 어색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읽어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학문적으로도 그림동화의 읽어주기에 효과에 대한 연구도 많고 그 효과가 입증되고 있다. 그림동화를 읽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이 이 지면에서는 활용할 수 없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이 지면에서 읽는 문학과 보는 문학으로써 그림동화를 마음껏 소개하려 한다."
트라우마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 김소옥
그림동화가 가지는 대표적인 특징은 읽는 문학, 보는 문학, 듣는 문학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성인문학을 읽어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방법으로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동화책 읽어주세요.”나 “동화책 읽어줄까?”라는 말을 어색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읽어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학문적으로도 그림동화의 읽어주기에 효과에 대한 연구도 많고 그 효과가 입증되고 있다. 그림동화를 읽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이 이 지면에서는 활용할 수 없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이 지면에서 읽는 문학과 보는 문학으로써 그림동화를 마음껏 소개하려 한다.
지난 글에서는 철저히 그림을 통해 그림동화를 분석해 보았고 이번 글에서는 읽는 문학으로써의 그림동화를 분석해보려 한다. 이 또한 재미나고 의미 있는 일이라 자신한다.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칼데콧 아너 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도널드 크루스의 작품이다. 도널드 크루스는 1938년 미국 뉴저지 주 뉴어크에서 태어난 흑인 작가로 미국 그림책 계에서는 매우 드물게 흑인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작가다. 칼데콧 상을 받은 《트럭》과 《화물 열차》를 비롯하여 스무 권이 넘는 그림책을 만들었으며 지금은 뉴욕 브루클린에서, 역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인 부인 앤 요나스와 살고 있다. 도널드 크루스는 그림책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 글을 줄여 그래픽적인 그림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에 주력했다. 크루스의 작품은 하나같이 간명하고 단순하다. 성격을 지닌 캐릭터들을 거의 등장시키지 않는 것이 크루스 작품의 특징이었으나 최근에는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작품들도 선보이고 있다. 따라서 지금 소개하는《지름길》은 간명하고 단순하며 성격을 지닌 캐릭터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다.
《지름길》은 오래전 1992년에 나왔으나 국내에는 2011년에 출간되었다. 그림의 전체적인 톤은 채도가 낮고 어두운 갈색, 어두운 녹색으로 입혀져 있고 제목 또한 경고하듯 불길한 긴장을 내포하는 빨간색으로 “지름길”이라고 쓰여 있다. 작가의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실화)으로 쓴 책인데 위험한 짓을 한 주인공과 사촌들만의 비밀을 담아낸 내용이다. 도널드 크루스는 《지름길》에 나오는 내용과 같이 여름이면 시골 할머니 댁에서 지냈는데 그 집이 기찻길 가까이 있었고 이 책에 나오는 무서운 사건 역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집까지 지름길로 걸어가기로 한 아이들이 겪는 평생 잊지 못할 공포,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고작 몇 개의 문단으로 솜씨 좋게 그려 낸다. 페이지 밖으로 튀어 나갈 기세로 질주하는 열차 연출, ‘뚜우우, 칙칙폭폭’ 같은 효과적인 의성어, 절제된 드라마에 어린이다운 감수성이 그대로 담긴, 현대적 감각의 고전이란 평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이 어린 시절 여름마다 시골 할머니네 집에 놀러 가면 만났던 기찻길. 어른들은 기찻길 근처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으나 아이들은 놀다가 시간이 늦어 어두워져 지름길인 기찻길로 걸어간다. 화물열차가 지나가는 시간은 알 수 없어서 큰길로 다녀야만 했는데 그날은 아이들이 어른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기찻길로 걸어간다. 기찻길 옆은 가파른 비탈로 찔레덤불이 덮여 있고 아래에는 물이 있다. 아이들은 무섭고 두려울수록 함께 웃고 소리치며 노래를 부르고 몸싸움을 하며 걸어간다. 그러다 기차소리가 갑자기 들려와서 아이들은 뒤로 되돌아가 가다가 더 가까이 기차가 다가오자 비탈로 뛰어내리게 된다. 가까이 점점 더 다가오는 기차소리를 그림책에서는 점점 더 큰 글씨로 긴박감을 표현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강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석탄을 실은 화물열차가 멀리 사라지는 장면은 작은 글씨로 표현하면서 위험도 함께 사라짐을 잘 표현하였다. 가슴을 쓸어안으며 위험했던 순간을 공유했던 아이들은 말 한마디 없이 어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이들도 그때의 일을 말하지 않았으며 두 번 다시 지름길로 가지 않았다.
