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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4년 1월호, 테마수필-음식이야기] 당당히 말할 수 있게 : 냉면 - 박숙자

신아미디어 2014. 10. 25. 10:03

"오묘한 맛을 내기 위해서 적당한 양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냉면이 되듯이, 제자리에서 제몫을 하는 친구들 덕분에 아름다운 모임이 계속되고 있다. 간이 맞는 친구들과의 모임을 기다리다 보면 날짜가 훌쩍 달포를 지나간다. 혹여 음식이나 사람 사이에 간이 싱겁거나 짜다면 친정이 전주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간을 잘 맞춰 보겠다는 의욕을 감이 부려본다. 선반 위의 소금 통이 구석자리를 말없이 지키고 있다. 과유불급의 지혜로 소리 내지 말고 간을 잘 맞추라는 듯이."

 

 

 

 

 

 

 당당히 말할 수 있게 : 냉면        박숙자

   친정이 전주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뜸 “음식솜씨가 좋겠네요.”라고 화답한다. 그럴 때는 잠시 난감하다. 하기야 전라도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은 서울에서도 망하지 않는다는 소문이라니 전주 사람, 아니 전라도 여자들이 음식을 잘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쌀에 뉘가 끼여 있듯이 나처럼 솜씨 없는 예외가 더러 섞여 있어 과찬에 민망할 따름이다.
   음식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며칠 전 친구들과 냉면을 맛있게 먹었다. 냉면은 겨울에 먹는 것이 제 맛이라고 하지만 올여름처럼 숨 막히는 날에 먹는 냉면의 맛도 일품이다. 살얼음이 동동 뜨는 육수에 겨자와 식초를 알맞게 쳐서 새콤달콤하게 어우러진 맛을 어디에 비할까. 무더위가 제풀에 놀라 저만치 달아난다.
   지인이 평양냉면에 얽힌 일화를 소개한다. 냉면가게의 주방장이 주인과 사이가 틀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사관계는 언제나 사업장의 변수였나 보다.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지 않은 주방장은 가게를 망하게 하고 싶은 심술로 가득 찼다. 그 방법의 하나로 육수를 낼 때 고기를 비롯하여 모든 식자재를 아끼지 않고 듬뿍 넣었다. 재료를 많이 넣음으로써 주인의 호주머니를 축낼 셈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충분한 재료 덕분에 육수가 맛있게 우러나서 가게는 손님으로 넘쳤다. 냉면의 맛은 육수가 결정한다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생겨난 이야기겠지만 우리들은 모두 동감했다.
   맛을 좌우하는 것은 구수한 육수와 면발에 있다. 메밀을 주원료로 해서 투박하지만 툭툭 끊어지는 면발을 사용하는 평양냉면과 메밀에 감자 고구마 전분을 넣어 질긴 듯하면서도 쫄깃함을 자랑하는 함흥냉면이 있다. 나이 드신 어른들도 한 그릇을 시원하게 비워내는 평양냉면과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함흥냉면은 나름대로 개성과 맛이 있어 애호가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
   식탁 위에 냉면이 놓인다. 차가운 육수 속에서 사리가 마음껏 모양을 내고 있다. 잘 뽑힌 면발의 용틀임 자세는 교태스럽다. 똬리 진 그 자태 위에 살짝 걸터앉은 편육 두어 쪽과 무절임, 삶은 달걀의 매끈함이 맛깔스럼을 더한다.
   어린 시절 소풍날 먹던 달걀은 사리 밑에 살짝 숨기고 먼저 사리의 요염한 자태를 푼다. 육수에 사리가 적당히 잠기면 식초, 겨자 등을 넣고 맛을 낸다. 배가 고프거나 몹시 더울 때는 만사 제쳐두고 시원한 육수를 먼저 마시기도 하지만. 사리가 바닥에 몇 가닥 남으면 달걀을 먹을 차례다. 달걀을 집으며 가끔 반문한다. 왜 반쪽인가, 한 개를 얹으면 어때서……. 그런 아쉬움 속에서 달걀 반쪽을 먹고 나면 정말 이상하게 배가 딱 부르다.
   냉면. 우리들 곁에서 사철 사랑받는 음식이다. 즐기다 보니 고마운 마음마저 든다. 그래서일까. 한 그릇의 냉면에도 사람 사는 이치가 배어 있다.
   십여 년 전에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여고 동창생 몇이 모여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이 중년에 접어 든 우리를 묶어 만남을 주선했다. 여고 동창이라는 공통분모가 큰 원을 그리고 있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개성이 강한 작은 원들의 집합체이다. 어떤 친구는 밤새 제 몸을 우려 낸 육수처럼 티내지 않고 봉사를 하고, 어떤 친구는 샛노란 달걀처럼 화사하게 분위기를 이끌기도 하고, 때로는 편육처럼 영양제 역할을 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겨자처럼 톡 쏘아서 존재를 빛내주는 친구도 있다. 작게는 동창들 이야기이지만 넓게 보면 사회 구성도 이와 비슷하리라.
   모든 재료가 다 중요하지만, 적당한 간기가 음식의 맛을 결정한다고 생각된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알맞은 간기. 그렇다면 사람 사는 세상의 간기는 무엇일까. 뜻을 한곳으로 모아주고 서로를 인정하고 밀어주고 끌어당기는 적당한 힘의 균형이 아닐까. 뜻이 맞는다는 것은 서로를 신뢰하고 양보하는 배려심이다. 부담 주지 않고 튀지 않는 속정을 느끼며 네가 있어 내가 기쁘다는 마음의 교류가 간의 기준이 아닐까.
   오묘한 맛을 내기 위해서 적당한 양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냉면이 되듯이, 제자리에서 제몫을 하는 친구들 덕분에 아름다운 모임이 계속되고 있다. 간이 맞는 친구들과의 모임을 기다리다 보면 날짜가 훌쩍 달포를 지나간다.
   혹여 음식이나 사람 사이에 간이 싱겁거나 짜다면 친정이 전주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간을 잘 맞춰 보겠다는 의욕을 감이 부려본다. 선반 위의 소금 통이 구석자리를 말없이 지키고 있다. 과유불급의 지혜로 소리 내지 말고 간을 잘 맞추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