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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4년 01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유곡柳谷 - 김양자

신아미디어 2014. 9. 22. 16:09

"버드나무 골짜기 유곡柳谷은 내 고향 같아 한번은 꼭 와보고 싶었다. 돌아오는 길은 과제를 푼 듯 가볍기만 하다. 차창 밖에서는 낙엽들이 세우細雨처럼 뿌려지고 있다."

 

 

 

 

 

 

 유곡柳谷        김양자


   간밤에 낙엽비가 내렸는지 보도는 떨어진 낙엽들로 카펫을 이루고 있다. 촉촉한 낙엽들이 모여 앉아 가을이 저물고 있음을 알려주는 듯하다. 이른 아침 잎을 털어내며 서 있는 나무들을 지켜보면서, 문득 올해가 가기 전에 내가 키웠던 첫 나무들이 자랐던 곳을 찾아보리라 생각했다.
   50년 전 초임 교사로 의령군 유곡면에 첫 발령을 받았다. 2년 가까이 교직 생활을 한 그곳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때쯤이면 황금벌판이 펼쳐있고 단풍으로 물든 나무들과 홍시를 빨갛게 달고 서 있는 감나무들로 이룬 아름다운 동네였다.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쳐진 후미진 농촌 마을을 냇물이 감싸 흐르고 군데군데 징검다리가 있었다. 하루에 한번 저녁나절이면 도착하는 버스의 종점이었다. 이 버스를 놓치면 큰길에서 십 리 길을 부엉이 소리를 들으며 걸어 들어와야 했다.
   봄눈 녹을 무렵이면 벚꽃, 앵두, 복사꽃들이 아이들 웃음처럼 피어났다. 풋보리의 푸르름, 보라색 자운영 꽃무리, 하얀 안개꽃 같은 상고대, 눈 덮인 초가 마을의 순백, 무엇보다 유곡이란 이름답게 곳곳에는 버드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웃 장에 갈 때나 내가 미장원에 갈 때는 마을 뒤에 있는 고개를 넘어갔는데, 늑대가 출몰하는 곳이라 무서워서 몽둥이를 들고 다녔다. 바람산 밑 맑은 소沼에서 빨래할 때면 셜록 홈즈의 ‘마법의 개’처럼 절벽 위에서 “깽깽~” 여우도 울었다. 요즘 시골에서는 동네 삽살개들의 짖는 소리도 사라지고 무엇보다 워낭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무섭기만 하던 그 소리조차 이제는 그리움으로 피어난다.
   첫 가정방문 때였다. 선배 교사들의 주의 말을 듣고, ‘양반 동네, 00남씨성’을 외우면서 징검다리를 건너 한참 논둑길을 걸어 기와집 마을에 들어섰다. 대문을 열자 두루마기와 갓으로 정장을 한 할아버지가 대청마루에 서 계셨다. 첫 방문 집부터 도시에서 유행하던 맘보바지를 입은 내 차림이 민망해져버렸다.
   “안항雁行이 어찌되시는지요?”
   안항은 형제를 뜻한다. 햇병아리 선생이 동문서답할까 민망하지 않게 하면서도 반듯한 경어를 쓰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오래도록 내게 큰 어른으로 남아있다.