이 작품에 대한 평들을 살펴보면 대체로의 공통점이 있다.
•흥미진진했던 탈선행위가 본격적인 공포로 변하는 상황이 고작 몇 개의 문단으로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위험이 코앞에 닥칠 때까지 나아가는 어린이다운 천진함과 낙천성, 아이들의 감수성을 과장 없이, 과잉 없이 표현한 작가의 진정성이 돋보인다.
•이 책은 여타의 어떤 교훈적인 책보다 더 강한 교훈을 준다. 아이들은 호기심이 강하고 또 혼자보다 무리지어 있을 때 위험한 행동을 대담하게 한다. 그리고 위험할 뻔한 일을 겪고 자신들의 무모함을 잘 알기도 한다. 그림책의 아이들은 혼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그 대가를 치렀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아이들의 일상 중에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것, 쉽게 갈수 있는 길, 손쉽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들. 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요즘 아이들의 환경이다. 그런 아이들의 심리변화를 잘 표현해 놓은 훌륭한 작품이다. 갈수록 사회는 넘쳐나는 정보 속에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 원칙마저 흐릿해지고 있다.
위와 같이 이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은 ‘지름길’이라는 개념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어른들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길 즉, 탈선이나 일탈행위로 보고 그것을 시도해서 위험을 인지하고 더 이상 그 길을 가지 않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다. 이는 충분히 위험의 상황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점과 그것을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좋은 것이었으면 다시 시도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름길’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끌어와 빠른 길, 손쉬운 방법으로 보는 견해다. 결국엔 어른들이 추구하는 길을 의미하고 이것을 흉내 내는 아이들이나 이것을 강요받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는 하나는 어른들이 가지 말라고 하는 경계선으로, 하나는 어른들이 가고는 있지만 정석적이지 못한 어른들의 경계선으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전자는 어른들의 말을 옹호하고 권장하는 것처럼 보이고 후자는 어른들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 말라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어느 글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이 두 가지의 견해 모두에 찬성하고 두 가지 모두의 견해에 동조한다. 그럼에도 이 두 견해의 공통점은 이 책에서 나오는 ‘지름길’이 결국엔 선악의 입장에서 보면 나쁜 길, 잘못된 길이라는 입장이다. 그래서 다시는 그 길을 가지 않고 다시는 말조차 하지 않은 그들의 행위를 격려하고 당연시한다는 점이다. 나는 바로 이 점에서 출발해 그들이 간 ‘지름길’이 결코 잘못된 길이 아니고 위대한 길이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본문으로 들어가지 전에 이 책의 헌사에 나온 문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이 말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희곡 제목인 《끝이 좋으면 다 좋아(All’s Well That Ends Well)》을 떠올리게 한다.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박대하고 멀리 하는 남편을 기지와 재치를 이용하여 차지하는 여성의 이야기로 문제극, 혹은 어두운 희극으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이 극은 극의 제목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해피엔딩의 희극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둡고 심각한 풍자를 담고 있는 문제극으로 분류된다. 결말에 등장인물들이 죽거나 파멸되지 않기 때문에 희극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극에서 다루어지는 상황은 대단히 비극적이다.
