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규님의 단편소설 '고향유정'을 소개합니다.
고향유정 / 신동규
교외로 나오자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눈앞에 전개되던 싱그러운 자연은 너릿재 터널 속에 잠깐 몸을 숨겼다가 다시 요염한 자태를 드러냈다. 29번 도로. 진갑성 씨는 승용차를 운전하여 이 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차창을 열어 자연의 향취를 음미하는 한편 동영상처럼 전개되는 산천경계를 두루 살피고 있었다. 몇 해만의 귀향이던가. 그는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는데 애를 먹었다. 그는 위암 치료를 위해 j대병원에 장기간 입원한 바 있었다. 성공리에 수술을 마치고 퇴원하였으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퇴원 후에도 상당 기간 항암치료를 비롯한 외래 치료와 요양 과정을 거처야만 하였다. 투병생활은 그를 회색의 도시에 가두는 족쇄가 되어 설 추석 대명절이면 연례행사로 치르던 성묘를 서너 해나 거르게 만들었다. 해서, 조상께 죄를 짓고 있었는데 얼마 전 주치의로부터 완치 판정을 받아 고향 행을 서두르게 된 것이었다. ‘몸을 추스른 다음에 하여도 늦지 않다’는 아내의 만류를 뿌리친 채 굳이 고향 행을 결행한 것은 또다른 까닭이 있었다. 며칠 전, 고향 사촌 아우로부터 급한 연통을 받은 때문이었다. 그는 수술을 하기 위해 입원을 하면서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영구차에 실려가 선산발치에 묻히고야 말거라는 비장감도 들었었다. 그랬었는데! 그래서 더욱 감개가 무량한 지도 몰랐다. 고향 가는 연도의 풍경은 그 사이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이런 경우에 들어맞는 사자성어 뭐더라? 그는 한참 동안 머리를 굴려 상전벽해桑田碧海 네 글자를 더듬더듬 찾아냈다. 그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독하였으므로 능히 한시漢詩를 지을 수 있는 실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고향을 찾는 소회를, ‘환향소회還鄕所懷 폐일언蔽一言 왈曰 상전벽해桑田碧海’ 그렇게 표현해 보았다. 그는 한학에 심취하면서부터 자신도 모르게 한문옹호론자가 되어 있었다. 소리글인 한글보다는 함축된 한두 글자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한자가 경제적인 문자라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한때, 한글 전용을 외치던 국문학자들이 그들의 뜻을 관철시킨 적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시행된 한글 전용 조치로 시가지의 간판을 비롯하여 모든 관공서의 공문, 신문 잡지는 한글 일색이 되었고 중·고등학교의 한문 시간 역시 폐지되어 버렸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한자는 된서리를 맞아 설 자리를 잃고 만 것이었다. 그 기간이 1970 년부터 1972 년까지였으니 자그마치 2-3 년은 되었다. 한글 전용 정책은 금방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국론분열로까지 이어졌다.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는 학자들과 뜻있는 국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뒤늦게나마 시행착오를 인정한 문교 당국에서는 졸속으로 시행하였던 한글 전용정책을 철회하고 국한문 혼용정책으로 회귀하고 말았었다. 그 당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세대는 지금도 신문 한 장 제대로 못 읽는 한문 까막눈이 신세가 되어 사회생활에 커다란 불편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안이었다.
