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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인간과문학 2013년 겨울호, 수필] 어머니의 웃음 - 최성옥

신아미디어 2014. 9. 18. 17:53

"세상에서 보람 있는 일 중 하나가 어머니가 되어 아이를 사랑으로 키워내는 일 아닐까. 축복 중에 축복은 내 아이를 키우며 성장과정을 지켜보고 또 귀여운 손자를 안아보는 일일 것이다. 먼 시간 전에 어머니의 웃음. 내게 가장 보람된 시절의 웃음. 그리고 손자를 안고 미소를 머금은 며느리의 표정은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웃음이리라."

 

 

 

 

 

 

 어머니의 웃음        최성옥

 

   온 집안에 화들짝 웃음소리 넘친다.
   이제 첫돌이 코앞인 손자 녀석이 걸음마를 시작했다. 머리를 방바닥에다 박고 자꾸 기는 연습을 하더니만 이젠 걷기 연습이다. 궁둥이엔 커다란 기저귀 매달고 뒤뚱 한걸음 옮기고, 잠시 멈추었다 또 한걸음을 간다. 며느리는 손뼉을 치며 아기 이름을 부르고 아기는 엄마를 향해 어려운 발자국을 뗀다. 지켜보는 가족들은 그 작은 보폭이 마치 공중줄타기를 보는 듯이 아슬아슬해서 사뭇 진지하다. 아기가 풀썩 주저앉으면 ‘아이쿠’ 하며 일으켜 세우고 무사히 걸음을 떼면 박수소리 웃음소리로 떠들썩하다.
   아기는 제 딴에 균형을 잡으려는지 양손을 옆으로 살짝 벌리는 자세를 취한다. 한발을 떼고 나면 꽤 만족한지 웃고, 걷는 재미와 내심 어떤 성취감이 느껴지는지 또 한 번 웃고. 솜털 보송보송한 한 얼굴에 보름달마냥 맑은 웃음이 걸려있다. 그 해맑은 웃음에 어른들도 잠시나마 맑고 순수해져 만사 시름 잃고 행복한 웃음을 웃는다. 아기의 천진한 웃음에서 부모들은 열심히 살아가야할 원동력을 얻게 되나보다.  
   할머니인 나는 아이를 낳아보지 못한 여인네처럼 귀여운 손자의 일거수일투족이 그저 신기하고 신비하기만 하다. 때맞추어 뒤집고 기어 다니고 걷고 어눌한 발음으로 엄마 아빠를 부르는 아이의 그 조화는 무엇인가.
   내가 작은아이를 낳았을 때는 8월 중순이었다. 예정일을 보름이나 넘기고도 아기는 세상 밖으로 나올 생각은 안하고 잔뜩 무거운 몸은 무더위에 휘둘리고 있었다. 미숙아보다 과숙아가 더 문제라고 나에게 겁을 주던 의사는 유도분만을 권했다. 병원을 다녀와서도 사나흘이 지났을까. 뱃속 과숙아도 걱정되고 당장 겪는 더위와 축 쳐진 태산 같은 배로 심란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아침시간에 아기 옷 보따리를 싸들고 혼자 산부인과로 갔다. 팔뚝에 유도분만을 하려는 촉진제가 꽂혔다. 큰아이 적에는 진통이 자연적으로 와서 점진적인 산통인데 유도분만은 태풍 밀려오듯 한꺼번에 갑작스레 산통이 닥쳤다. 침대의 철제난간을 잡고 이를 악물고 비명을 지르는데 퇴근해서 병원으로 달려온 남편은 고통스러워하는 내 모습에 병실 안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남편의 그런 모습이 더 불안해서 나는 남편을 병실 밖으로 내쫓았다. 죽어도 살아도 어차피 내가 겪을 고통이니. 이런 순간이 몇 시간 더 지속 된다면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태어난 벌거숭이 아이를 보고 나는 배시시 웃었다. 조금 전에 진저리나는 고통은 까맣게 잊은 채.
   손자를 어르고 부르는 며느리의 낭랑한 목소리에 웃음이 실렸다. 그 웃음소리와 모습. 어디선가 보고 들었던 익숙한 모습. 흐릿한 영상을 떠올리자 파노라마처럼 선명한 색채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 어머니의 웃음. 그 옛날 내 어머니도 저런 웃음을 웃으실 때가 있었지.
   어머니는 딸만 다섯을 내리 낳으셨다. 첫째 딸을 어린나이에 병으로 잃어버려 딸이 넷이 되었다. 독자인 아버지는 씨받이를 들여서라도 자손을 보라는 집안의 성화에 시달리셨다. 의사이셨던 아버지가 매번 산파가 되셨는데 아기를 받고 아무 말씀 없으시면 또 딸이었다고. 산고를 표현할 염치도 없으셨을 테니. 어머니는 죽고 싶어도 남은 자식 때문에 죽을 수도 없는 죄인의 심정이었다고 하셨다. 내 아래 동생이 잘못되어 유산이 되었는데 아들이었더라고. 어머니는 원통하고 아쉬운 마음에 슬퍼하셨다. 그리고 난 것이 내 밑에 여동생 다섯째였다. 이번에 낳고 또 딸이면 이젠 포기하리라. 어머니는 그렇게 다짐을 하셨는데, 다행히 여섯 번째에 애타게 바라던 아들일 줄이야. 드디어 득남을 하셨다.
