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확신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은 내 안에서 항상 꿈틀거리고 있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 그것이 확신인지 맹신인지조차 모르면서 말이다. 확신도 맹신도 모두 젊었을 때 가지는 모양이다. 나를 제쳐두고 사정없이 흘러가 버리는 그 세월을 난들 어찌할 것인가. 공자님은 일흔이 되면 어떤 일을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다고 하셨지만 나 같은 범인은 매사에 주저躊躇하고 자저趑趄할 뿐이다. 확신도 맹신도 다 젊었을 때 가지는 믿음인 모양이다."
확신과 맹신 - 김상태
세월호 못지않게 텔레비전의 뉴스거리가 된 것은 유병언의 행적이었다. 수많은 경찰이 동원되어 찾았지만 그의 행적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이미 외국으로 도주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고, 국내 어딘가에 잠적해 있을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재주를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숨어 있던 근처의 밭 자락에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을 때 형언할 수 없는 허무감과 배신감을 느꼈다. 그렇게 떠들썩하던 뉴스거리가 그런 식으로 결말이 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의 사술詐術과 같은 종교적 행적을 욕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굳게 믿고 따랐던 많은 추종자들이 있는 것을 보면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 새삼스럽게 의문이 간다. 사술이라도 대단한 사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성 기독교계에서는 사이비似而非 종교집단이라는 말로 매도하지만 사이비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것도 사실 쉽지 않다. 같은 예수를 믿으면서 믿음의 방법이 달라서 사이비가 된 경우도 있고, 정통 교인이 되는 수가 많다. 하긴 거대한 집단이 되면 사이비라고 말할 수 없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서로 사이비 집단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큰 집단이 되어 있다. 그래서 다른 종교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창하게 종교까지 들먹일 필요 없이 살아가면서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확실히 믿지 못하면 일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는 일이 허다하다. 시작한 일조차도 중간에 믿지 못할 사정이 생기면 중도파기하는 예도 많다. 처음부터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일들도 숱하게 많다. 머뭇거리고 있다가 기회를 놓치는 때도 있다. 어떻게 보면 매순간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그 선택에는 믿음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그 믿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따라 한 것인지, 자기의 판단에 따라 행동한 것인지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 판단이 감정에 의한 판단인지, 이성에 의한 판단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런데 확신確信과 맹신盲信은 굳게 믿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다. 그 당장에는 양자를 구분하기조차 어려울 때가 있다.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는 확신이라고 하지만 터무니없는 결과가 나왔을 때는 맹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두 맹신이 죽어라고 투쟁한 경우도 있고, 두 확신이 믿는 것이 달라서 죽기 살기로 싸운 경우도 있다. 몇 백 년 동안 계속된 종교전쟁이 바로 그러한 예다.
내가 미국에 체재하는 동안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의 설교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자기 교회의 어느 신자가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집을 부산으로 옮기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전혀 이치에도 안 맞는 말씀을 하셨다면 그대로 시행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상식에 맞지도 않는 그런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인즉 건전한 상식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은 바른 교인의 태도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건전한 상식’을 매우 중시한다는 이야기다. 독실한 신자 중에 건전한 상식과 어긋나는 일을 더러 하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다.
확신과 맹신은 개인 간에도 있을 수 있지만 집단 간에도 있을 수 있다. 특히 종교 문제에 오면 확신과 맹신은 맹랑한 결과를 일으키는 수가 많다. 한때에 ‘휴거’라는 일이 확신으로 그 집단을 지배했지만 집단 밖에서는 전혀 근거 없는 맹신이 된 일이 있다. 허무맹랑한 그 일이 거짓말로 판명되었어도 그 집단에서는 또 다른 변명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면 종교 집단에 있어서는 확신과 맹신이 구분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사이비 종교집단이 대개 그렇다. 구원파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종교집단도 그러한 양상의 일종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천주교와 개신교도 한때는 각기 확신에 차서 상대방을 비방했지만 서로의 집단이 커져 버리니까 어느 쪽을 맹신이라고 단정하기는 곤란하게 되어 버렸다. 교황청에 의해 맹신이라고 파문을 당했던 마르틴 루터도 그를 보호해 주는 집단이 없었다면 아마 영원히 매도되어 파문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확신과 맹신을 판가름하는 것은 얼마큼의 지지자를 얻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종교와는 다른 문제지만 세종대왕도 훈민정음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없었을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세종대왕은 확신에 차서 위대한 일을 하게 되었고, 최만리는 한자의 맹신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후세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확신과 맹신을 구분해서 살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지만 사실 긴 역사를 놓고 볼 때는 어느 쪽에 줄을 서 있는지 장담할 수 없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서 보면 그 믿음의 옳고 그름이 전도된 예를 얼마든지 보기 때문이다. 확신에 찬 사람은 분명히 큰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크게 그르칠 수도 있다. 확신도 하지 않지만, 맹신도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신념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세계관이나 인생관이 그런 사람을 우리는 회의론자라고 부른다. 완전한 회의론자도 되지 못하지만 그날그날 한 일에 별 의식 없이 따라가고 있는 행동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확신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은 내 안에서 항상 꿈틀거리고 있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 그것이 확신인지 맹신인지조차 모르면서 말이다. 확신도 맹신도 모두 젊었을 때 가지는 모양이다. 나를 제쳐두고 사정없이 흘러가 버리는 그 세월을 난들 어찌할 것인가. 공자님은 일흔이 되면 어떤 일을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다고 하셨지만 나 같은 범인은 매사에 주저躊躇하고 자저趑趄할 뿐이다.
확신도 맹신도 다 젊었을 때 가지는 믿음인 모양이다.
김상태 -----------------------------------------------
전북대·한양대·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역임. 현, 이화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생활수필쓰기 지도. 저서: 평론집 ≪모래알 속의 사금처럼≫.수필집 ≪여자대학의 촌티 나는 교수≫, ≪선생님 우리 선생님≫,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외 다수.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3월호, 촌감단상] 찌그락 짜그락 - 김재환 (0) | 2015.03.30 |
---|---|
[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3월호, 나의 대표작] 사죄 - 이임순 (0) | 2015.03.30 |
[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2월호, 사색의 창] 성자聖者가 된 친구 - 강명량 (0) | 2015.03.02 |
[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2월호, 인연] 도비가트, 사라져 가는 빨래터 - 이명진 (0) | 2015.03.02 |
[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2월호, 나의 대표작] 가지 않은 길을 보다 - 권오훈 (0) | 2015.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