진갑성 씨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70여 년 인생을 성실하게 살았다는 평을 받았다. 그의 인생에 별다른 하자를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공자가 말한 ‘사무사思無邪’에 입각한 삶을 살았다는 뜻도 되었다. 그는 성격이 차분해 매사를 심사숙고하였고 당겨진 활시위처럼 항상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조그만 일탈도 허용하지 않았었다. 오직 성실한 삶을 살아온 그는 성실 근면의 범주에서 벗어난 행동은 사치스러운 일탈로 치부하였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여정은 순탄한 건만은 아니었다. 파란만장 그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일제 말기에 호남정맥 깊은 산골에서 태어난 그는 때와 장소를 잘 못 택한 것이었다. 기구한 그의 팔자는 비운의 세대를 일컫는 갑자년생甲子年生에 비견할 수는 없었지만 그에 못지않았다. 일제 말기 ‘묻지 마라 갑자생’이라는 자조적인 유행어가 회자되었었다. 갑자생 띠는 1924년 출생자를 말하는데 태평양전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징집에 해당되는 연령 대였다. 그들은 거의가 학병이나 징용으로 강제로 끌려가 만주 벌판이나 남양군도 등지에서 일제의 총알받이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진갑성 씨의 유소년기는 한마디로 말해서 기아와 수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식민지 백성 모두가 일제의 전쟁 치다꺼리에 녹아나는 판에 설상가상으로 연이은 흉년까지 들었다. 소년의 집안 역시 호구지책이 막막했으므로 영향 결핍증에 걸린 어머니의 젖은 항상 부족하였다. 진갑성 어린이는 젖배를 곯아 피골이 상접하였고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부실한 몸을 소유하게 된 것이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조국이 광복되었지만 조국은 38선으로 두 동강이 나 분단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미군정 하의 대한민국은 혼돈 속에서 좌우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양분되어 어수선하기만 하였다. 그 와중에 1948년 10월에 여수에서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여수 순천을 석권하고 남해안 전체로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과도기의 정부였지만 이를 수수방관하지는 않았다. 군경을 동원하여 반격과 토벌 작전을 감행한 것이었다.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로 반군이 관군을 이겨본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시애, 이증옥의 난을 위시하여 이괄의 난이 그랬고 홍경래 난, 동학의 난, 의병의 봉기 또한 그랬다. 급조된 조직인 반군들은 봉기의 명분도 달리고 병력 충원과 병참 문제 등에 취약점이 노출되기 마련이었다. 관군인 토벌부대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한 14연대 반군들은 곳곳에서 패전을 거듭하며 지리멸렬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사살, 체포되는 병력이 급증하고 귀순자도 늘어났다. 운 좋게 생명을 부지한 패잔병들은 산간지대로 숨어들어 재기를 기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험한 진갑성 소년의 마을은 패잔병들의 훌륭한 은신처가 되었다. 산골 마을은 토벌부대와 반란군 간의 교전으로 평온할 날이 없었다. 애먼 민초들의 고초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시국을 잘 못 만나 팔자에도 없는 고생을 하게 된 것이었다. 산골 사람들은 토벌작전이 성공적으로 종료되자 이제 두 발 뻗고 평화로운 삶을 사는가 싶었는데 그도 잠시 뿐, 1950년 6월 25일 한국동란이 발발하였다. 선전포고도 없이 미명을 기해 38선을 넘어온 인민군들은 손쉽게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남하, 낙동강을 제외한 남한 전 지역을 석권하였다. 그로부터 불과 석 달 후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그들의 작전은 실패, 퇴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삼월천하로 그들의 세상이 끝난 것이었다. 군경들이 진주하자 공산당 골수분자와 그들에게 빌붙어 한 자리 차지했던 대다수 추종자들은 산간지대로 숨어들었다. 진갑성 소년의 산골 마을은 여순반란 사건 때처럼 또다시 그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토벌작전이 전개되자 그 와중에서 희생되는 가족들이 속출하고 살던 집과 세간이 소실되는 참화를 입었다. 토벌작전이 종료되었으나 한 번 풍비박산된 가세는 자력으로 회복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살아남은 가족들을 이끌고 보따리를 쌌다. 그리고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지긋지긋한 산골 마을을 떠나버렸다. 어머니가 갈 곳은 장흥 읍내에 있는 친정집 밖에 없었다. 소년네는 외갓집 행랑채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하였다. 전쟁 때문에 2년 동안이나 학업을 중단한 소년은 외할아버지의 배려로 읍내 초등학교에 편입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소년은 외할아버지의 커다란 짐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뒤를 보주시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대학 진학을 꿈도 꿀 수 없었다. 적령이 되자 입대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그는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소정의 훈련을 마치고 최전방 gop에 배치되었다. 