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에 비유하는 친구에게 참새가 쉬어갈 수 있는 어깨를 내어줄 수 있으니 괜찮지 않느냐고, 참는 것과 견딤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그녀에게 온갖 수식어를 동원하여 긍정의 힘을 실어 위로편지를 쓴다. 낙엽이 있어 외롭지 않은 이 가을 아직 그리움이 이어져 있어 우리는 행복하다."
솔바람 편지 - 라성자
편지를 쓰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대신하는 의미가 담겨 있어 받는 쪽도 쓰는 쪽도 행복한 위로가 된다. 주위로부터 상처 받았을 때나 외로움이 슬픔이 되어 복받쳐 오르는 날에는 편지에서 받는 따뜻한 위로가 한결 절실하다.
관공서나 세무서에서 오는 알림장은 뻔한 내용이라 일하다 물 묻은 손으로 얼른 뜯어보고 밀쳐놓지만, 겉봉에 삐뚤삐뚤하게 쓴 손글씨를 보면 반가워 그 기쁨을 가슴속에 조금 더 눌러놓고 차 한 잔의 여유와 더불어 개봉을 한다.
동구 밖 느티나무처럼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붙박혀 살고 있는 단발머리 친구 연이와 또박또박 눌러쓴 편지를 주고받는 기쁨은, 일테면 권커니 잣거니 할 때 쓰이는 술잔 같은 것. 떨어져 있어도 깊은 우정은 그 거리를 메우고도 남는다. 편지 속에 담겨오는 솔바람 소리, 산도라지 꽃향기, 산기슭의 밝은 달빛, 천지자연의 무진장으로 넘쳐나는 넉넉한 고향의 향기는 시멘트 바닥에서 흙냄새도 잊어버리고 사는 나에겐 고마운 선물이다.
컴퓨터로 글찍기 하는 것보다 펜으로 쓰는 글이 더 정겹고 영혼이 담겨있어 가슴에 와 닿는 감회가 나이를 잊게 한다. 아날로그 시대를 벗어나질 못하는 습관도 있지만 쓰는 일을 기계에 의존하다보면 펜으로 쓰는 글자가 바르게 쓰이지 않으면 어쩔까 하는 염려도 살짝 있다.
몸이 안 좋아 세상 밖으로 나오질 못하는 연이의 심정이 편지글 이랑에 절절히 배어 있다. 강물 같은 삶에 파문이 이는 이런 날이면 전깃줄을 타고 온 유년의 바람은 그리움을 왁자하게 데불고 층층이 높은 아파트를 돌아 거북이 등으로 엎드린 내 집 창문을 두드린다. 같은 마을에서 키재기를 하며 유년을 보낸 우리는 학교 성적도 고만고만했다. 등교시간에 쫓겨 토속신을 모셔 놓은 당산을 그냥 지나치면, 책보따리 속 필통이 철겅철겅 소리가 나도록 다시 뛰어가 절을 하고 숨을 헐떡거리던 시절. 그때는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즐겁게 했는지…….
산촌생활이란 비위생적인 부분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아 병의 원인제공이 된 것인지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친구는 전화 받을 때도 손 떨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한다. 그 불편한 손으로 쓴 편지를 받는 내 마음에 물결이 인다. 지난해 절친한 고향 까마귀가 이승을 떠나고, 그 후 우리의 편지 왕래는 더 잦아졌다. 나는 바다 냄새나는 글을 보낸다. 광안대교의 야경도 담고, 백화점의 북적대는 사람 소리도 담고, 지하철 경로석에서 일어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담는다. 지나가버린 그리운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씩 끄집어내어 글을 쓰면 세월은 그 기억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아주 멀어진 옛일도 서로를 다독이는 힘이 된다.
하늘이 청자처럼 푸르고 탱탱하던 초가을, 화려한 꽃송이를 매단 호접난이 내 집으로 왔다. 백자 항아리 반을 자른 형태의 어리숙하고 순진한 달항아리 반쪽을 호접난이 차지하고 뽐낸다. 무미건조한 내 생활에 난을 벗 삼아 낭만적인 가을을 즐기라는 위로의 글이 담겨 있다. 난이 풀어내는 아름다운 풍경과 낭만이라는 글자가 가슴 저릿한 무엇이 되어 화살처럼 날아온다. 낭만이란 어휘 속에 숨어있는 달콤하고 아련한 감성은 가슴 저편 먼 세계였다.
일상이란 관성에 매몰되어 하루하루가 부식되어 가는 자신을 인식 못하고 그렇게 시간만 흘러갔다. 낭만은 우리 삶 속에 함께 있는 것이지 현실과 따로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닫지 못한 미련스러움으로 건조한 정신세계에서 방황한 것 같다.
서양란은 개방적이고 도발적인 멋스러움이 있다. 머리에 붉은 장미를 꽂은 정열적인 집시여인의 춤추는 모습이 어른거린다. 민숭민숭하던 집안이 후끈하다. 생기가 돈다. 상대가 어떤 물체이든 ‘함께’라는 당김의 힘은 일상의 권태와 대화의 궁핍에서 오는 고독감을 밀어낸다. ‘홀로’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적요의 바다에 담가 세상과의 싸움에서 묻은 때를 말갛게 씻어내는 행위라고 애써 변명하기도 한다. 삶이란 심사숙고하면 철학에 가깝고, 조금 해학적 단순함이 삶의 열락일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본다.
허수아비에 비유하는 친구에게 참새가 쉬어갈 수 있는 어깨를 내어줄 수 있으니 괜찮지 않느냐고, 참는 것과 견딤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그녀에게 온갖 수식어를 동원하여 긍정의 힘을 실어 위로편지를 쓴다.
낙엽이 있어 외롭지 않은 이 가을 아직 그리움이 이어져 있어 우리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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