또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이 말하는 ‘피크엔드 법칙(peak-end rule)’을 떠올려 볼 수도 있다.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어떤 경험에 관련된 인상(기억)은 절정에 달했을 때의 감정과 마지막 순간에 느끼는 감정의 평균으로 결정된다고 한다. 그는 과거의 기억은 영화가 아니라 스냅 사진처럼 단편적으로 기억되기 때문에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심리를 설명하고 있다. 어차피 인간은 경험 따로, 기억 따로인 불합리한 존재이다. 그리고 어떤 사건을 떠올릴 때 마지막이 어땠는지 더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오래도록 좋은 기억을 갖고 행복하려면 좋은 결말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를 조사하면서 이 말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실제로 과정을 무시하는 듯한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을 상당히 싫어하는 유형 중에 속한다. 과정에서 느끼는 희열과 고민들에게 더 많은 점수를 주는 것이 내 생각의 패턴이다. 그런 나에게도 이 말이 설득력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위의 두 가지 내용에서 출발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말하고 있는 ‘끝이 좋으면 다 좋아.’라는 말은 상당한 반어적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정말로 그 많은 고통을 겪어서 이겨냈다면 그 과정마저 행복해질 수 있는가? 셰익스피어의 이 희곡의 내용을 보면 희곡이지만 결국엔 비극이라는 평을 받은 것처럼 결과의 만족도로도 치유될 수 없는 과정의 고통이 있음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설명에 따르면 대니얼 카너먼의 피크엔드 법칙은 셰익스피어의 말과는 반대의 개념처럼 보인다. 끝에서 맛보는 희열 이 과정의 고통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니 분명 끝이 반드시 좋아야 할 필연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내용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피크엔드 법칙이 통하려면 한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기억은 절정에 달했을 때의 감정과 마지막 순간에 느끼는 감정의 평균값이라는 점이다. 절정에 달했을 때의 고통값과 마지막 순간의 행복값의 편차가 심하다면-고통값이 행복값보다 훨씬 크다면-결국엔 기억은 고통만을 기억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은 ‘끝’이 아니다. 끝이란 의미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를 끝마친 다음이 진정한 끝인 것이다.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 또한 과정에 속하므로 피크엔드 법칙의 진정한 의미는 ‘마지막 순간이 좋으면 다 좋아질 확률이 높다.’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라 할 수 있다.
내가 왜 이렇게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말에 집중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이것은 내가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 이 작품의 분석의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끝이 좋았나? 이 이야기를 경험한 이들은 정말 좋은가? 과정은 정말 나쁜 것이었나? 이 이야기는 정말 끝난 이야기인가?’ 내게는 이러한 의문들을 가지게 한 말이었고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분석을 해보고 싶게 한 말이었다. 만약 이 헌사가 없었다면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을 만큼 내게는 중요한 말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과정이 좋지 않았다는 내재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이 말에 대한 반감과 함께 결코 좋은 결과도 아니었다는 생각을 이 작품 안에서 나는 찾고 싶었다. 도망하고 피신하고 침묵하는 이들의 결과 즉, 끝이 좋았다고 말할 수 없음이 이 작품을 내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 작품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글에서 나오는 ‘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 글에는 다섯 종류의 길이 나온다. 큰길, 기찻길, 둑길, 건널목, 샛길이 그것이다.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이 다섯 종류의 길에는 ‘지름길’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름길’이라는 단어는 책의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에 두 번 나온다. 지름길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앞부분의 글을 끌어오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기찻길을 따라 지름길로 가기로 했어요. 우리는 큰길로만 다녀야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늦었고 날이 어두위지고 있어서, 그냥 기찻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여객열차가 언제 지나가는지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하물열차는 정해진 시간이 없었어요. 언제든지 지나갈 수 있었지요. 우리는 큰 길로만 다녀야 했어요.
지름길을 선택한 이유를 ‘시간이 늦었고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서’라고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큰길로만 다녀야 했다.’고도 쓰고 있다. 이것은 무엇일까? 이 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시간이 늦었다.’와 ‘큰길로만 다녀야 했다’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정한 사람이 누구일까 하는 문제이다. 이 작품에서라면 부모들, 어른들이다. 즉, 기존의 규칙과 규범을 정해놓고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존재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권력이라는 말을 지나치게 엄격하고 폭력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부모도 자녀들에게는 상당한 권력자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이 작품을 평하는 기존의 글에서는 기찻길이라는 위험한 길을 선택한 아이들의 행동을 혼자보다 무리지어 있을 때 위험한 행동을 대담하게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기찻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귀가 시간에 늦었다는 점, 즉 기존의 규칙을 지켜내기 위해서였다. 결코 위험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은 ‘날이 어두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택해야만 했다. 결국 그러한 선택을 강요한 것은 정해진 규범과 규칙이었던 것이다. 부모의 꾸지람보다 어둠에 대한 공포를 택해야 했던 그들의 선택에 나는 못내 가슴이 아프다.