3년 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그는 동고동락하던 전우의 배려로 그의 친척이 경영하는 서울의 어느 기업체에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직장에 근무하면서 야간대학을 다니는 열의를 보였다. 적성에 맞지 않은 법정대학에 적을 두었지만 뜻을 딴 곳에 있었다. 어려서부터 체험한 동족상잔, 좌우 이데올로기 투쟁의 참상들을 글로 남기고자 하는 뜻이 있었으므로 작가나 시인들이 강의하는 다른 강좌를 눈여겨 두었다가 청강을 하곤 하였다. 학업을 마쳤으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쓸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바쁜 직장 생활 중 짬을 내어 글을 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짬이라도 내어 습작을 하고 있으면 질시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동료며 상사들이 많았다. 종내는 회사 일에 소홀한 채 글 쓰는 데만 정신 팔려 있다는 투서가 경영진 상부에 접수되어 표적감사까지 받아야만 하였다. 때마침 직장은 형편이 여의치 않아 적자 경영에 돌입하는 와중이었다. 회사에서는 중견 간부인 진갑성씨를 본보기 삼아 기강을 다잡을 심산인가 보았다. 그는 그 덤터기를 뒤집어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징계위원회 회부되고 종내는 벽지 한직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그는 유배지나 다름없는 천리 타향에서 술을 벗하며 울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마음이 심란하다보니 글 한 줄 써지지 않았다. 유배 생활 수 년. 그의 성실성이 인정되고 혐의 또한 벗어 본사로 원대 복귀되었으나 이미 날개가 꺾인 뒤였다. 어언 세월이 흘러 정년퇴직이 임박하였다. 그는 정년을 두어 해 남기고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자연인의 처지로 돌아오자 남아도는 건 무료한 시간뿐이었다. 그는 평소 뜻한 바 있는 글쓰기 작업에 매진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작가가 되자면 피나는 습작과 전문적인 공부를 더 해야만 할 터였다. 그는 직장 생활의 굴레에서 헤어난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을 하였다. 때마침 대선에서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개혁 성향의 김대통령은 사회 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정규 교육의 수혜를 받지 못했던 자신의 한을 의식한 듯 서민들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들을 속속 시행하고 있었다. 평생 교육제도도 그 시책 중의 일부였다. 적령기에 생활이 여의치 못했거나 생업에 종사하느라 배움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에게, 혹은 대학을 다녔으나 다른 분야의 학문이 부족했던 각계각층에게 철옹성 같던 대학의 문을 활짝 개방하게 한 것이었다. 그는 고향 가까운 광주로 이거하여 국립대학 부설 평생교육원(문예창작 과정)에 입교하였다. 교수진은 그 대학의 국문과 교수들과 초빙된 현역 문인들로 짜여 있었다. 이론보다 실기 위주의 교육이어서 작가 수업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권위 있는 문예지에 소설을 투고하여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문단에 입성하게 된 것이었다. 문인협회, 소설가협회 등 여러 문학단체에 가입하여 작품 활동과 친교의 범위를 넓혀갔다. 연륜이 쌓이자 문학단체의 요직을 맡을 기회가 부여되었다. 그는 어느 직무를 맡던 간에 항상 정도를 걸었다.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던 단체의 잘못을 질타하기도 하고 제동을 걸어 기틀을 잡기도 하였다. 문예지며 각종 문학상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면서는 고지식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엄한 잣대를 들이댔다. 그에게는 별명이 있었다. <왕퍅> 강퍅剛愎스럽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었다. 그 점은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장점도 되었고 한편으로는 결점도 되었다. 혈통이 그런가 하여 가계를 훑어보았으나 자신의 모델이 된 조상은 찾을 수 없었다. 돌연변이가 분명하였다. 시골 유림이셨던 할아버지는 성격이 모나지 않아 황희 정승이라 칭했고, 아버지 역시 ‘무골호인’(법 없이도 살 사람)으로 통칭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부전자전 적인 그러한 요소들 대신 강퍅한 면만 도드라졌던 것이다. 그런 그가 고질적인 걍퍅을 스스로 거두게 되었는데 그 계기가 있었다.
등단의 꿈을 이뤘지만 진갑성 씨는 다시 평생교육원의 문을 두드렸다. 한학을 수업을 하고자 함이었다. 좋은 글을 쓰자면 한학을 더 공부해야만 하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문진보古文眞寶 등을 다루는 고급반에 들어가 수업 중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를 배우게 되었는데 자신의 성격과 비슷한 한 급우와 심한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조조曹操 일가가 세운 위魏나라와 한실 후예인 유비劉備가 세운 촉한蜀漢 중 어느 편이 적통이냐는 논란에 빠진 것이었다. 급우는 조조의 위나라가 적통이라고 우기는 반면, 그는 촉한 쪽에 적통성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논쟁은 끝이 있을 수 없었다. 얼굴만 맞대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으르렁거리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려 들지 않았다. 그런 장면을 한두 번 목격한 게 아닌 지도 교수가 어느 날 정색을 하며 나무랬다.
