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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4월호, 테마수필: 백제를 품은 도시, 익산을 가다] 선화공주의 설화를 찾아서 - 박귀덕

신아미디어 2015. 5. 1. 09:29

"설화가 역사로 재조명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 ‛관세음응험기(중국기록)’전단을 보면서 만약에 일본의 사찰 문서고에서 이 서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지금도 선화공주와 서동왕자는 설화로 남았겠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백제 무왕께서 지호밀지(왕궁리유적)로 천도하시어 새로이 정사를 경영하였다.”라는 기록이 발견되어 무왕의 이야기가 역사가 되었다고 전해지니, 한 줄의 문자가 천년을 살아서 설화를 역사로 만들어 놓으니, 그 문자의 힘은 대단하다."

 

 

 

 

 

 

 

 선화공주의 설화를 찾아서        -  박귀덕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이야기를 들었다. 서동왕자가 용화산 자락에 왕궁을 짓고 신라 진흥왕의 딸 선화공주를 데려와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설화였다.
   그 설화의 근원지인 익산의 ‘왕궁리유적전시관’을 찾았다. 그 전시관 곁으로 5층 석탑이 있고, 그때의 이야기 주인공들이 살았다는 궁궐 터가 있다. 건물은 다 헐리어 간데없고, 텅 빈 잔디밭만이 허허롭다. 햇빛은 밝아도 사람들이 살지 않는 빈들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백제의 중흥기인 무왕이 정무를 보던 곳, 문무 대신들과 내시, 궁녀들이 궐 안을 휘젓고 다녔던 곳, 선화공주와 서동왕자가 왕과 비로 살았던 곳이라 하기엔 너무나 쓸쓸한 벌판이 되어 있었다.
    신라의 왕궁 터 금성(경주)에 가면 천년의 고찰 불국사, 별을 보며 국가의 명운을 점쳤던 첨성대, 중국 서태후의 여름별장처럼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왕의 유원지를 만들었다는 안압지가 있다. 바다를 지키겠다고 스스로 해신이 된 문무대왕릉,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세웠다는 감은사지도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왕관과 왕족들의 장신구들, 서민들의 생활 도구들, 사람들의 의상과 그 시대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백제의 왕궁 터 사비성(부여)에는 왕궁리 오층석탑과 닮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도, 백제 왕들의 능뫼인 능산리고분에도 옛 사람들의 흔적은 없다. 아쉬운 마음에 고란사에 들러 삼천궁녀들이 낙화처럼 떨어졌다던 바위로 허전한 마음을 달랠 뿐이다. 그럴 때면 안개처럼 스멀스멀 몰려오는 생각, 의자왕은 정말로 궁녀를 삼천 명이나 두고 사는 호색한이었을까? 물론 그만큼 궁녀가 많았다는 것을 가리켜 하는 말이었겠지만 어쨌든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것이었으니, 망국의 왕에게 ‘백성과 정사는 뒤로하고 삼천궁녀와 방탕한 생활을 해서 나라가 망했다.’고 덮어씌운들 누가 변호해 줄 것인가? 의자왕은 망국의 원한을 풀지 못하고 저승에서 억울해 하며 참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자못 숙연해지곤 했다.
   ‘왕궁리유적전시관’ 안으로 들어서니 1400년 전 백제인들의 찬란한 문화가 전시관 유리벽 안에서 관광객을 맞이한다.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기와들, 왕실에서나 사용되었을 금과 은 그리고 유리 제품들을 가공했을 공방 터, 현대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정화시설을 연상케 만드는 화장실의 오수배출시설, 흙으로 빚은 항아리, 연화 문양과 태극문의 수막새들, 왕관에 매달아 놓은 신생아를 닮은 곡옥, 정교하게 빚어진 완, 합,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이해하기 힘든 뒷간에 화장지 대용으로 사용되었다는 다 닳아빠져 반질거리는 뒤처리용 막대기통 등, 그 많은 유적을 통해 그 시대의 장인들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드넓은 잔디밭에 무왕과 왕비가 사는 궁궐을 짓고, 궁궐 뒤쪽으로 잘 다듬어진 안압지 같은 정원에서 시종을 거느리고 산책하는 선화공주를 그려본다. 뜰에는 관복 입은 문무백관의 형상을 만들고, 그들 속에서 정무를 보고 있는 무왕의 위엄을 세워 본다. 궁궐의 잔칫날, 기녀들과 악사들이 서로 흥을 돋우고, 얼큰하게 취한 호족들과 신하들이 무왕과 어우러져 노는 잔치판을 생각하니, 갑자기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들리고,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하다. 잔디밭에서는 왕자와 공주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평화롭다. 내시, 궁녀들의 바쁜 걸음에 궁궐이 활기차다. 과식을 한 선비가 공중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막대기로 뒤처리를 하고 뛰쳐나온다. 어느 궁궐 박물관에서도 볼 수 없는 해학적인 모습이다. 전시관 유리벽 속에 갇힌 인형들을 풀어 놓고, 백제 부흥기의 무왕을 상상한다.
   설화가 역사로 재조명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 ‛관세음응험기(중국기록)’전단을 보면서 만약에 일본의 사찰 문서고에서 이 서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지금도 선화공주와 서동왕자는 설화로 남았겠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백제 무왕께서 지호밀지(왕궁리유적)로 천도하시어 새로이 정사를 경영하였다.”라는 기록이 발견되어 무왕의 이야기가 역사가 되었다고 전해지니, 한 줄의 문자가 천년을 살아서 설화를 역사로 만들어 놓으니, 그 문자의 힘은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