또 ‘우리는 큰길로만 다녀야 했어요.’를 두 번이나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쉽게는 위험을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의 목소리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의 사이에는 그네들이 기찻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 결국엔 화물열차 즉, 위험을 경험한 후에 큰길로 향하는 그들의 선택마저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이중 장치인 것이다. 심리학적으로는 이처럼 두 가지의 상호 대립되거나 상호 모순되는 감정이 공존하는 상태를 양가감정(ambivalence)이라 말한다. 그들의 선택을 모험이나 호기심, 반항 정도로 치부해버리지 않기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위의 글에서 또 살펴보아야 할 한 가지는 ‘여객열차’와 ‘화물열차’이다. 여객열차는 ‘언제 지나가는지 알고 있는’ 위험요소이다. 익숙하고 예견되어 있는 위험이기 때문에 피할 수 있고 대비할 수 있는 위험이다. 그 반면 화물열차는 ‘정해진 시간이 없고 언제든지 지나갈 수 있는’ 위험요소이다. 익숙하지도 않고 예견할 수도 없는 위험이기 때문에 피할 수도 없고 대비할 수도 없는 위험인 것이다. 예를 들면 여객열차와 같은 위험은 예견할 수 있고 누구나 겪는 일반적인 스트레스 즉, 학업이나 출산, (천수를 누린) 죽음과 같은 것이다. 화물열차와 같은 위험은 예견할 수 없고 특별한 스트레스 즉,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맞게 되는) 죽음, 폭력, 자연재해와 같은 것이다. 심리학적으로는 화물열차와 같은 위험을 경험하고 이를 극복해내지 못하는 상황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라고 말한다.
이것을 너무 비약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면서 그러한 내 생각의 근거를 제시하려 한다.
기차가 지나갔어요. 모두 무사했어요. 우리는 다시 기찻길로 올라갔어요. 서둘러 건널목으로 돌아가 큰길로 나왔어요. 우리는 말 한마디 없이 걸어갔어요. 우리는 할머니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엄마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지름길로 가지 않았어요.
이 글에서는 위험을 경험한 후의 행로가 나타나 있다. 기찻길-건널목-큰길 순이다. 이미 화물열차가 지났으니 위험 노출 확률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왜 뒤돌아갔을까? 이는 바로 심리적 트라우마(trauma)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트라우마(trauma)는 일반적인 의학용어로는 ‘외상外傷’을 뜻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을 말한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들은 어둠에 대한 공포를 억누르기 위해 애쓰면서 기찻길을 가고 있었다. 책 내용을 살펴보면 그들은 어둠에 대한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웃음소리, 노래, 몸싸움, 돌멩이 던지기’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렇게 힘겨운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화물열차라는 거대한 위험은 트라우마가 되어 그들의 진행을 막아선 것이다.
더욱 확실한 근거는 그 일 이후 그들이 ‘오랫동안 침묵했다’는 점이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무언의 대상이 ‘할머니, 어머니, 아무한테도’라고 말한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동안 그들의 고통은 더욱 더 커져갔을 것이다. 꾸지람 때문에 말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용담 같은 것이었다면 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권력의 높이가 비슷한 사람들에게까지 말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할 만큼의, 비밀이 되어버려야 했던 이유가 있었던 때문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이러한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그들끼리는 서로 말했을까? 이 글에 고민하는 사람들은 심각한 트라우마가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이들이 겪었던 커다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단언할 수 있다. 그들끼리도 서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철저히 차단하기 위해서 심지어 자신에게조차 허용하지 않았을 기억인 것이다. 심리학에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특징 중 하나이다. ‘외상과 관련되는 생각, 느낌, 대화를 피한다. 외상이 회상되는 행동, 장소, 사람들을 피한다.’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두 번 다시 지름길로 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로 앞 단락의 설명과 연결시켜 차단을 떠올리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 글 안에는 매우 중요한 사고의 패턴을 담고 있다. 그들이 간 곳은 ‘기찻길’이었는데 그들이 다시는 가지 않은 곳은 ‘지름길’이었다. 둘이 같은 곳이 아니라는 것은 앞에 인용한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기찻길을 따라 지름길로 가기로 했어요.’ 만약 기찻길과 지름길이 같은 것이었다면 ‘지름길인 기찻길로 가기로 했다.’라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둘은 엄연히 다른 장소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둘을 동일시하고 있다.(여기에서의 동일시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기제로써의 동일시가 아닌 문학적인 동일시를 말한다.) 이것은 일반화의 오류 또는 과일반화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작은 사건에서 굉장히 포괄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는 현상을 의미한다. 화물열차가 위험하니 기찻길이 위험한 것처럼, 기찻길이 위험한 것인데 지름길이 위험한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이고 이것이 여러 가지 방어기제를 야기시킨다. 이럼에도 이들의 경험이 트라우마가 아니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이들의 선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이들에게는 네 번의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기찻길과 큰길 중 하나의 선택, 기차소리를 듣고 위험 여부를 파악하는 선택, 위험 후 행로에 대한 선택, 사건이 끝난 후 침묵 여부에 대한 선택이다. 이 중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이미 설명했고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대한 선택의 순서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려 한다.
