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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계간문예 2013년 겨울호, 특집 도서관·문학관 파견 문학작가-익산시립모현도서관 활동작가] 청산도 외 5편 - 유은희

신아미디어 2014. 9. 24. 14:08

"2013년 도서관 문학관 문학작가 지원사업으로 익산시립모현도서관에서 작가로 활동하신 '유은희'님의 시 6편을 소개합니다."

 

 

 

 

 

 청산도  외 5편        /  유은희


늙은 목선의 헤진 밧줄에
섬은 매여 있다
하얀 손을 흔들며
바람 돛을 달고 수평선을 돌아 와
비안개 속에 닻을 내렸다

 

너무 큰 고무신에
슬픈 노랫말을 끌고
방파제로 달리던 섬 사내는
잃어버린 소를 찾아
안개 속 메아리가 되었다

 

끌끌, 혀를 차던 눈빛들
그렁그렁 사립마다 내 걸리고
길 잃은 메아리 바람고삐 꽉 잡고
별똥별로 온 산 헤매었다

 

소를 따라 섬 사내는
가시덤불 기슭까지 차오른 파도,
파도가 되었을까


노쇠한 목선에 묶인 채
섬은 날마다 파도를 앓고
긴 기다림을 울어 외는 갈매기들
낮은음표로 저녁하늘 겨워 난다

 

파리한 맨발로 등댓불을 켜든
외딴 섬

 

 

 

 노인정 가는 길

 

노인정으로 가는 유모차에는
제상의 과일 몇
갓 버물린 푸성귀

 

노인정으로 가는 유모차에는
찌그러진 냄비에
멍든 자리 도려낸 감자 고구마

 

시큼한 싱건지 꿀렁꿀렁 나서고
고샅마다 해찰하는 똥개 나서고

 

그란당가?
그랬당가?
어찬당가?
물음표로 오물오물 벗어 모인 신발들

 

먼저 떠난 신발의 빈자리에
눈시울 붉은 햇살이 슬며시
여윈 발을 디뎌보네요.

 

 

 

 도락리길 당리길  — 청산도

 

당산제길 너머 큰언니 시집가던 날
더는 돌아볼 수 없는 두렁마다
완두콩은 그렁그렁 눈물보를 키웠죠

 

서너 두렁 사이에 어머니와 큰언니
같은 모습으로 호미질소리 되받으며
차마 허리 펴고 손짓하지 않았죠

 

아가,
어머니,
메아리도 한 번 울지 않던 날

 

또아리 끈 꽉 물어 물동이 받쳐 이고
칭얼대는 물방울 훔쳐내며
큰언니 고무신 훌쩍이던 날

 

가는 길 두렁 두렁마다
눈물 같은 완두콩은 여물어
푸른 울음보를 터트리고 말았죠.

 

 

 

 다시 청산도로 오는 길

 


달이 조는 문틈으로 쓰윽
수줍은 편지 밀어 넣고는
코스모스 길 하늘하늘
그림자만큼만 떨어져 걷던 우리는

 

멍석위로 흩어진 별들처럼
청보리밭 헤매던 새벽달처럼
발목 다  젖고
서리 내려앉은 반백의 우리는

 

순이네 등잔불 행랑방이 아닌
파도치는 영이네 앞마당이 아닌
세상의 변방에서 우리는

 

유채꽃밭 두렁길 따라
늙은 소의 걸음으로 구불구불
느리게 돌아와도 좋은 우리는.

 

 

 

 항아리

 


어머니는 항아리를 쓰다듬네요
종일 빈 집 메아리 길어
저녁 안치고 구름 피워 올리는
귀 멀고 이 빠진 항아리
짜고 매운 생채기를
꽉 다물었네요

 

한 줌 끼니를 훑어
눈 녹는 날에
고샅을 지나는 흰구름도
쉬어가게 했었죠

 

바랜 고쟁이 한 벌 물려놓은
아주 작고 동그란 하늘을
처마 끝 물방울 하나가
오래 들여다보네요 어머니.

 

 

 

 런닝구

 


아버지 런닝구 어머니가 물려 입던 날
어머니 등에는 북두칠성이,
벌벌벌 어린게들 게 구멍 차오르듯
가난한 솥에 밀수재비 끓어오르듯

 

덧대어 꿰맨 별들이
빈 젖 빠는 소리로 총총했다

 

헐렁해진 품 속 어린것들은
더 큰 별자리 하나씩 품어 자랐고
바람은 언제나
구멍 난 어머니 등에서 일었다.

 

 

 

유 은 희  --------------------------------------------

   완도 청산도 출생, 1994년 등단(시), 시집 《도시는 지금 세일중》외 다수, 국제해운문학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