   막내 남동생이 태어나던 날. 그때는 컴컴한 한밤중이었다. 잠결에 외할머니의 외침과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딸들은 잠에서 깼다.
   “애들아 일어나라” “어여 일어나, 엄마가 아들 났다네.”
   외할머니의 목소리는 들떠서 떨리고 있었다. 잠에서 덜 깬 눈을 비비면서 나는 씩 웃었던 것 같다. 어렵던 퀴즈를 풀어버린 것 같은 흐뭇함에 어머니의 슬픔이 끝난 것 같은 안도감에서.
   우리 집엔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사내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에 아버지의 발걸음에 힘이 실리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엄마의 표정은 숭고했다. 나는 덩달아 신이 나서 무언가 떳떳해진 것 같았다. 친구들에게도 남동생이 태어난 걸 입이 터져라 자랑하고 다녔다. 이미 동네에 소문이 나서 애나 어른이나 모르는 이가 없었건만.
   우리 딸들은 이대 독자 남동생이 예쁘다고 안아주거나 업어줄 수 없었다. 행여나 어디 다칠세라 어머니의 정성이 대단했다. 딸들과의 차별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지만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것은 당연하고 마땅하게 남동생이 누려야할 몫이라 여겼다. 어린 남동생의 재롱에 달라진 어머니의 환한 얼굴을 보는 것만이라도 우리에겐 큰 보상이었다. 웃음이 떠나지 않는 어머니의 얼굴. 그렇게 행복해 뵈는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우리에게 살면서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정말 순수하고 맑은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때론 마지못해 웃어주는 웃음도 있고 억지유머로 웃음을 유도하기도 하고 빈정거리는 비웃음도 있었을 테고. 너무 기가 막힌 헛웃음도 지었을 것이다. 진정 기뻐서 웃는 것도 잠시의 순간일 것이다. 세상엔 의외로 웃음이 종류도 하도 많아 나열하기도 바쁜 것 같다. 하지만 어린 아기의 티 없는 웃음, 그 아기를 바라보며 웃는 엄마의 행복한 웃음과 비교될 웃음이 세상에 존재할까? 없을 것이다. 그 웃음은 삼신할머니의 특혜로 오직 아기와 그 어미에게만 내려준 웃음일 터이니.
   누군가가 내게 살아오면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또 몇 번이라도 아이들을 낳아 기를 때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때보다 더 진한 행복감을 손자에게서 느끼는 건 왜일까. 내 큰아들이 혼자 듬뿍 받던 사랑을 네 살 터울로 태어난 작은아들에게 옮겨가더니 이젠 그 사랑이 손자에게 전해진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하지 않는가.
   얼마 만에 손자를 만나니 또 몇 가지 늘어난 재롱에 나는 그만 바보처럼 넋 놓고 웃고 만다. 노년의 우울을 확 날려버릴 신비한 묘약이 손자에게 있다. 이젠 손자 사진만 봐도 입이 벌어지고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진다.
   세상에서 보람 있는 일 중 하나가 어머니가 되어 아이를 사랑으로 키워내는 일 아닐까. 축복 중에 축복은 내 아이를 키우며 성장과정을 지켜보고 또 귀여운 손자를 안아보는 일일 것이다.
   먼 시간 전에 어머니의 웃음. 내게 가장 보람된 시절의 웃음. 그리고 손자를 안고 미소를 머금은 며느리의 표정은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웃음이리라.

 

 

최성옥  --------------------------------------------------------

   《수필과비평》 등단(2002), 수필과 비평작가회 회원, 도봉문인협회 회원, 수필과 창작 회원