“두 분이 다투는 것을 보니 문득 ‘불능사기종인不能舍己從人 학자지대병學者之大病’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학문을 하면서 다투는 건 좋은 현상이긴 하나 도가 지나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는 겁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적대시하고 매도하면 안 되는 겁니다. 이조 당쟁의 폐해에 대해서 두 분께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반성하며 교훈으로 여겨본 적이라도 있습니까?!” 지도 교수의 질책은 계속되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다룬 역사소설 춘원의 ‘단종애사’와 김동인의 ‘대수양’ 두 작품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춘원은 단종에게 무게를 두는 반면 동인은 수양대군에게 정통성을 부여하였다는 논지였다. 진갑성 씨는 지도 교수의 따끔한 질책에 할 말을 잃고 수긍하였지만 얼굴이 후끈거리는 심한 모멸감은 지울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자신의 옹고집을 꺾는 용단을 내렸던 것이다.
지도 교수가 말한 ‘불능사기종인 학자지대병은’ 퇴계집退溪集에 실린 문장인데 ‘자기의 의견을 접고 남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것이 배운 사람들의 큰 병폐라’는 뜻이다. 지도 교수도 거론한 바 있는 이조시대의 사색당쟁은 선비들의 그러한 사상에 근거한 것이었다. 사색 당파는 퇴계 선생 사후에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 싹은 이미 선생 생전부터 움트고 있었으므로 퇴계선생은 그런 선비들의 고집불통적인 내면을 예감하고 경구警句를 남긴 듯싶다.
그는 사소한 복제服制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심하게 다투었던 고사를 회상하였다. 이조 17대 효종의 초상에 대한 모후의 복상 기간을 송시열 등의 서인은 기년朞年설을 주장한 반면 남인의 거두 허목은 3년설을 주장하여 양파가 국사를 내팽개친 채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대의에 입각한 삶을 살았는데도 야속한 병마는 그의 주변을 비켜가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위장 장애를 앓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너무나 배고픈 삶을 살았기 때문에 얻은 병이었다고 자조적인 말로 소년을 위로해 주곤 했다. 단방약으로만 의존하던 시절 그의 치료약은 익모초즙이었다. 쑥의 일종인 익모초를 짓이겨 즙을 내면 쓸개즙처럼 짙은 청색의 즙이 추출되었는데 그 맛은 쓸개즙보다 훨씬 더 썼다. 소오다 가루도 복용 대상이었다. 제빵 원료로 쓰이는 소오다가 위장 치료제로 대신 쓰이던 시절의 일이었다. 소싯적부터 지병이던 병마를 근본적으로 치료치 못하고 병을 키운 게 화근이 될 줄을 그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차창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연도의 풍경을 바라보던 진갑성 씨는 선인들이 즐겨 읊조렸던 ‘십년산천가변十年山川可變’이라는 어구가 요즘 세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하였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게 변하는 자연 상태를 십 년 단위로 측정한다는 자체가 모순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연도의 낯익은 야산들이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그 자리에 대단위 아파트나 오색 슬레이트 지붕으로 단장한 공단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고, 맑은 물이 철철 흘러내리던 시내 위로 거대한 교량이 가설되고 잡초만 무성하였던 둔치가 아담한 공원으로 변모되었는가 하면, 그 사이로 자전거 도로가 조성되고 각종 운동 기구까지 갖춘 편의시설들이 들어서 있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눈부시게 발달한 도로망 역시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험준한 산자락을 뚫어 축지縮地의 조화를 노렸을 뿐만 아니라 구절양장한 도로들을 직선화하여 주행 시간을 단축시키고 있었다. 토목기술의 발전도 목격되었다. 고속도로 건설 초창기에는 평지를 조금 돋아 조성하였으므로 조망이 답답하였는데 최근 조성한 새로운 도로들은 야산처럼 둑을 높이 설계하였으므로 조망권이 개선되어 상쾌한 기분으로 달릴 수 있었다. 또한, 구시대의 전형적인 평면교차로 형태가 사라지고 곳곳에 램프 형식의 나들목이 조성되어 있었다. 장벽처럼 둑을 쌓아 램프형 도로를 만들 당시 해당 주민들은 심하게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평야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며 수천 년을 살아온 마을 한 가운데에 장벽을 만들어버림으로써 시야가 차단될 뿐만 아니라 이웃 마을 간의 소통 역시 단절될 우려가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막상 조성해 놓고 보니 장점이 훨씬 더 많더라고 했다. 그 한 예로 평면교차로 당시 다반사였던 쌍방 충돌 같은 대형 교통사고 자체가 아예 없어지다시피하였고 우려했던 이웃 마을 간 소통 역시 곳곳에 넓게 뚫린 지하통로를 통해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었던 고향 가는 길은 새로 생겨난 길이 많아 제대로 찾아가려면 문명의 이기에 의존해야 하는 형편이 되어 있었다. 업그레이드 한 지가 꽤 오래된 진갑성 씨의 gps는 곧잘 엉뚱한 곳으로 안내를 하였으므로 램프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 타는 오류를 되풀이 하곤 하였다.
