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도 수납장이나 서랍이 있다면 분리해두고 싶은 때가 있다. 책임과 공존하는 의무감은 매일 꺼내야 하므로 손길이 자주 가는 곳에 담아두어야겠다. 고갈된 설렘은 스카프 서랍 바닥 한 켠에 살포시 접어 넣어두는 게 좋겠다. 우울함이나 슬픔같은 것은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넣어둘까. 라벨 작업만은 정확해야 할 것 같다. 기쁨을 꺼내려는데 우울함을 열어버리는 누를 범하면 안되니까…."
감정의 수납방식 - 엄현옥
환절기엔 기온이 널뛰기를 한다. 봄, 가을은 오는 듯하다가 꼬리를 감추어버리기 일쑤다. 우리나라의 계절이 초여름-여름-초겨울-겨울의 4계季로 바뀌었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떠돈다. 출근 시에 히터를 가동하던 지하철이 퇴근 때면 에어컨을 켜기도 한다.
계절이 바뀔 때면 작년에 입었던 옷들이 생각나지 않는다. 철지난 옷으로 거리를 누빈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계절에 맞는 무언가를 걸쳤음이 분명하다. 아이쇼핑만 하려는 마음으로 지나치다가 눈에 들어오는 옷가지라도 하나 사오면, 그 비슷한 것이 옷상자에서 비죽이 바라보고 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모처럼 여유로운 휴일을 맞아 간절기 옷들을 정리했다. 그 일을 성급하게 주먹구구식으로 해놓으면 변덕스런 날씨로 다시 꺼내야 할 때마다 곤란을 겪곤 한다. 여섯 개의 수납 상자를 늘어놓고 분류했다. 라벨까지 붙이고 나니 김장이라도 해치운 듯 뿌듯했다.
산책을 나섰다. 근래에 바뀐 환경에 해야 할 일은 산더미여서 마음은 늘 바잡을 수밖에 없다. 풀어야 할 일은 얽힌 실타래처럼 어지럽다. 거리공원을 바장이다가, 빠르게 걸으면 바람결에 혼란스러움이 수습되려나 하는 생각에 속도를 냈다. 심장박동만 불규칙해질 뿐 걷는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마음의 일들은 일목요연한 수납이 어렵다.
마음에도 수납장이나 서랍이 있다면 분리해두고 싶은 때가 있다. 책임과 공존하는 의무감은 매일 꺼내야 하므로 손길이 자주 가는 곳에 담아두어야겠다. 고갈된 설렘은 스카프 서랍 바닥 한 켠에 살포시 접어 넣어두는 게 좋겠다. 우울함이나 슬픔같은 것은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넣어둘까. 라벨 작업만은 정확해야 할 것 같다. 기쁨을 꺼내려는데 우울함을 열어버리는 누를 범하면 안되니까….
싸목싸목 걸으며 생각한다. 감정을 수납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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