① 우리는 살펴보았어요. 우리는 귀를 기울였어요. 우리는 기찻길을 따라 지름길로 가기로 했어요.
② “기차 소리다!” 모두들 발을 멈췄어요. 모두들 귀를 기울였어요. 우리 모두 기차 소리를 들었어요. 앞쪽의 샛길까지 그대로 달려가야 할까요, 건널목으로 되돌아가야 할까요?
①의 글은 첫 번째 선택을 하는 과정이고 ②의 글은 두 번째 선택을 하는 과정이다. ①의 과정을 보면 ‘살핌-귀 기울임-결심의 순서’로 되어 있다. ‘살핌’이라는 과정은 자신의 환경이나 마음 등을 살피는 것이고 ‘귀 기울임’이라는 것은 외부의 환경이나 타인들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나도 살피고 타인도 살폈으니 순서에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②의 과정을 보면 ‘한 사람의 외침(“기차소리다.”)-발 멈춤-귀 기울임-선택’의 순서로 되어 있다. 둘의 과정이 어떻게 다를까? ①의 선택은 위험한 결과를 낳았고 ②의 선택은 위험으로부터 그네들을 보호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니 둘의 선택의 과정에는 반드시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①의 과정을 살펴보면 나와 타인을 살핀 후 곧바로 무작정 무리의 결정에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직업을 선택하라, 친구를 선택하라, 사랑을 선택하라, 왜 선택해야하는 거지? 난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 그 첫 번째 잘못인 것이다. 또 버지니아 울프는 〈월요일 혹은 화요일 Monday or Tuesday〉에는 “타인의 시선은 우리의 감옥이며 그들의 생각은 우리의 새장이다.”라는 글이 있다. 감옥과 새장에 무작정 뛰어든 것이 그 두 번째 잘못인 것이다. 나를 살피고 타인을 살핀 후 반드시 그것들을 통합하고 분석하고 다면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있었다면 그들 모두가 그런 위험에 노출되는 일만은 없었을 것이다.
②의 과정 즉, 위험을 인지하는 순서를 살펴보면 실체가 아닌 허상이거나 표상인, 그러면서도 위험을 알리는 신호인 ‘기차 소리’를 맨 앞의 한 사람이 들었다. ①과 같은 과정에서 선두가 힘이 세면 뒤로 돌아가거나 나머지 무리 중 한 사람이 힘이 세면 앞으로 그냥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멈춤’ 과정과 ‘귀 기울임’ 과정을 통해 ‘우리 모두 기차 소리를 들음’ 과정을 이루어냈다. 대세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샛길’과 ‘건널목’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들이 선택한 것은 결국 ‘비탈길’이었다. 평소에는 찔레덤불과 뱀이 무서워 선택하지 않았던 선택을 이끌어 낸 것이다. 결국 양자 선택 중 둘 모두를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한 셈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분석에 따르면 사람은 보통 하루에 150가지의 선택을 내린다고 한다. 그 선택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누구의 기준에 의한 것인지, 누구의 범위를 따른 것인지, 누구의 의지에 의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 선택하지 않아야 할 권리 또한 우리는 가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트라우마를 가지지 않기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 현명한 선택을 한다고 해서 트라우마가 생길만한 일과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선택은 반드시 인식과 함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 기본을 두어야 한다. 이 진리를 뒤늦게 깨달은 것에 대해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간절히 바란다.
김소옥 -----------------------------------------------------
독서치료전문가, 《인간과문학》 신인문학상 동화부문 당선(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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