겨우 건강을 회복한 진갑성 씨는 선천적인 근면성이 다시 도지고 있었다. 무언가 일을 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는 병원에 입원하기 전 봉사 활동을 예약했다가 보류해 논 어느 불우시설을 찾아가 원장을 면담했다. 그 결과, 원장으로부터 다음 달부터 기초 한문 강좌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흔쾌히 승낙하였다. 그는 작가이므로 문학에 관한 강좌를 맡아야 마땅하였으나 그 시설에는 해당 과목이 없어 대신 한문 강좌를 맡은 것이었다. 그는 한자 공인 ‘사범’급에 ‘한문지도사’ 자격증까지 취득하였으므로 명실공한 한문지도자여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약속을 이행치 못 해 항상 죄지은 기분이었는데 이제 그 빚을 갚게 된 셈이었다.
그는 무료하여 라디오를 켰다. 그는 운전할 때면 곧잘 라디오를 켜는 습관이 있었다. 그의 승용차에는 Dmb 볼 수 있었지만 사고 예방 차원에서 사용을 자제하고 있는 터였다. 평소 즐겨듣는 한 FM 방송에 채널에 고정시키자 지나간 세월 한 때를 풍미했던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음률이 귀에 익었다. ‘일요일은 참으세요.’ 였다. 마침, 일요일이었으므로 선곡한 듯싶었다. 그는 흥얼흥얼 그 곡을 따라 부르다 말고 그 곡을 부른 ‘메리나 메르쿠리’의 일생과 광주의 오월을 오버랩 해 보았다. ‘never on sunday’ 는 1960년대를 풍미했던 유명한 영화 음악인데 20세기 그리스를 대표했던 ’마노스 하지디스리‘의 작품이다. 그가 남긴 100여 편의 영화 음악 중 유일하게 아카데미상을 받은 곡이기도 하다. 이 노래를 부른 여가수는 앞서 말한 그리스 출신 ’메리나 메르쿠리‘인데 그녀 역시 이 노래로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녀는 가수이면서도 혁명가 정치가로도 잘 알려졌다. 1967년 그리스 군부의 영관급 장교들이 구데타를 일으켜 ’콘스탄티노스 2세‘를 축출하고 정권을 찬탈한 사건이 있었다. 그녀는 이에 극력 항거하였다.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공연할 때마다 그리스의 군사정권 퇴진을 외쳤다. 심지어는 조국인 그리스에 관광을 가지 말 것을 호소하기까지 하였다. 그리스 군사정권은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겨 여러 차례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미국 FBI의 보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스에 봄이 오자 귀국한 그녀는 정계에 입문하여 그리스 최초의 여성장관으로 장수를 누렸다. 미모의 그녀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1994년 뉴욕의 한 병원에서 암으로 사망하자 그리스의 모든 라디오와 티비들은 정규 방송을 중단한 채 추모 특집을 내보냈다고 한다. 그녀의 장례 행렬을 100만 명의 시민들이 뒤따랐다고 하니 그의 인기를 짐작케 한다.
사촌 아우는 수몰 후 고향을 등진 사람들과는 달리 비수몰 산간 지역에 눌러 살면서 선산 관리 등 집안의 제반 대소사를 맡아하고 있었다. 아우는 형의 건강을 염려하는지 멈칫거리다 말고 어렵게 입을 여는 것 같았다.
“형님! 저어 건강은 어떠신가요?”
