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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4월호, 사색의 창] 이상한 여자 - 변애선

신아미디어 2015. 4. 16. 14:54

"유품을 정리한 만큼 나의 물건들도 버렸다. 혼자 대소변을 가릴 수 없는 지점이 되면 명품이고 뭐고 간에 모두 쓰레기에 불과할 뿐. 애꿎은 물건들만 발작적으로 내다버렸다. 나도 죽을 거야, 엄마. 그리 멀지 않아요. 다시는 집착하지 않을 거야. 제발 거기서는 홀가분하게 지내지 그래요. 너무 굶어서 지나가는 남자만 스쳐도 그 바람결 냄새조차 지독한 고문이었다던 그런 정절도 제발 그만. 안고 싶고 느끼고 싶은 사람 만나는 대로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몸을 열고 신음할 자유가 있는 땅. 거기는 그런 곳이기를 빌어드릴 게요."

 

 

 

 

 

 

이상한 여자        -  변애선


   당신이 타인의 미움을 받는 편이라면 비교적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프로이드의 후학이 아마 그렇게 말했던가. 미움을 받을 줄 번히 알면서도 그런 방식을 고집하기가 쉽지는 않다.
   “이상한 여자 다 보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가 삿대질을 하듯이 대들었다. 순간 똑같이 갚아주고 싶어서 숨이 막힐 만큼 참아야 했다. 당장 진흙탕에 엉겨 붙어서 진이 빠지도록 싸우고 싶었다. 회비는 공금이다, 투명하게 기록하고 매번 제출해 달라, 수면 아래에서 총무와 회장 단둘이서 조정을 해보려고 누차 그렇게 부탁을 하였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그를 향해 공개적으로 말을 꺼낸 결과 돌아온 그 욕설. 이상한 여자, 쌍욕보다 더 치명적이더라.
   회원들을 위해서 투명한 회계를 요구했건만 오히려 그들은 침묵하였다. 그 침묵의 뜻은 괜히 착한 총무를 건드렸으니 당해도 싸다는 것 같았다. 갑과 을의 전쟁이라고 여기는 것인지.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되었던 거다. 관례대로. 해오던 대로. 그래도 굴하지 않았다. 다른 모임의 회계장부까지 예시하면서 계속 요구를 했다. 바빠서 그런 기록까지 할 시간이 없다고 끝까지 대드는 전화를 마지막으로 그는 결국 그 모임에 발을 끊었다. 그렇게 그는 떠나버렸다.
   그 일이 반면교사가 되어서 뭔가 달라졌느냐. 더했다. 초등동기 송년회에 갔더니 회장 선출과 연말 결산 보고가 있었다. 내가 아는 상식과 매우 달랐다. 그날은 얼결에 박수를 치고 돌아왔지만 뭔가 잘못되었다는 기분을 참기 어려웠다.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말라고 말리는 친구도 있었지만 뭐가 두려워서 말을 못하나. 카톡 단체방에서 조목조목 문제를 지적했다. 회장 선출은 사전에 공고를 하라, 연말 모임에서는 연간 회계 내역을 공개하고 통장사본까지 첨부하라.
   환호를 받았을까. 역시 이상한 여자가 되고 말았다. 모임에 잘 나오지도 않다가 어디서 굴러와 사정도 모르면서 떠든다는 식의 대우를 받고 말았다. 드러내놓고 내 편을 드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대학교수를 하는 친구였다. 끝까지 주장을 더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끼리의 평화는 견고한 성벽 같았다. 축적된 돈이 지나치게 많은 상태에서 애경사까지 개인적으로 챙기라는 건 부담스럽다는 나의 주장은 비난까지 받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먹고 살만한 주제에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라고 했다더라. 그들끼리는 아무 문제도 없나 본데. 나만 유별난 거다.
   설득하기가 더 어려운 경우도 있다. 엄마가 요양병원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주변에 일절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체면이나 갚음 때문에 조문을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 죽도록 싫었다. 슬픔을 어떻게 누구와 나눈다는 말인가. 모든 원망과 세상의 비난은 내가 혼자 짊어지고 책임을 질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주변인들은 아직도 엄마가 병원에 계시는 줄 안다. 그런 나를 향해서 막내 동생은 주먹을 꽉 쥐고 분기에 차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명주처럼 고운 수의를 미리 준비해 두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례식을 꿈꾼 엄마의 뜻을 따르지 않는 나를 용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딱 우리끼리 겉치레를 버리고 진심으로 슬퍼하면 된다. 슬픔은 평생의 일이라 단 며칠 몰아서 해치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다. 누나라는 저 여자 정말 미친 것 아닌가 하는 눈치였다.
