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나하게 취해 세상 거리낄 것 없이 한번 갈짓자로 걸어보고 싶다. 원칙이 아닌 변칙이 와서 치고 받아 그로기 상태가 되어 비틀거리는 걸음이 아니라 다 팽개쳐 두고 거나하게 취해 기분 좋은 비틀걸음이었으면 싶다. 첫눈. 그 첫눈 속을 거리낌없는 비틀걸음으로 걸었으면 더욱 좋겠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면서 말이다."
넋두리 1 / 서정환
첫눈. 나이가 들어도 역시 설렘으로 온다.
금년에는 첫눈답지 않게 흐벅지게 쏟아진다. 첫눈을 반기는 것도 잠시, 전화 받으라는 소리에 사무실로 들어와 일상의 분주함 속으로 빠져든다. 첫눈은 금세 잊고 만다.
새벽 1시. 산더미처럼 쌓인 일 속에서도 낮에 내리던 첫눈이 문득 떠올라 길가로 나와 본다.
가끔씩 무섭게 질주하는 택시가 정적을 깨뜨릴 뿐 조용하다. 상념에 잠겨 서성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려온다. 거나하게 취한 기분 좋은 흥얼거림이다가 갑자기 톤이 올라가는 악다구니다. 그러더니 세상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는 갈짓자 걸음으로 앞을 지나간다.
갑자기 술이 마시고 싶어진다. 20대에 조심스럽게 술을 마셔 본 경험뿐, 한 번도 비틀걸음일 정도로 마셔본 일이 없어 그 경지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오늘 같은 날은 어쩐지 술에 흠뻑 취해 비틀거리고 싶다.
첫눈. 술. 갈짓자걸음.
제법 운치가 있어 보인다. 멋있게 느껴진다. 술이 거나해지면 세상 거칠 것 없는 갈짓자걸음 걸으며 안으로 안으로만 쌓아 두었던 응어리들을 길가 아무데나 훌훌 내던져 버리는 후련하고 홀가분함 같은 것, 그런 뭣이 있지 않을까. 소위 말하는 스트레스 해소랄까.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라도 눈을 흘겨야 좀 속이 풀리는 것처럼-.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분다. 현실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다. 밀쳐 놓았던 교정지를 펼친다.
“…… 30여년간 그때 한두번…….”
“홍길동전, 춘향전, 구국소녀 유관순전…….”
“○○고등학교……○○은행전주지점…….”
빨간 볼펜으로 호기롭게 척척 교정 부호를 표시해 나가다가 한순간 비틀걸음이 되고 만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비틀걸음은 분명한데도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갈짓자 비틀걸음이 아니고 눈치걸음이 되어 멈칫거리게 된다.
이걸 어쩐다? 띄어쓰기 원칙대로 띄어쓸까? 그냥 놔둬? 띄어쓸 것이냐, 그대로 붙여둘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은 아니어도 한참 머뭇거린다.
문학 작품이라면 별 말이 없겠지만 그건 아니니 붙여? 띄어? 어느 기관에서 맡긴 것인가 다시 들춰보고, 쓴 사람이 누군가 확인해 본다. 감이 잡히지 않는다. 처음 대하는 사람의 원고다. 에라, 원칙대로 해주자. 원칙대로 해주는 데야 무슨 얘기가 있으려고?
그런데 세상살이가 무슨 일이나 원칙만 가지고는 안 되는가 보다.
“돈을 얼마나 벌겠다고 이렇게 엿장수 맘대로 늘여 놨을까?”
“무슨 일인데요? 아, 그건 접미사 ‘여’가 붙기 때문에 년간과 띄어 썼습니다만. 그리고 한두 번은 양수사이기 때문에…….”
“누가 그걸 모릅니까? 뜻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일부러 붙여 놓은 건데-. 원고대로 해 놓으시오.”
“그래도 띄어쓰기 원칙대로 한 것인데…….”
“신문도 안 보시오? 신문에 어디 띄어쓰기 원칙대로 되었습니까? 원고 쓴 사람 뜻도 모르면서…….”
“전傳도 일관성있게 전부 붙여 주시오.”
“앞에 꾸미는 말이 올 경우 전傳은 띄어 쓰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무조건 붙여 주시오. ○○고등학교도, 참! 영어, 이건 분절대로 끊어 주시오. 아무 데나 끊어서 줄을 바꾸면 절대 안 됩니다.”
“잘 알았습니다. 원고대로 다 붙여 놓겠습니다.”
원칙이 흔들리니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한참을 비틀걸음으로 걷느라 꼭 한 마디 할말마저 잊고 만다.
“영어는 분절대로 끊어야만 되고 한글은 원칙을 무시하고 마구 붙여도 됩니까?”
비틀걸음일 땐 이 말을 잊어먹었다가도 한참 시간이 지나면 꼭 떠오르는 말이기도 하다.
‘자는둥 마는둥, 간지 오래다.’
‘네가 알바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데 10년 걸렸다.’
‘중학교과정은 3년이다.’
‘밥도 못하는 아가씨.’
‘집으로 못간다, 볼만하다, 준셈 치고.’
“아니, 이걸 원고대로 다 붙여 놓으면 어쩝니까?”
“저희들은 잘 몰라서 원고대로 했습니다.”
“출판사에서 그런 걸 모르면 어떻게 합니까? 원고는 그렇게 되었어도 다 알아서 해줘야지-.”
은근한 경멸의 눈빛이다. 어디 이뿐인가. 장단도 가지가지, 가락도 각양각색이니 어느 놀음에 깨춤을 춰야 할지 갈팡질팡 맴돌다가 이리 부딪히고 저리 자빠지고 도무지 바른 걸음이 되지 못한다.
아무리 꼿꼿하게 서 보려고 해도 기우뚱 비틀걸음이 된다.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이쪽으로 쾅, 저쪽으로 쿵, 비틀비틀 좌충우돌 상처투성이가 된다.
거나하게 취해 세상 거리낄 것 없이 한번 갈짓자로 걸어보고 싶다. 원칙이 아닌 변칙이 와서 치고 받아 그로기 상태가 되어 비틀거리는 걸음이 아니라 다 팽개쳐 두고 거나하게 취해 기분 좋은 비틀걸음이었으면 싶다.
첫눈. 그 첫눈 속을 거리낌없는 비틀걸음으로 걸었으면 더욱 좋겠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면서 말이다.
서정환 -----------------------------------------------
『문예연구』 신인문학상(1995), 수필집 『동백꽃 사연』, 신아미디어그룹 회장, 『문예연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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