“응, 덕분에 바깥나들이를 한 정도는 되었네. 그런데 왜 말투가 그러는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네. 형님은 역시 족집게라니까. 다름이 아니고요. 어제, 보림사 선산에 가 봤더니 멧돼지가 벌안을 몽땅 헤집어 놨지 뭡니까.”
“뭐라! 선산에 변고가 생겼다고? 요즘 산짐승들이 인가까지 출몰하여 폐해가 많다더니만 우리가 그 꼴을 당하는구만, 허허.... 당연히 가봐야지. 몇 해 동안 성묘도 못했었는데... 내 일간 짬을 내어 볼 테니 그리 알게나.”
진갑성 씨는 멧돼지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고향 마을 뒤에 ‘엉골’이라는 깊은 골짜기가 있었다. 골짜기는 매우 험준하고 깊어 아흔아홉골짜기라는 말로 통했다. 천험의 골짜기는 야생 동물들의 천국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지어 놓으면 야생동물들이 다 망처 버리곤 했다. 그 중에서 멧돼지의 폐해가 가장 심했다. 고구마 같은 구근을 튼실한 주둥이로 마구 헤집어 먹어 치웠다. 마을 사람들은 멧돼지 퇴치에 골머리를 앓았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포획하는 게 상책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힘을 모아 덫을 놓거나 허방을 팠다. 허방이란 멧돼지 출몰 지역에 한 길 남짓한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썩은 서까래를 걸친 후 검불로 위장하는 포획 방법이었다. 아무리 힘이 센 멧돼지도 한번 덫에 걸리거나 허방에 빠지면 그만이었다. 포획망에 걸린 멧돼지가 힘이 다하면 이를 잡아 온 마을 사람들이 포식을 하였다. 멧돼지도 잡고 영양도 보충하고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허방의 역기능도 있었다. 한눈을 팔던 마을 주민들이 실수로 몸을 다치거나 허방에 빠져 곤욕을 치룬 경우도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진갑성 씨는 그의 고향을 가자면 곰치휴게소를 넘어야하므로 29번 자동차전용도로를 벗어나 ‘이양나들목’으로 빠져나왔다. 자동차전용도로를 벗어나자 옛날 풍취가 물신 풍기는 지방도로가 그를 맞았다. 820번 지방도 곳곳에서 4차선 자동차전용도로 조성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이양 -장흥 간을 잇는 자동차전용도로공사라 하였다. 공사 진척 상황으로 보아 내 년 말쯤이면 완공이 가능할 성싶었다. 낯익은 옛길에 들어서자 유유자적해지고 낭만스러운 기분에 빠져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동차전용도로나 고속도로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시속 100여km 이상의 주행 속도에서는 좌우를 살필 여유가 없어 이런 낭만을 만끽하기 어려웠다. 청풍면 소재지로 갈리는 3거리 지점에 예전에 보지 못했던 주황색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화학산>. 주황색 표지판은 관광지를 의미하는데 화순군 당국에서는 화학산을 관광지로 개발한 듯싶었다. 화학산이 육이오 때 격전지였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는 만시지탄이었지만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전적지인 화학산은 등산객들이나 산나물꾼들이 즐겨 찾는 산이기도 하였다. 취, 고사리, 드룹, 더덕 등 산나물들의 군락지였던 것이다. 황토색 이정표는 갑자기 타임머신으로 급변하여 진갑성 씨를 반세기 훨씬 전 아득한 소년기로 태워가고 있었다.
육이오 때 장형은 빨치산이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빨치산이 된 장형은 입산 후 소식이 끊겼다. 토벌작전이 종료되자 어머니는 소식없는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겠다고 허둥대고 다녔다. 마을 부근 산속은 물론 화순 땅 각수바위며 화학산 부근까지 샅샅이 뒤졌는데 그때마다 소년은 어머니를 뒤따랐다. 화학산은 화순군 청풍면과 장흥군 유치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하는데 유치 산골에서 지리산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라 하였다. 화학산을 넘어 입교역을 지나 복내로 가는 산길로 빠지면 사평에 이르고 그곳에서 개울을 따라가면 모후산이 나온다. 모후산에서 백아산을 경유하여 곡성 통명산을 넘으면 구례 섬진강이다. 이곳에서 강을 건너면 바로 지리산 지경인 것이다.