   가을이 깊어지던 날들, 임종이 가까워진 그 즈음, 엄마는 나에게 자주 고자질을 하였다. 간호사들이 강제로 욕조의 물속에 가두어 둔다고 했다. “사방이 물이다.” 침대 등받이를 세워서 겨우 앉혀드리면 마치 물속에 빠져있는 것으로 느끼고 혼미한 중에도 고자질을 하면서 집에 가고 싶은 눈치를 감추지 못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가래가 숨을 막으니 결국 무너져 내리는 순간 기어코 이 말을 뱉고 말았다.
   “집에 가고 싶다.”
   당장 그 산소마스크를 확 걷어내고 천만번 집으로 모셔 오고 싶었지만 도저히 뾰족한 수가 없었으니. 심장이 뻐개질 것 같고 목구멍이 으스러질 듯 죄여 올 뿐. 엄마를 거기에 둔 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으니 머뭇거리고 돌아보고 다시 가서 손과 발을 주물러 보다가 그러다가 시간을 넘기면 야간 당직 경비가 툴툴거리며 잠긴 문을 열어주지만 아예 미안하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목이 뻐근하였다. 그런 상태를 본 건 나뿐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아무도 오지 않는 날들이었다. 대소변을 흘리고 거동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도 의식을 완전히 놓아 버리기 직전까지 향수를 뿌려달라고 하였던, 뼛속까지 우아하고 화려하기를 열망하였던 그 여인은 결국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눈을 뜨지 않았다.
   임종을 지킨다는 건 낭만적인 서사가 아니다. 비통한 감정은 광폭하게 요동쳤다. 그 병상에 불을 화악 질러서 엄마를 가두고 있다는 그 욕조의 물을 모조리 말려드리고 싶었다. 불을 지르고 싶다. 그런 가눌 수 없는 충동 속에서 임종 무렵을 지켰으니 엄마가 숨을 거둔 그 즉시 서둘러서 화장을 시켰다. 상을 당한 일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겠다는 고집을 부릴 뿐 어떤 설명도 하려 들지 않았으니 마치 엄마가 죽기만을 기다린 딸처럼 비쳤을 것이다. 말려드릴 게요, 엄마. 핏기까지 태우는 불의 화장로 속에서 육신이 틀어지고 오그라들며 탈수된 뼈들을 집게로 끄집어내어 절구에 담아 찧고 빻아서 가루로 변해서 나올 동안 나는 울지 않았다.
   “말려드릴게요. 엄마. 이제 괜찮아요.”
   유골단지의 열기는 유골함을 싼 보자기의 겹을 지나 하얀 장갑을 낀 손에도 감지되는 것 같았다. 이별의 온도는 마치 엄마의 체온 같아서 따뜻하였다.
   다시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자 그 빈집에 가서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다시는 주인이 올 수 없다는 것을 모른 채 그 집은 하염없이 기다린 마음만큼 먼지를 켜켜이 품고 있었다. 사람은 죽기 전에 모질게 정을 떼고 가더라는데. 남겨진 물건들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이거 비싼 거예요, 이거 좋은 거예요, 그런 말로 내가 엄마에게 건넨 별것도 아닌 화장품 샘플까지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더 잘해 드릴 걸. 더 좋은 것 사드릴 걸. 그런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 했건만. 도리가 없었다. 엄마, 잘못했어요. 가슴을 칠 수밖에. 엄마가 그토록 아끼고 집착했던 것들, 밍크코트부터 고추장과 된장 단지까지 결국 버려야 했고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유품을 정리한 만큼 나의 물건들도 버렸다. 혼자 대소변을 가릴 수 없는 지점이 되면 명품이고 뭐고 간에 모두 쓰레기에 불과할 뿐. 애꿎은 물건들만 발작적으로 내다버렸다. 나도 죽을 거야, 엄마. 그리 멀지 않아요. 다시는 집착하지 않을 거야. 제발 거기서는 홀가분하게 지내지 그래요. 너무 굶어서 지나가는 남자만 스쳐도 그 바람결 냄새조차 지독한 고문이었다던 그런 정절도 제발 그만. 안고 싶고 느끼고 싶은 사람 만나는 대로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몸을 열고 신음할 자유가 있는 땅. 거기는 그런 곳이기를 빌어드릴 게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는 그런 방식의 장례에 대한 가족들의 몰이해. 그런 와중에도 타인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그 누구도 내가 상중이라는 것을 몰랐으니. 옷을 잘 차려입고 시간에 쫓기며 그런 예식에 갔지만 막상 하얀 봉투를 전달하고 잠시 대면하면 그뿐인 것을. 제발 그런 방식의 의례적인 절차는 사라졌으면. 그래서 나부터, 나 먼저, 그랬을 뿐이다. 슬픔은 쓸쓸할 때 더욱 진정할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