   별이 무더기로 쏟아지던 여름 밤, 동네 처녀들이랑 노천 목욕을 갔다. 별빛을 닮은 자갈들이 하얗게 빛났고, 개구리 소리가 잔칫집처럼 요란했다. 난생처음 하는 노천 목욕이라  부끄러워 속옷을 입은 채 물속으로 들어갔다. 동네 처녀들이 수다로 몸을 씻는지 이야기가 그침이 없다. 알고 보니 그건 “여긴 여자들이 목욕하고 있어요.”라는 신호라고 했다. 가을엔 그녀들과 풋바심도 하고, 알밤도 줍고, 곶감도 만들었다. 한겨울 방학이면 남폿불 등피가 검어질 때까지 책읽기도 했다. 금반지 두 돈 이상은 받아야 시집간다던 소박한 그녀들은 지금 어디로 시집가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 시절엔 네 시간 넘어 걸리던 길을, 오늘은 한 시간 반을 달려 유곡면에 도착했다. 마을과 들녘엔 가을걷이가 한창인데도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아 고즈넉한 한촌이 되어 버렸다. 1972년도에 새로 지었다는 학교는 이층 건물인데 학생은 고작 13명이란다. 운동장 한 편엔 노란 스쿨버스가 그림처럼 서 있다. 그땐 벽촌 학교이긴 했어도 각 학년마다 한 두 반은 있었고, 내가 맡은 4학년은 40여 명이었다. 운동장 가의 버즘나무, 길가의 미루나무, 냇가의 버드나무도 잘 보이지 않는다. 징검다리 있던 곳들은 번듯한 다리가 놓여져 찻길을 이어준다. 변해버린 낯선 풍경에 격세지감이 밀려든다.
   교문을 들어섰다. 텅 빈 운동장에 서니, 그 시절 어린아이들의 얼굴이 한꺼번에 떠올라, 마음속으로 불러본다. ‘남맹아, 남덕아, 상범아, 상석아, 대우야…….’ 저기 버즘나무 밑에서 구슬치기를 하다 말고 “선생님.” 하며 달려올 것 같다. 처음인 여선생님을 보호한다고 늘상 막대를 들고 다니던 코흘리개, 한쪽 다리가 조금 불편해서 야외학습에 늘 빠져야 했던 꼬마, 작은 소쿠리에 발간 앵두를 하나 가득 담아오던 우야, 냇가 조약돌을 반들반들 닦아 선물했던 녀석도 있었지. 그 아이들이 강골이 되었어도 내겐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는 추억 수첩의 한 쪽, 한 쪽 들이다.
   학교 뒤 내가 자취하던 집을 찾아보았다. 자취집과 객지생활을 도와주었던 뒷집 이씨댁은 흔적이 없다. 뒷개울에 다리를 놓으면서 없어졌다. 남은 빈 집터에는 누런 풀더미 속에 쑥부쟁이만 수북이 앉아있다. 기웃거리고 있으니 등이 살짝 굽은 할머니가 알은체를 한다. 옛날에 여기서 근무했다고 했더니, 반가워하며 평상에 말리던 나뭇가지를 한 봉지 준다. 사양하다 받아보니 구절초, 쑥부쟁이, 산국 등의 꽃들과 가지를 꺾어 말린 부인병에 좋다는 들국화차다. 차를 마신듯 가슴이 따듯해져 온다.
   교사 뒤, 아직도 빨간 홍시가 남아있는 감나무를 쳐다보고 있을 때다.
   낯선 손님의 출입을 눈치챈 패션이 모던한 분이 다가왔다. 초면의 인사를 나누자 이내 친숙해졌다.
   “따뜻한 차 한 잔 하시지요.”
   여 교장 선생님의 친절한 안내가 없었다면, 끝도 없는 상념에서 헤어나지 못할 뻔했다. 교무실에서 오랜만에 만난 정겨운 사람들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되면 버드나무가 움을 틔우고, 복사꽃이 꽃구름을 이룰 것이다. 농부는 대지에 씨를 뿌리고, 보랏빛 자운영이 들녘에 피어날 것이다.  낯선 나그네에게 한 동네 지인처럼 다정히 대접해주는 훈훈한 시골 정情은 생활이 발달되고 변하여도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지금 이 가을에 여기 와 서니,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세월이 낙엽으로 진다.
   버드나무 골짜기 유곡柳谷은 내 고향 같아 한번은 꼭 와보고 싶었다. 돌아오는 길은 과제를 푼 듯 가볍기만 하다. 차창 밖에서는 낙엽들이 세우細雨처럼 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