지름길인 이 루트는 여수14연대 반란사건 이후부터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일패도지한 14연대 반군들이 난세 때마다 훌륭한 은신처로 잘 알려진 유치 산골을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은 유치 산골의 천험을 요새삼아 진치고 있으면서 이 루트를 통해 본부가 위치한 지리산과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육이오 한국전쟁 때도 유치 산골은 꼭같은 운명을 맞게 되었다. 여순 반란의 상흔이 채 지워지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수난이 시작된 것이었다. 장흥, 진도, 완도, 해남, 강진, 영암 보성, 나주 등 호남 남부 각 지역에서 부역하였던 공산주의자들은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 경유지가 된 유치 산골로 모여들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춘천 부근까지 북상하였다가 퇴로가 막혀 발길을 돌린 인민군 정규군(후에 남부군이 됨)까지 합세하였다. 평야지대가 10%에 불과한 유치 산골은 주민들의 식량 자족도 버거워 그 많은 빨치산들을 먹여 살릴 형편이 못되었다. 빨치산들은 병참 타개책으로 야밤이면 인근 고을로 원정 나가 각종 물품들을 약탈해 오곤 하였다. 소년이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 나가면 곡식 가마니를 비롯하여 농우, 닭 심지어는 논에 가려 놓은 볏가리까지도 훔쳐와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약탈한 곡식으로 밥을 짓고 소를 잡아 며칠 동안은 먹는 걱정을 덜 수 있었다. 그러나 유치 산골은 천혜의 요새가 분명하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많은 병력이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요충지는 못되었다. 군경토벌부대는 유치 산골을 집중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토벌작전으로 박살이 난 빨치산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자신들이 유토피아로 여기는 지리산을 향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빨치산들에게 화학산은 첫번째로 넘어야할 관문이었다. 정부에서는 유치 산골의 빨치산 토벌을 위해 전방의 국군들까지 차출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육군 5사단과 제8사단 병력의 투입도 그런 차원이었다. 빨치산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어느 이슬비 내리는 밤 이양초등학교 교정에 야영 중이던 8사단 1개 중대가 화학산에 은거한 빨치산들에게 급습 당해 대패한 사건이 있었다. 유치 산골의 빨치산들을 오합지졸 여기고 방만해 있던 국군들이 일격을 당한 사건이었다. 불의의 기습에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해 본 국군들은 막심한 피해를 입은 채 그들의 사령부가 위치한 광주 방면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사상자들의 시체를 운구하며 후퇴하던 국군은 너릿재 아래 마을 이십곡리 초입 양지 바른 곳에 전우를 매장하고 후퇴해 버렸다. 나중에 성역화 된 묘역은 국군묘지가 되었다. 이렇듯 화학산은 피아간에 요충지였으므로 전투가 끊이지 않았고 시체 썩는 냄새는 천지를 진동하였다는 것이다.
장형은 일제 치하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후 유치면 면사무소에 취직하였다. 인민군 세상이 되자 체포되어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다. 마침 적 치하에서 유치면 인민위원장으로 발탁된 동창이 그를 구해주었고 그 때문에 부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그물 고기 신세가 된 장형은 마음에도 없는 빨치산이 되고 말았다. 평시에는 집에서 출퇴근을 하였는데 상황이 급변해지자 집에도 들르지 않았다. 이후 장형의 행방은 묘연해져 버렸다. 각수바위 전투에서 죽었다는 설도 있었고 무리들과 더불어 화학산을 넘다가 매복 중이던 국군들의 기관총 세례를 받아 잘못 됐다는 풍문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시체를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하였던 것이다. 각수바위는 화순군 도암면 우치 마을 뒤에 위치하는데 화학산 못잖은 격전지였다.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아야겠다며 팔을 걷어부친 어머니는 헛수고만 하고 말았다. 산골짝에 널린 시체들은 거의가 부패, 식별이 불가능하여 ‘발등에 불에 댄 자국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호언한 어머니의 장담을 무색하게 만들고 말았다. 결국 장형의 시신 수습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장형에게는 세 가족이 있었는데 모두 전쟁 통에 목숨을 잃었다. 집안의 장손이 변을 당했으므로 집안의 슬픔은 대단한 것이었다. 선산 발치에 형수를 모시고 그 곁에 가묘를 만들었는데 언젠가 찾을 지도 모르는 장형의 유택이었다.
곰치재휴게소에 당도한 진갑성 씨는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들었다. 오가는 차량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휴게소는 한 겨울의 날씨처럼 을씨년스러워 그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공사 구간이 겹쳐 있어 속도를 낼 수 없고 광주 보성간 자동차 전용도로가 남해안고속도로와 연계되었으므로 이곳을 통과하던 장흥방면으로 가는 차량들이 그 길로 차머리를 돌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사가 완공되면 지름길인 이 길이 다시 각광받을 것이 분명했다. 곰치재를 마악 넘어서자 완공된 4차선 도로가 눈앞에 전개되었다. 일부 부분 개통한 구간인 모양이었다. 곧게 뻗은 고속화도로를 쾌적한 기분으로 달리기 수 분 후 당산 마을 3거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자동차전용도로의 개통으로 피재는 새 길에서 완전히 비켜나 있었다. 가지산 보림사 창건 연기설화에 등장하는 백룡 한 마리가 보조선사의 지팡이에 머리를 된통 맞고 피 흘리며 도망쳤다는 험준한 피재 길은 추억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었다. 당산 3거리에 세워진 이정표는 우측 길로 가면 보림사 방면이고 곧장 가면 장흥읍 방향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5백여 미터 정도만 직진하면 수몰된 고향 마을 터가 있었으므로 진갑성 씨는 보림사 골짜기에 위치하는 선산으로 가지 않고 직진하여 ‘공수평拱手坪’ 마을비가 세워진 호반도로 간이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산 중턱에 개설된 호반도로 휴게소에서 내려다보면 수몰된 그의 마을이 훤히 보였다. 장흥댐 상류 지점이 된 그의 마을은 사시사철 물에만 잠겨 있는 게 아니었다. 농사철이나 갈수기에는 수위가 낮아져 몸체를 훤히 드러내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마침 농사철이어서인지 20여 호였던 마을은 뼈대를 드러낸 채 하늘을 향해 드러누워 있었다. 그의 집터는 어림잡아 여인의 유두 쯤 되는 성싶었다.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착잡한 감회에 젖어있었다. 그때 어렴풋이 환청으로 들리는 한 소리가 있었다. ‘너는 고향을 지키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였더냐?’ 댐 조성이 확정되자 유치면민들은 관내 환경 단체들과 합심하여 댐 조성 반대 운동을 펼쳤다. 날마다 집회를 열고 종내는 버스까지 동원하여 국토부와 청와대를 방문하는 등 완강하게 투쟁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진갑성 씨는 그런 면민들의 처사를 탐탁해 하지 않았다. 들어내 놓고 말은 못했지만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국책사업이므로 고향을 잃게 될 주민들이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사실, 남해안의 젓줄 노릇을 할 대단위 상수원 조성 지역으로 유치 산골만한 입지 조건을 갖춘 곳이 없었다. 일정 때부터 유치 산골을 댐 후보지로 거론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비록 고향은 잃었지만 국가 기간 산업체인 대불공업단지의 공업용수 문제가 해결되고 장흥을 필두로 목포, 진도, 완도, 해남, 영암, 강진 보성 등지의 식수난이 해결되었으니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던가. 또 댐을 만듦으로 해서 연례행사였던 탐진천의 홍수가 조절되었으며 해마다 탐진강변을 중심으로 물축제가 열리어 지역의 위상을 고양하고 주민 소득에 기여하지 않았던가. 그는 살신성인, 공과 사를 분명히 하며 대의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진갑성 씨는 잠깐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고향 마을을 보자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자신의 집터에 오랫동안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그는 몽유병 환자처럼 후다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도로 끝자락 낭떠러지 부근에 세워진 <위험>표지판이 앞을 막아섰으나 그는 아랑곳 않고 험한 비탈길을 허위허위 내려가고 있었다.
신동규 -----------------------------------------------
전남 장흥 출생, 월간 『신동아』 1천만 원 고료 논픽션 당선, 계간 『문예연구』 신인상 중편소설 당선, 한국문인 협회, 한국소설가 협회, 광주 전남 소설가협회 회원. 광주문학상, 해양문학상. 농민문학 작가상 수상, 소설집 『운명에 관하여』, 『흰 까마귀 산』, 『순비기 꽃』, 『메이플 로드 장편 그리고 다시는 고향에 갈 수 없으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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